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이래 우리 민족의 만주 역사는 끊긴 적이 없다.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북만주 하얼빈 아성, 독립투사 부인들의 대일항전기지

대금국 옛 성터에 천제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북만주 삼강평원은 12세기 요와 금이 바뀌는 격동지

금 태조 아골타, 요나라 황제가 춤추라고 했으나 거절

의란현 박물관, 금 포로된 북송 흠종, 휘종 영정 전시

의란현 박물관 건너에 소남산 산 옥기는 신석기 것

▲ 사진1. 위  좌정한 사람이 천조제, 꿋꿋이 선 사람이 아골타다. 춤추기를 거부하는 금태조
▲ 사진1. 위  좌정한 사람이 천조제, 꿋꿋이 선 사람이 아골타다. 춤추기를 거부하는 금태조

 

삼강평원 답사 이틀 째 여행기입니다.

② 5월 20일(토요일)

하얼빈 → 아성(阿城) → 금(金)나라 上京박물관 → 의란(依蘭)박물관 → 왜긍합달(倭肯哈達)유적 → 쌍압산(双鴨山)시

* 대일항전기 우리 민족 고난의 현장, 아성

푹 잤다. 6시에 일어나 체조로 간단히 몸을 풀었다. 호텔 아침 식사가 좋았다. 흐리고 비가 예보된 날씨다. 하얼빈시에서 동남으로 1시간 거리인 아성시로 가서 금나라(1113∼1234) 상경 유지와 박물관을 관람하고, 의란현으로 이동해서 박물관과 왜긍합달 유적을 답사한 다음 쌍압산시로 이동해서 자는 일정이다. 버스로 이동하는 거리가 8시간이 넘는 고된 일정이다.

아성 가는 길은 슬픈 길이다. 대일항전기 경상도 출신 여러 독립투사 부인들은 이곳 아성에서가족을 건사하면서 남자들의 대일항전을 뒷바라지한 고난의 삶을 살았다. 대표적으로 석주 이상룡, 왕산 허위,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 가족이다.

2014년 이 길을 지나면서도 가슴 저미는 상념으로 차창에 스치는 풍광을 바라볼 생각도 못 한 기억이 새롭다. 자료를 찾아보니 아성에 조그마한 조선족문화관이 있고, 동포들이 모여 사는 마을 홍신촌이 있다.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음에 꼭 들려보기로 다짐하면서 상경 유지로 향했다. 주위는 온통 논이다. 모내기가 거의 끝나간다. 들판은 그야말로 도연명(陶淵明) 시 한 구절인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이다. 봄 들판에 물이 가득하다. 논은 네모지게 경지가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금고성(大金古城)이 평원에 나타났다. 최근에 복원 중인 금나라 때 성이라는 설명인데 조금은 이상하다. 이곳은 평원이라 돌이 아닌 흙으로 성을 쌓는 토성이 일반적인데 돌로 복원하고 있다.

문헌 기록도 모르고 이른 아침이라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 이 성의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도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완안부가 상경성을 쌓기 전에 마련한 근거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가 상당하다.

상경박물관에 도착했다. 씩씩한 두 기마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금태조 아골타와 아들 완안종한 기마상이다. 2014년 이곳에 왔을 때와 다름이 없다. 박물관 정면은 상경성 터다.

토성 성벽이 뚜렷하다. 성안에는 지금 마을이 있고, 하늘에 제사하는 천제단이 있다고 하나 찾을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성 규모가 크다.

고려는 1107년 윤관(1040∼1111)을 사령관으로 삼아 대군 17만 명을 동원해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 선춘령까지가 고려 땅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정복한 지역에 아홉개 성을 쌓아 지켰다.

그러나 여진족 간청으로 2년 후에 9성을 돌려주고 조공을 박는 식으로 여진족을 복속했다. 정벌한 여진족이 완안부였고, 당시 완안부 추장은 아골타 형 오아속(烏雅束)이었다. 아골타가 대금황제로 즉위한 해가 서기 1115년이니 윤관 정벌 후 겨우 8년이 지난 다음이다. 12세기 초 삼강평원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을 것이다.

2014년 이곳에 왔을 때 박물관을 관람하지 못했다. 휴관하는 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주로 금나라 흥망성쇠와 관련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금태조 아골타의 6대조 할아버지 김함보(金函普)가 말갈인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우리 역사서와 금사(金史)는 김함보를 고려(신라) 평주인으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말갈족에 김씨 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다.

금나라를 건국하기 전 완안부는 거란족 요(遙)나라(916∼1125) 통제하에 있었다. 요나라는 매년 겨울 지도부가 흑룡강성 북부로 이동해 주변 부족들을 위무하고 정사를 돌보며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날발(捺鉢)을 실시했다.

1114년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는 날발 잔치에서 부족장들에게 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여러 부족장이 명령에 응했으나 금태조 아골타는 마음에 들지 않아 춤을 추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버텼다.

이 사건으로 아골타는 주변 부족장의 신뢰를 얻어 군사동맹으로 발전시켜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기틀을 닦았다. 박물관은 이 사실을 부조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사진에서 좌정한 사람이 천조제, 꿋꿋이 선 사람이 아골타다.

금나라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와 같다. 그런데 이들이 상서롭게 여긴 동물이 해동청이라고 한다. 해동청은 매다. 이 지역은 평원이어서 해동청이 많이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우나 박물관에는 멋진 해동청 사진과 박제도 있다.

