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식민사학계 잠재울 북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번역 출간하다.

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고조선연구>권위자, 윤내현 전 단국대 부총장을

북한 역사학 추종한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했던

국내강단식민사학계,

북한 학자 리지린 <고조선연구>국내 번역에

어떤 반응 보일지 주목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북한 학자 리지린 <고조선연구>를 번역출간했다. 윤내현 전 단국대 부총장과 같은 역사인식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사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요서지역으로 비정하다.

-리지린의 북경대 박사학위 논문
북한 리지린의 북경대 박사학위 논문인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를 번역 출간했다. 북한에서 1962년에 출간했으니 무려 57년만의 일이다. 그간 영인본 형태의 책은 있었지만 수많은 한문 원전을 인용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쉽게 번역해 출간한 것이다.

리지린 박사는 『고조선연구』에서 ‘반도 고조선설’을 폐기하고 서기전 5~4세기까지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난하까지였고, 연나라 진개(秦開)의 침공을 당한 후인 서기전 3~2세기까지는 요녕성 대릉하까지였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는 ‘한사군=요동설’을 펼쳤다.

-북한 학계의 통설
북한도 해방 직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들과 낙랑군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문헌학자들 사이에 숱한 논쟁이 있었다. 북한 학계는 여러 차례 ‘고조선에 대한 과학토론회’를 열어서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다.

그 와중인 1958년 리지린은 북경대 대학원에 유학 가 고사변학파의 중심인물이었던 고힐강(顧詰剛)을 지도교수로 고조선사를 연구했다. 고힐강은 중국 고대사의 사료를 의심한다던 고사변 학파의 중심인물이었지만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사료와 달리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중화주의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고힐강은 중국과 한국의 수많은 고대 사료와 고고학 발굴결과로 ‘대륙 고조선사’를 주장하는 리지린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고힐강은 리지린이 고조선 관련 자료의 95%를 읽었다고 시인했다.

실제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에는 중국의 고대 4사(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는 물론 『관자(管子)』·『산해경』·『전국책』 등의 선진(先秦)시대 문헌과 『진서』·『구당서』·『위서』·『수경주』 등의 사료와 당나라부터 명·청(明淸)시대 학자들의 연구결과까지 폭넓게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나갔다.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은 1961년 통과되었고, 리지린은 그해 가을 평양에서 열린 ‘고조선에 대한 과학토론회’에 참석해 자신의 연구결과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방대한 내용의 이책 『고조선연구』를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반도 고조선설’과 ‘낙랑군=평양설’은 북한 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대륙 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이 북한 학계의 공식적 견해로 자리 잡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56~7년 전의 일이다.

-진짜 박사와 셀프박사
어떻게 보면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는 남북한을 통튼 최초의 정식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고사변 학파의 중심인물인 고힐강과 다른 견해를 세워 통과된 논문이었다.

반면 남한 식민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학사 출신으로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52년에 『고려시대의 연구-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 시대 도참사상이 미신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인데, 누가 지도교수고, 누가 심사위원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자신이 제출하고 자신이 심사해서 스스로 박사학위를 수여했을 것이다. 학생이 문제를 내고 스스로 채점해 100점이라고 만점을 준 이른바 셀프박사다.

-아직도 총독부 학설이 정설인 남한학계
더 큰 문제는 남한 학계는 아직도 총독부에서 만든 ‘낙랑군=평양설’이 이른바 정설이란 점이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면 논문 자체가 통과되지 않고, 교수도 될 수 없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북한과 중국학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며 ‘대륙 고조선설’을 만들어낸 것이 1961년인데 남한학계는 그후에도 57년 동안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매일 아침 허리 깊숙이 숙여 절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를 실시하는 중이다. 그것도 대를 이어.

-남한 학계의 무서운 아이들
2016년 『역사비평』은 두 차례에 걸쳐 ‘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이란 특집을 마련했다. 생물학적 나이는 젊은 역사학자들의 논문(?)을 여러 편 실었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면서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의 역사관을 지배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남한사회의 숨겨진 코드가 드러났다. 『조선일보』에서 이들을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추앙하자 『한겨레』·『경향』·『한국일보』 등에서 마치 역사학계의 판도라도 바꿀 대학자들이 탄생한 양 대서특필했던 것이다.

