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참전으로 김일성의 남침이 실패로 돌아갔다.

 

글: 전집현(자유 기고가)

 

한국전쟁을 좌우한 일본군, 연합군 16개국 참전 명단에 없어

식민지배로 축적한 한반도 정보 미군에 넘겨 전쟁역전 계기

상륙작전 불가능한 인천상륙 가능케 한 건 일본군 작전 때문

식민지배로 인천 지형지물 꿰뚫고 있던 일본군 정보로 가능

원산만에서도 일본군이 북이 설치한 기뢰 등 제거 덕에 상륙

전쟁 전반에 걸쳐 첩보활동, 지도제작, 미 화학전 세균전 도와

일본 후쿠오카에 혈액은행, 열도 병참기지로 전쟁 역전시켜

▲  상륙작전이 불가능한 인천에 상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백아더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로 인천에 대한 지리, 지형 등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던 일본군이 미군에 정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편집인 주).
▲ 상륙작전이 불가능한 인천에 상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백아더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로 인천에 대한 지리, 지형 등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던 일본군이 미군에 정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편집인 주).

<일본이 6.25 전쟁때 참전했다. 한국 재식민지화를 위해??>

1. 6.25전쟁에 참전하고도 참전국 명단에 없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참전을 했고, 4개국이 비전투 부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 같은 참전국과 파견부대의 명단에는 일본이 빠져있다.

일본은 점령군인 미군의 압력을 받아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고,

식민지배를 통해 축적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자료를 활용해 전략을 구상, 실행하려던 것이었다.

2. 6.25전쟁때 일본의 역할은 지대

(1) 인천상륙작전 지원

상륙작전 한달 전에 투입된 일본인 정보요원(전직 일본군 장교)들은

어뢰탐지, 조작 그리고 수심, 어느곳 들어가야할지 등등 인천의 모든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됐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전차양륙함(LST)의 6할(60%)은 일본인이 운행했다.

인천상륙작전 시 동원된 일본인 선원과 항만노동자는 3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작전으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가졌다는 인천의 문제점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일본에서 급조된 '알류미늄 사다리'이다.

'일본알류미늄공업'는 당시 미국 극동사령부(GHQ)의 명령으로 60개의 사다리를 만들어 공급했다고 한다.

▲ 원산에서도 상륙이 가능하였던 것은 이 지역 지형지물을 잘 아는 일본군의 지원 때문이었다. 북한이 설치한 기뢰를 일본군이 제거함으로써 미군이 상륙할 수 있었다(편집인 주). 위 지도는 일본군이 제거한 기뢰 설치도. 
▲ 원산에서도 상륙이 가능하였던 것은 이 지역 지형지물을 잘 아는 일본군의 지원 때문이었다. 북한이 설치한 기뢰를 일본군이 제거함으로써 미군이 상륙할 수 있었다(편집인 주). 위 지도는 일본군이 제거한 기뢰 설치도. 

 

(2) 원산상륙작전 지원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진격 중이었다.

유엔군 전부대에 대한 원할한 보급을 위해

동부전선에 새로운 상륙항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했고 그래서 원산상륙작전이 결정됏다

그런데 문제는 바다의 복병기뢰였다. 상륙을 막는 기뢰가 원산 앞바다에 부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원산상륙작전에 필요한 기뢰 제거 작업에 참여할 것을 일본에 요구한다.

당시 요시다 수상은 전쟁에 엮이는 걸 피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10월 4일에 '일본특별소해대 (日本特別掃海隊)'를 창설한다.

25척의 소해정과 1200여명의 소해대원들은 원산 앞바다에 북한이 잔뜩 깔아둔 기뢰를 제거함으로써 원산상륙작전을 지원했다.

흥남, 해주, 군산, 인천, 남포 지역에서도 기뢰제거 작업을 펼쳐

유엔군이 점령한 항구가 제 기능을 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3) 첩보활동, 지도제작, 세균전.화학전

○ 일부 일본인들은 연합국최고사령부(GHQ) 내 첩보기관인 캐논기관에 소속되어 첩보원으로 한국에 투입, 전쟁에 필요한 첩보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군사기밀을 미군에게 제공하였다.

○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배시절 경험을 토대로 상세한 한반도 지리정보와 당시 제작된 지도를 미군에게 제공하였다.

당시 한국군은 군대에서 활용할 만한 정밀지도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 일본군은 미군의 세균전 및 화학전을 적극 도왔다. 만주와 압록강부근에서 세균전을 벌였다고 한다.

○ 혈액은행(血液銀行)'을 설립, 전쟁에 필요한 혈액의 공급을 하였다.

일본인들의 혈액이 전투 중 부상당한 미국, 한국군인들에게 수혈된 것이다.

○ 그외 일본인 미군 노무자들은 대전 전투에서 소총 들고 싸우다 다수 사망하였고,

일본인 기관사들 경부선 등에서 열차로 미군을 수송하였으며,

민단에 의용병으로 참전을 신청한 일본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동을 보여주는 지도(편집인 주).
▲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동을 보여주는 지도(편집인 주).

 

(4) 병참기지 역할

후쿠오카는 일본에서 생산된 미군용 군수품이 한국으로 보내지는 병참기지의 최전선이었다.

또한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이 야전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고,

장기간 전쟁이 지친 병사들도 일본에서 잠깐 휴가를 쓸 수 있게 해주는 휴식처의 역할도 했다.

그리고 후쿠오카 공항에는 미군의 F-80, F-84 등의 제트전투기가 뜨고 내렸다.

(5) 휴전회담 참여, 한국복구 참여는 거부당함

일본은 휴전회담, 전후 한국복구 참여를 희망했으나 휴전회담 참가는 미국의 반대로,

전후 부흥계획 참가는 이승만대통령의 반대로 각각 좌절됐다.

2. 일본의 경제부흥 계기

6.25 당시 일본은 군수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일본의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찰예비대와 해상경비대의 창설이 빠르게 진행되어 간다.

이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며 국제무대에 오른다.

대한민국 또한 베트남 전쟁때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비록 장병들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베트남전 특수로 국내 기업의 비약적 성장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손톱깎이 하나 만들 수 없었던 나라가 몇 년만에 일약 공업국가가 됐다.

그리고 한국군과 군장비의 현대화가 이루어지고, 국산화를 위한 국방과학연구소도 설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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