▲ 사냥용으로 쓴 해동청
▲ 사냥용으로 쓴 해동청

마지막 전시실에는 금태조 아골타의 커다란 청동 좌상이 놓여 있다. 박물관 뒤편에 아골타 능이 있으나 시간이 촉박해서 참배하지 않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 의란까지 4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다. 황사 탓으로 내리는 비도 흙비다. 다행히 길이 밀리지는 않는다. 대도시 근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란 가는 길에 번현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의란현은 하얼빈시에 속한 현이다. 하얼빈은 시(市)이지만 면적이 대한민국 반보다 크다. 대일항전기 의란은 애국지사 가족들이 많이 살았고, 지금도 영란조선족 향(鄕)이 있다. 의란 가는 길에 버스 속에서 한 숨 잤다.

도착해보니 의란은 한적한 시골 소도시다. 의란은 여진말로 ‘일란’인데 뜻이 3 또는 삼성(三姓)이라고 한다. 삼성은 세 부족을 의미한다. 의란은 고려말 건주여진 오도리부 근거지였다. 그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부족을 이끌고 두만강 부근으로 이주했고, 태조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생각해보니 묘한 생각이 든다.

청나라 황실 시조가 나무꾼과 선녀 설화로 태어난 푸꾸리웅순이다. 당시 서로 싸우던 세 부족을 통합하라고 하늘이 보낸 사람이다. 푸꾸리웅순은 오도리성으로 가서 세 부족을 통합하고 지도자가 되었다.

푸꾸리웅순은 동맹가첩목아의 선조이고 동맹가첩목아는 청(淸)나라를 건국한 누루하치의 조상일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광대한 영토는 청나라가 개척하여 물려준 것이다. 이 청나라 시원이 바로 이곳 의란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리적으로는 삼강평원 큰 강 중 하나인 목단강이 의란에서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의란현 박물관은 소박하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유물이 없다. 금나라 역사와 의란현 주요 역사 인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다음 사진에서 보는 중국 북송(北宋, 960∼1127) 황제 휘종과 흠종 부자 초상이 걸려 있다.

▲  금나라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 간 북 송의 흠종과 휘종
▲ 금나라에 패하여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 간 북 송의 흠종과 휘종

금나라가 중원을 정벌하는 과정에 1126년 11월 북송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 및 대부분 황족을 포로로 잡아 이곳 의란으로 끌고 왔고, 이들은 여기서 일생을 마감했다.

특히, 비빈과 딸들은 금나라 황족과 귀족 첩이 되거나 금나라 조정이 운영하던 위안소 세의원(洗衣院) 기생이나 관기가 되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하남성 개봉과 의란 간 거리는 지금 도로 기준으로 3,000km가 넘는다. 멀리도 잡혀온 것이다.

역사는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고 한다. 영가(永嘉)의 난, 307∼311), 토목보(土木堡)의 변(1449)과 함께 정강의 변은 중국 한족이 겪은 3대 수치다.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건국되었다.

필자는 휘종과 흠종이 잡혀 있던 곳이 오국성(五國城)으로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으로 알고 있었으나 집안을 답사했을 때 관련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박물관에서 밖으로 나오니 오국성촌도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금으로 도금한 금나라 때 만든 불상이 참으로 아름답다. 간직하고 싶을 정도다.

의란박물관 정면 가까이 강이 흐르고 다리가 걸려 있다. 이 강 건너 왜긍합달(倭肯哈達)유적으로 향했다. 강 너머는 야트막한 산이고, 기슭에 유적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갑자기 비가 창대같이 쏟아지고 우박과 흙비도 섞였다. 가까스로 유적 입구에 도착했으나 길을 막아 놓았다. 할 수 없이 답사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이 유적은 길이 12m 높이 2m 폭 1.5m 정도되는 동굴 유적인데 주거지로 사용하다가 무덤으로 바뀐 신석기 말기 유적이라고 한다. 무덤 4개가 발견되었는데 옥기 7점 등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옥으로 만든 칼은 양날 칼인데 아주 얇게 갈아 양쪽에 날을 세우고 가운데는 랜즈처럼 볼록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제작 기법이 편박인변(扁薄刃邊)인데 고급 기술이라고 한다. 소남산 유적에서 이 기법으로 제작한 옥기가 발견되었다.

이 기법은 홍산문화 옥기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계통상 중요한 유적이라고 한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실물 옥기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왜긍합달 유적이 발견된 동굴을 안쪽으로 500m 정도 더 파들어가서 술 보관 창고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 대금고성 앞에서 선 필자
▲ 대금고성 앞에서 선 필자

흙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2시간을 넘게 달려 쌍압산시에 도착했다. 호텔 근처는 완전히 신도시로 개발한 지역으로 보인다. 러시아 제품 전시관과 관련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것 같다. 러시아와 국경이 가까워서 일 것이다. 호텔에 들어서자 난감한 일이 생겼다.

고급 호텔인데 우리가 첫 외국인 손님(아마도 러시아인을 제외하고)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 직원이 당황한 것이다. 조금 있으니 공안(경찰)이 와서 공안 한 사람이 우리 일행 개인 모두와 개별적으로 시진찍은 후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 국제화가 덜 된 탓일 것이다. 가까운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음식이 입에 맞았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