『한국일보』는 2017년 6월 5일자에 ‘무서운 아이들’을 초청해 이들의 입을 통해 이들의 역사관을 소개하게 했다.

「(한국일보 기자 조태성)=(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안(정준)=“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한국일보』, 2017년 6월 5일)」

-제대로 된 학자들의 거짓말
안정준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것은 100년 전에 이미 끝났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고 우겼다. 이미 57년 전에 ‘낙랑군=요동설’을 밝혀낸 리지린이나 이런 내용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킨 고힐강은 ‘무서운 아이들’에게는 이른바 ‘제대로 된 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학자’ 안정준은 「역사비평」에서 북한의 연구결과를 180도 뒤집어 설명했다. 북한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한다고 말한 것이다.

“일제시기에 발굴한 낙랑 지역 고분의 수는 70여 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 고분의 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00여 기에 달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낙랑군 관련 유적의 대다수는 일제시기가 아닌 해방 이후에 발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안정준, 「역사비평」 2016년)”

안정준은 북한에서 3,000여기의 고분을 발굴한 결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확정지은 것처럼 말했다. 진정 ‘무서운 아이’인 것은 맞다. 그리고 『한겨레 21』 편집장 길윤형도 권두언 「만리재에서」라는 칼럼에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지금까지 북한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2600여 기의 낙랑고분이 확인됩니다.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합니다. 이것이 ‘일군의 학자’들 눈에는 견디기 힘든 ‘식민사학’의 잔재로 비친 것이지요(『한겨레 21』 권두언 ‘만리재에서’, 2017. 6. 26)”

안정준과 『한겨레 21』 편집장은 북한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한다고 썼다. 과연 그럴까? 북한에서 출간한 『평양 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를 보자.

-북한의 학설을 180도 뒤집어 호도
북한 학자 리순진은 『평양 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전에 일제 어용사가들은…우리 민족사의 첫머리인 단군조선의 력사를 말살하는 한편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을 ‘한 나라 낙랑군시대의 유적'으로 외곡 날조하면서 그것을 기초자료로 하여 한 나라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해 냈다…해방 후 우리 고고학자들은 평양일대에서 일제어용사가들이 파본 것에 30배에 달하는 근 3,000기에 달하는 낙랑무덤을 발굴 정리하였다.

우리 고고학자들이 발굴 정리한 락랑무덤 자료들은 그것이 한식 유적 유물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락랑국의 유적과 유물이라는 것을 실증해준다. 락랑국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였던 위만조선이 무너진 후에 평양 일대의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다.”(리순진, 『평양 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도서출판 중심, 2001)』)

북한 학계는 평양 일대의 고분들은 낙랑 ‘군(郡)’이 아니라 낙랑 ‘국(國)’의 유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가 있던 낙랑국(國) 유적이라는 것이다. 무덤 형태 자체가 중국의 한식(漢式) 무덤과는 완전히 다른 고조선 특유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3000여기의 무덤을 발굴한 결과 한식(漢式) 무덤은 단 한 기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 학계와 언론은 북한의 발굴결과를 180도 거꾸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학자’는 다 낙랑군=평양설에 동의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가짜역사학’이고 ‘가짜뉴스’다.

-윤내현 교수를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한 강단사학자들
남한의 윤내현 교수는 하버드대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하는 동안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연구』를 보았다. 윤내현 교수가 방대한 『고조선연구』를 쓰게 된 데에는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로부터 받은 자극이 한몫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윤내현 교수가 『고조선연구』를 쓰면서 북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를 봤다고 밝힐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단사학자들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윤내현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했고, 윤내현 교수는 안기부의 출장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의 안기부라고 어찌 ‘대륙고조선사’를 주장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연구』는 진·한(秦漢)시대에도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난하라는 것으로서 리지린 박사의 견해와도 달랐다.

그러나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상관하지 않고, 윤내현 교수를 안기부에 신고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1980년대의 안기부보다도 더 반북적이고, 더 반통일적이고, 더 반 민족적이었다는 실례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현재도 변화가 없다. 아니 더 악화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얼마 전 일단의 고등학생들이 찾아와서 역사에 대해서 물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이미 강단사학자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슴이 아팠다. 이 똑똑한 아이들이 가서 배울 대학이 한 군데도 없는 나라.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중이다. 57년 만에 번역 출간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가 이런 암울한 현실을 깨는 한 단초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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