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보은 장안 일대를 동학혁명 중심지로 정비하여 근대사의 산실로 알려야 한다.

 

조정미 사무국장

(사)동학혁명북접사업회

 

충북 보은 장안은 동학혁명의 처음과 끝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다 머물던 곳도 보은 관아

동학은 3.1운동, 어린이운동,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역사의 출발점, 보은 장안은 그 산실

▲충북 보은 장안리에는 동학혁명의 중심지인 대도소가 있었고 동학도이 200여채의 집과 400여채의 초막이 있었다. 사진은 돌로 정비된 장안리 도로.

동학순례길 2코스는 보은 동학민회지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까지 9km이다. 여유있는 걸음으로 걷는다면 3시간 소요된다.

옥녀봉 아래 장안1리 마을비에서 시작되는 길을 서원계곡 방향으로 걷다보면 ‘동학교단의 중심지 장안리’라는 안내판이 도로 옆에 한옥풍으로 서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옥녀봉 동쪽 산 아래에는 ‘보은장안 동학취회지’라 간판이 서 있다. 옥녀봉 방향으로 틀어 농로로 들어서면 동학민회(1893년 동학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민회라 칭하였다) 집회장소가 먼저 보인다.

3월 11일(음력) 봄에 모인 사람들은 바람을 피하는 집회의 장소로 18일, 사방 150m, 높이 1.5m의 돌담을 쌓았다.

이 흔적을 논둑에 재현해 놓았다. 작은 규모의 축사를 지나 옥녀봉 아래 수로와 만나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왼쪽 아래로 위치한 곳이 동학 중앙본부 역할을 했던 대도소 터이다.

수로길 중간쯤에는 우리단체와 속리초 학생들이 심은 국화 꽃길과 동학 그림안내판이 위치해 있다. 두부체험장을 지나 밭길로 구인리에 들어서면 구인교가 보인다.

구인교는 1894년 12월 북실전투에 투입된 관군과 일본군이 저녁을 먹고 대기하던 장소였다. 이제 오창2리 방향으로 간다.

가는 길에 오두막에서 쉬며 다시 걷는 기다란 농로는 장재리를 향하고 세조의 행궁터를 바라보며 목고개를 지나면 오창1리이다. 오봉산을 우측에 두고 가지런한 마을 오창길을 걷다보면 누청리이다.

막골을 지나 사괴정에서 느티나무, 은행나무의 정취를 느끼며 쉬어간다. 이제 누청 마을길로 들어서면 하늘색지붕의 옛 김소촌가가 있다.

이 곳은 북실전투 당시 해월 및 지도부들이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집이다. 이제 성족리로 향한다. 성족리마을회관을 지나, 능이칼국수집을 지나 동학공원이다. 통곡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위령탑이다.

‘사인여천,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라 새겨진 위령탑은 그들이 숨진 북실을 내려다보며, 2600여명의 염원을 현재도 하늘로 소리 높여 외치며 하얗게 서 있는 듯하다.

보은은 1863년 12월 수운이 체포되어 서울 압송 시에 보은관아를 경유할 때, 관아 이방이 아침저녁으로 공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 동학이 전파되었던 지역이라 추측된다.

1874년 해월은 인제에서 단양으로 넘어오며 충청도의 동학세력을 넓혔고 1885년 장안에 들어왔다. 손씨부인과 합가해서 살았으며, 1887년 육임소 설치로 중앙조직을 체계화하였다.

1893년에 대도소를 정식으로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보은민회를 주최하고, 포접제를 정비하여 대접주를 임명하였다.

1894년 3월 8칸, 6칸 규모로 대도소가 건축되었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커다란 물살 속에서 10월 이두황에 의해 장안의 200여채의 농가, 400여채의 초막과 대도소는 불태워져 초토화된다.

연속되는 패배 속에서 우금티에서 돌아온 장안은 쉴 곳이 못되었으며, 12월 북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17,18일 밤새도록 싸우다 2600여명이 전사한다.

2코스는 동학혁명 역사의 중심이었으며 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학이 3.1운동, 어린이운동,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역사의 출발점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사)동학혁명북접사업회(약칭 동학민회)에서는 동학순례길 안내센터(☎ 043-543-1893)를 운영하고 있으며, 다음카페 ‘동학민회’에 상세한 지도가 안내되어 있다.

▲ 충북 보은 북실의 동학혁명 공원에 있는 동학혁명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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