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한 대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 공관(북동중아시아연대 중앙위 의장)

 

고려의 선각자 진화, 시를 지어 고려 부흥 주장

그 후 1백 년 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일어나

칭제건원과 북방 진출, 금 정벌 후 고토회복 외쳐

단재 신채호, 묘청 봉기 민족사 1천래 대 사건 평가

혼몽한 금나라 정복했다면 몽골제국 대체 했을 것

지금 세력 변동기, 윤 정권의 행태 국가 존망 위기

 

▲ 서기 12~13세기는 북방정복왕조와 송나라 그리고 고려가 정립한 동아시아 정세였다.  자료에서 고려의 강역이 압록강에서 원산만 일대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만주까지 고려 강역이라는 것이 밝혀졌다.(편집인 주)
▲ 서기 12~13세기는 북방정복왕조와 송나라 그리고 고려가 정립한 동아시아 정세였다. 자료에서 고려의 강역이 압록강에서 원산만 일대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만주까지 고려 강역이라는 것이 밝혀졌다.(편집인 주)

 

10~13세기 동유라시아의 세력변동과 한민족.

-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들어가다. (奉使入金) -

“송나라는 이미 시들었고, 西華已蕭索

금나라도 또한 혼몽하구나. 北寨尙昏夢

앉자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노니, 坐待文明旦

하늘 동쪽 해가 붉게 솟구치려 하네.” 天東日欲紅

고려 때 진화(陳澕)가 사신으로 금나라에 갔을 때 지은 시다. 순수시와는 다르다. ‘동쪽 해’는 고려를 이른다. 나는 한시/시를 잘 모르지만, 이 시를 좋아한다. 시인의 “힘세고 뛰어난”(*1) 기상과 “서설에 꽃이 피는”(*2)듯한 대망의 시상(詩象)이 좋다.

고토회복이라는 한민족의 웅혼한 선(仙郞)얼이 깊숙이 흐르고 있다. 이 4구 20자의 시어를 음미하면 당시의 동유라시아 세력전이기의 국세가 확연히 그려진다.

따라서 이 시는 진화가 국정에 관여하기 100여 년 전,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나라를 새롭게 칭제건원하고 금나라를 정토하는 북벌론을 앞세운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1127~1136)도 불러들인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실패를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사평(史評)했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낭불 양가(郎佛兩家)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었다. 묘청(妙淸, ?~1135)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역사는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굴복되고 말았다.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다면 조선사는 독립적⋅진취적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000년 동안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않겠는가?”(*3)라고 했다.

묘청 일파가 실패하고 동유라시아에서는 백 년도 안 돼서 금나라는 쇠락했다. 북방은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고려의 왕과 김부식 일파의 지도층은 단 백 년 정도도 앞을 내다보는 안목도 없었다. 그들 집단의 당파적 이익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애꿎은 백성들만 뒤집어 쒀 도탄에 허덕였다.

어떤 민족과 국가이든 생존 활로의 큰 그림을 성취하자면 불퇴전의 진취적 사기와 짧게는 몇십 년에서 길게는 백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신채호 선생이 사평했듯, 낭불 국풍파의 패배의 영향은 지금도 우리의 모든 분야에서 작용하고 있다.

■ 13세기 초 동유라시아의 세력변동과 한민족.

진화가 위의 시에서 ‘금나라가 혼몽하다’는 걸로 보면, 아마 1209~1213년 사이에 금의 수도 북경에 갔을 것이다. 이 시기는 몽골고원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서하를 항복받고 금나라를 몇 차례 침공할 때였다. (*4) 금나라 조정은 몽골을 막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100여 년간 유지되었던 남북의 남송과 금나라 세상에서 다시 세상은 뒤집히고 있었다. 따라서 진화는 금나라 수도 중심부에서 그 혼란함을 직접 보고 느꼈을 것이다. 다른 신흥세력을 기다리는 대변동기였다는 것을.

이렇게 정세 판단한 그는 고려가 웅기해 금나라를 대체할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무신들이 집권하고 있었음에도 그 호기를 잡질 못했다.

백여 년 전, 낭불 국풍파의 패배로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벗어날 토대를 부숴버렸다. 따라서 그 천운은 동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칭기즈칸의 몽골이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를 지배했다.

■북방기마족의 세력 교체와 고려.

10~13세기에는 한족 왕조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긴 했지만, 동유라시아 국세의 주도권은 북방 기마족인 정복왕조가 쥐었다. 거란족의 요나라에서 여진족으로 대체되었다.

그때 국세는 요나라 약 200여 년간에는 북쪽의 요와 남쪽의 송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서하가, 동쪽으로 고려가 있었다. 금나라 100여 년간도 마찬가지였다.

서쪽에 있는 서하는 기마민족 요, 금과 우호적이었고, 고려는 송나라를 더 가까이 했다. 송은 몽골에 망했다. 그 결과 고려는 북방 기마족을 승계한 몽골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몽골의 배려로 겨우 국가를 존속시켰다.

전통시대 우리 민족은 북동중앙아시아 세력권 즉, 중국과 만리장성 북쪽의 기마 세력 사이에서 길항했다. 이 권역을 벗어나 세계권역으로 편입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이다. 지금은 명실공히 세계적 차원의 국가 간의 힘의 자장에 들어가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시대가 아니라, 세력 변동기가 국운 상승의 기회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은 세력균형의 시대가 항상 국부를 약탈당했다. 현상유지편향(status quo bias)도 위험하다. 약소국은 세력전이(Power Transition)가 있을 때 그 국가의 자세(stance)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성쇠와 존망이 갈린다.

지금 윤석열의 행보가 매우 걱정된다.

참고

(*1: ‘雄俊淸麗’ 黃景源 評, 「梅湖集序」)

(*2: ‘開花瑞雪’ 金錫胄 評 「梅湖集序」)

(*3: 사료로 본 한국사: 신채호의 서경 천도 운동 인식.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東亞日報[동아일보] 1925>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

(*4: 『麗蒙外交史』 盧啓鉉, 甲寅出版社, 1993. 11~21쪽)

2023.04.20. 인릉산 아래 골방에서, 공관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