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젊은 병사들 목숨가지고 미국과 박정희는 정권유지용으로 거래하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정희,

처음 미국요구도 없는데 ‘전투병 보내겠다’제안

비전투병도 미국 요구보다 ‘두 배 더 보내겠다’ 앞서감

성급한 불평등 한일수교도 미국의 입김이 작용해

비율로 따지면 전쟁 일으킨 미국보다 2~3배 많은 병력 투입

5만명이 넘는 한국군 파병되다

 

▲박정희가 미국 국무부 장관일행을 접견하고 있다. 오른쪽이 딘러스크(Dean Rusk)미국 국무장관. 그는 박정희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과 관련하여 파병을 적극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이후 일본의 한국땅 반환을 맡은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있었다. 이때  그는  독도를 일본에게 유리하게 만든 초안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4. 미국의 무리한 파병 요구와 남한의 지속적 파병

1964년 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년 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다.

1964년 12월 브라운 (Winthrop Brown)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뜻이라며 공병이나 건설부대 또는 수송이나 의료부대 등을 베트남에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박정희는 필요하다면 2개 전투사단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미국은 아직 전투부대를 원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1000명을 요청했어도 한국은 2000명 규모의 건설지원단을 편성해 1965년 2~3월 베트남에 보냈다. '비둘기부대'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파월 장병들의 수당을 한국 정부를 통해 지급해달라고 요구했고, 미국은 수당을 미국 정부가 지급한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용병(傭兵)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남한의 제2차 파병이 이루어지던 1965년 3월부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남한의 전투부대 파병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병을 원하지만, 남한 정부가 한일협정 비준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데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국회에서의 논란이 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만 조금 파병했을 뿐 다른 나라들은 파병 요청에 응하지 않은 터에 남한에게만 추가 파병을 요청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특히 남한만 전투 병력을 보내면, 남한은 미국의 '괴뢰나 하인 (puppet or vassal)'으로, 그리고 남한군은 미국의 '용병 (mercenaries)'으로 사용된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나중에 1만 8000명 규모의 사단 병력까지 요청할 계획을 세워놓고, 1965년 4월 남한에 우선 4000명의 연대 규모 전투부대를 2개월 안에 파병해달라는 뜻을 전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존슨이 한국의 파병을 직접 그리고 거듭 요청했다. 박정희는 굴욕적 한일협상에서 빚어진 어려운 국내정치 상황을 극복하는 데 미국의 신임을 이용하기 위해 1964년 9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해왔다. 미국은 한일협정 체결 이전엔 워싱턴 방문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부하다가, 한국이 서둘러 1965년 6월 도쿄에서 일본과의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자, 박정희의 방문을 수락한 터였다.

존슨은 1960년대 전반기 미국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 또는 '가장 급선무'였던 한일협정이 성사된 터라 박정희에게 부담 없이 파병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예 1개 사단 규모의 전투 병력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거듭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65년 8월 국회 동의를 얻어, 10월 1만 8000여 명의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제3차 파병이었다.

미국은 1965년 7월부터 북베트남에 대공세를 펼치면서 1965년 말까지 18만여 명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보냈다. 그래도 승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 다급해진 터에 1965년 12월 박정희가 먼저 이후락 비서실장이나 김정렬 주미한국대사 등을 통해 미국에 한국의 추가 파병이 필요한지 물었다. 병력을 더 보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에 브라운 대사가 박정희를 만나 1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더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존슨 대통령은 브라운 대사에게 한국의 추가 파병을 확보하는 게 '극도로 중요한 사항'이라며 "적절한 대가를 주고 추가 파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할 것"을 지시했다. 1966년 1~2월 한미 간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에 얼마나 무리하게 요청했으면 브라운 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항의하다시피 했겠는가.

"나는 지금 갑자기 한국 정부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요구한다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우리는 한국에 소수의 의료지원단을 요구해서 수백 명을 지원받았다. 훨씬 큰 비전투부대를 요청해서 2000명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전투사단을 요구해서 2만 명을 지원받았다. 당혹스러울 만큼 짧은 기간에 우리는 더 많은 전투 여단과 사단을 요청했는데, 약 3만 명을 지원받을 것 같다.

이제 한국인들이 이에 대한 결정을 굳힐 시간조차 갖기 전에, 우리는 그들에게 1만 명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언제 끝날 것인가? (중략) 이렇게 되면 거의 6만 명의 한국군들이 남베트남에 머무르게 되는데, 한국을 빼고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참전국인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중략) 나는 이에 반대해주길 강력하게 권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2월 1개 연대와 1개 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할 것을 공표하고 3월 국회 동의를 얻었다. 사단 병력인 '백마부대'는 1966년 8월까지, 5000명의 연대는 10월까지 보내기로 했다. 제4차 파병으로 약 4만 5000명의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진주하게 되었다.

1966년 10월 제4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1월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북베트남을 봉쇄하려면 60~70만 병력이 필요하다는 웨스트모어랜드 (William Westmoreland) 주 베트남 미군사령관의 말을 전하며, 한국의 추가 파병을 넌지시 요청했다. 박정희는 최근에 제대한 병력으로 1개 전투사단을 만드는 것은 즉시 쉽게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대사에 전문을 보내 늦어도 1967년 4월까지 한국군 1개 사단 추가 파병을 확보하는 게 '극도로 중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1967년 중반까지 미국 전체 인구의 0.25%가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한국이 그 정도로 기여하려면 약 7만 2500명을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를 덧붙였다. 이에 브라운은 대략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박정희는 존슨에게 1967년 5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반대세력을 의식해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가 지금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 분명히 선거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 제1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제2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제3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제4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이제 제5차 파병을 요청하려 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요청이 언제 어디서 끝날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왜 이런 압력을 받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사령관도 동의했는데, 선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 박정희도 아마 선거 후에 그런 요청을 받게 되길 기대할 것이다."

1966년 12월 한국은 미국에 제대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포함해 민간 의료지원단 및 건설지원단 등을 베트남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한미 간에 연례 장관급 회담을 시작하거나 특히 국무부 장관이 대통령선거 전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의 지도력을 공개적으로 치켜세워 주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나아가 한국에 대한 재정지원을 추가 파병과 연계하며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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