부여와 고구려 신화구조가 같다는 것은 고구려가 부여 후예라는 것을 말해준다.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③ 추모신화가 동명신화를 차용한 이유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의 정통성(Legitimacy)과
정체성(Identity)을 담은 건국신화의 비밀

▲ 아시아 고대국가의 시조신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북방 유목민 계통의 천손신화와 알에서 태어나는 남방 농경민 계통의 난생신화로 구분한다. 천손신화의 주인공은 하늘(天), 산(山), 나무(木) 등에서 땅으로 내려오며, 난생신화의 주인공은 알(卵),박(匏), 궤짝(櫃), 배(舟) 등에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소수의 북방 유목민이 다수의 남방 농경민을 지배하는 형태로 시조신화가 만들어진다. 고구려 주요 구성원은 요하일대 동북평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예맥족이다.

고구려 시조는 주몽(*본명 상해)이다. [삼국사기]는 ‘동명성왕(東明聖王)’, <광개토왕릉비>는 ‘추모왕(鄒牟王)’으로 쓴다. 동명성왕이 추모왕이다.

참고로 추모는 고구려 시조에게만 붙여진 특별 왕호이다. 추모는 훈족(흉노)의 왕호 선우(單于)와 같으며, 둘 다 ‘천자(天子)’의 뜻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추모는 신(神)으로, 선우는 하늘(天)로 여김이다.(#1) 추모왕은 고구려 시조의 왕호가 이름으로 변화한 경우이다. 동명성왕은 또 어떻게 해서 붙여졌을까?

고구려 건국신화를 ‘추모신화’라고 한다. 신화 내용을 보면, 주몽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알에서 태어나며 가축우리의 돼지와 말이 어린 주몽을 해치지 않고 보호한다.

또한 주몽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다. 그런데 이 내용은 [후한서]<동이열전>부여 편에도 똑같이 나온다.(#2) ‘동명신화’라고 한다.

다만 두 신화의 차이점은 두 사람 모두 강을 건너면서, 추모는 강을 향해 황천의 아들이라 외치고, 동명은 별다른 외침 없이 활을 강에 내리친다.

[후한서] 기록의 주인공은 고구려 주몽이 아닌 북부여 동명왕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 추모신화가 북부여 동명신화를 차용한다.

동명왕은 누구일까?

북부여 5대 천제(왕)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몽골 왕의 칭호인 ‘汗(칸)’을 쓴 인물이다. 동명신화에 따르면, 색리국(索離國-고리(kohri)국)(#3)출신 고두막한은 남쪽으로 내려와 북부여 동명왕이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무슨 이유로 동명신화를 차용한 걸까?

동명왕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다. [북부여기](범장 저술)를 보면, 고두막한은 서기전108년 홀본으로 내려와 즉위하며 스스로를 ‘동명’이라 칭한다.(#4)

이어 서기전86년 북부여를 정식으로 계승하고, 한(漢-현도군)을 서쪽으로 몰아내며 옛 고조선의 영토인 지금의 요하일대 동북평원을 차지한다.(#5)

주몽이 홀본을 기반으로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서기전37년) 동명왕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 동명왕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적인 영웅이다.

당연히 동명신화는 고구려 건국의 명분과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그래서 고구려 건국신화는 동명신화를 차용한다.

참고로 1922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산(*연개소문 셋째아들)묘지명 기록은 동명과 주몽을 명확히 구분한다.

“옛날에 동명은 하늘의 기운에 감응되어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浿水)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踰㴲川而啓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동명은 계국(啓國)자이고, 주몽은 개도(開都)자이다. <광개토왕릉비>도 주몽(추모)을 건국자가 아닌 건도(建都)자로 쓴다.

▲ 천남산은 천(연)개소문의 셋째아들이다. 묘지석은 1922년 중국 하남성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한다. 명문의 글자크기는 1.5㎝이며 대략 1행 29자로 전체 28행이다. 묘지명은 천남산의 출신, 관직, 품계 및 당에 봉사한 행적 등을 담고 있다. 천남산의 아들 광부(光富)가 지었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밝혀져 있지 않다. 서체는 해서(楷書)로 남북조시대의 필치가 많이 드러나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동명신화 차용은 단순히 북부여 계승차원을 넘어선다. 고구려는 잃어버린 북부여 180년 역사 전체를 가져간다.(#6) 추모신화를 보면,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를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한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출발은 주몽이 아닌 해모수로부터 시작한다. 참고로 고구려 역사기간은 700년이 아니라 900년이라는 내용이 [삼국사기] 보장왕 편에 나온다.

[고구려비기]를 인용한 기록이다.(#7) 이는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북부여 역사기간 180년을 포함한 사실을 설명한다.

고구려 건국신화에는 우리 역사에서 잘려나간 북부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留記芻牟鏡](南堂筆寫本). 東明七年庚寅(*前31年) 於是順奴國相加再思 卒本國相加延鳳 桓那囯相加桓應 黃竜囯相加于仁 沸流囯相加松讓 荇人國相加旺發等 上大單于之號于上 上曰單于卽芻牟也 同語而異字 彼以為天此以為神 神卽天也 何必單于然後可乎.

#2, [後漢書]<東夷列傳>夫餘. 初 北夷索離國王出行 其侍兒於後姙身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大如雞子 來降我因以有身 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復徙於馬蘭 馬亦如之 王以爲神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掩淲水 以弓擊水 魚鼈皆聚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而王之焉於 

#3, 고리국(槀離國), 탁리국(橐離國)이라고도 한다. 서기전5세기~서기전2세기까지 만주 송화강 북쪽지역에 존재한 나라로 이해하나, 동(東)몽골 또는 바이칼호 근처에 존재한 코리국(Kohri, 고리국)으로 보기도 한다.

몽골 징기스칸의 후예인 부리야트(Buriyats)족의 구전에 따르면, 이 일대는 코리국의 발원지로 아주 옛날 부족의 한 일파가 동쪽으로 건너가 부여,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몽골비사』에는 징기스칸의 시조모인 알랑고아가 고구려 시조 주몽(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로 나온다. 몽골이 가장 강성했던 원(元)나라 시기, 몽골은 고려를 정복하고도 자국 영토로 편입하지 않고 대신 속국으로 삼는다.

#4. [北夫餘紀] 5世 檀君 高豆莫. 癸酉元年(*前108年) 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 帝爲人豪俊 善用兵 嘗見北夫餘衰 漢寇熾盛 慨然有濟世之志 至是 卽位於卒本 自號東明 或云高列加之後也.

#5. 한무제는 서기전108년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진번군(眞番郡)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서기전107년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한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서기전82년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지며, 현도군은 서기전75년 동명왕(고두막)에 의해 서쪽으로 축출된다. 

#6. [북부여기]에 따르면, 서기전239년 해모수(1세)가 웅심산(길림성 장춘)에서 북부여를 건국하며, 모수리(2세)→고해사(3세)→고우루(4세)로 이어지다, 서기전108년 고리국출신 고두막(5세)이 졸본(홀본)으로 내려와 고우루 사망이후인 서기전86년 북부여를 정식으로 계승하며, 서기전58년 고무서(6세)에 이르러 멸망한다. 북부여의 역사기간은 서기전239년에서 서기전58년까지 대략 180여 년간이다.

▲ 북부여 역사요약도. 북부여에서 고주몽의 고구려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7. [三國史記]<高句麗本紀> 寶藏王.  二十七年(*668年) 二月 …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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