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국사 교과서는 조선 총독부가 만든 것으로 반도 신라만 가르치고 있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수서, 신당서, 만주원류고 모두 신라가 대륙에 있다고 증언

신라 가려면 사명 통과해야, 사명은 중국 절강성 영파로 나와

당군 장수 소정방이 신라군과 싸운 곳은 대륙 서라벌, 남천정

 

▲ 대륙 신라는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자료 출처: '국사 수업이 싫어요',  황순종 저, 만권당, 2022.
▲ 대륙 신라는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자료 출처: '국사 수업이 싫어요', 황순종 저, 만권당, 2022.

먼저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신라에 대해 살펴볼게요. 『양서』에서는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고 했어요. 신라는 한반도에서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고 배우고 있는데, 이 기록을 보면 백제의 동남쪽이라고 했으므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죠.

또 5천여 리(약 2천 킬로미터)라고 한 신라의 큰 영토를 고려할 때 이는 대륙의 신라임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수서』에서도 비슷하게 신라가 백제의 남쪽에 있다고 전하고 있죠.

또한 『신당서』에서는 신라가 가로 천 리(약 4백 킬로미터), 세로 3천 리(약 1,200㎞)의 큰 나라라고 했으니 이 또한 대륙임을 말해주죠(<지도 7> 참조).

대륙의 신라와 관련해 신채호 선생은 박지원의 『연암집』에서 중국 남쪽의 복건성 천주와 장주가 신라의 땅이었다고 한 것을 언급했으나 어떤 책을 근거로 했는지 알 수 없어 인용은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신라는 천주에 절도사를 두기도 했는데, 『만주원류고』를 보면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어요.

"신라는 천주의 해문과 마주하고 있는데 (………) 무역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미리 사명으로 가서 다시 출발한다. 혹은 말하기를 천주의 수위가 점차 낮아져 반드시 사명을 경유해야 한다."

즉 신라의 천주에 가려면 반드시 사명을 거쳐야 한다는 것인데, 이 사명은 오늘날의 절강성 영파이므로 복건성과 절강성이 신라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죠.

또 영파 남쪽에 임해라는 곳이 있는데, 소지마립간 때 임해와 장령에 진영을 설치해 왜적을 방비하게 했다고 해요. 이것은 임해가 신라의 도성인 서라벌에서 매우 가까운 요충지였다는 뜻이죠.

이 임해에 있던 임해전은 신라 후기에 다섯 번이나 기록되었는데, 이곳은 서라벌의 궁전과는 달리 정무가 아닌 연회 등의 장소로 활용되었어요. 지금까지 본 여러 지명은 모두 중국의 동남 해안에 있었으며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죠(<지도 7> 참조).

▲ 역사저술가, 황순종씨가 2022년에 대륙 신라를 증언하는 '국사 수업이 싫어요'를 내놨다.
▲ 역사저술가, 황순종씨가 2022년에 대륙 신라를 증언하는 '국사 수업이 싫어요'를 내놨다.

 

다음으로 대륙의 신라를 증명하는 기록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찾아보기로 할게요.

660년에 당 고종은 신라의 요청에 따라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고 13만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게 했어요. 신라 무열대왕은 당병과 합세하기 위해 김유신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남천정에 이르렀는데, 20여 일이 걸렸어요.

매국 사학에서는 이 남천정을 경기도 이천이라고 하는데, 경주에서 이천까지 말을 타고 20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죠. 그러므로 서라벌과 남천정은 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있던 지명으로 보는 것이 옳아요.

또 당군이 백제의 도읍이었다는 부여를 공격하러 왔다면 이천으로 올 것이 아니라 훨씬 남쪽으로 와야 정상이므로 반도 사관에 의하더라도 남천정은 이천이 되기 어려워요.

백제를 멸망시킨 후 661년에 당나라에서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에도 출병하도록 했는데,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신라에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 고종의 명령을 전했어요. 그리고 다음 해 1월 유 총관이 신라의 양하도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했어요.

이때의 함자는 옛 낙랑군의 현 이름으로 발해 서안에 있었으며, 양하는 황하의 남과 북 양쪽 지역을 뜻하는 곳으로, 이 두 곳으로 신라와 당의 군사가 행군해 지금의 요동에 있던 평양으로 간 것이었죠.

만약 평양이 북한에 있었고 신라가 경상도 지역에 있었다면 유덕민과 김유신은 각각 따로 평양으로 갔어야 하며, 하북성 지역에서 만나 평양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당 고종은 666년 12월에 이적을 총수로 삼아 다시 고구려를 정벌케 했으며, 신라도 함께 출정하게 되었어요.

문무대왕은 다음 해 8월에 김유신 등 30여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도성을 출발해 9월에 한성정에 이르러 이적을 기다렸어요. 이곳은 옛 백제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고 보이는데, 거기서 양군이 만나 요수인 조백하를 건너 고구려로 가야 했기 때문이죠.

매국 사학에서는 이 한성정을 경기도 광주라고 하지만, 대륙의 이적이 반도를 거치지 않고 지금의 요동으로 갔는데 어떻게 광주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문무대왕은 다음 해인 668년에도 6월 27일에 도성을 출발해 당의 군영으로 향하고, 7월 16일에는 한성주에 행차해 총관들이 당의 대군과 만나도록 지시했어요.

이런 상황은 그가 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당의 군영에 간 것이 아니라 대륙의 도성에서 육로로 간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해주죠.

또 한성정까지 20일 만에야 도착했는데, 만약 경주에서 광주까지 말을 타고 갔다면 이렇게 많은 시일이 걸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더구나 당군이 바다 건너 반도의 한성정으로 왔다가 북한의 평양으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작전이므로 대왕이 간 한성정은 대륙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제 고조선 이후의 열국이 모두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일어난 역사임을 확인한 오늘의 뜻깊은 시간을 마치기로 하죠.

출처:『국사 수업이 싫어요』, 황순종, 2022, 487~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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