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만세봉기는 비폭력 평화의 제2 동학혁명이었다.

 

제1차 동학혁명 농민 봉기는 무장투쟁을 통한 자주독립전쟁

삼일혁명은 제2차 동학혁명으로 평화 비무장 투쟁으로 전개

삼일혁명은 동학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가 주도한 것으로,

1차 봉기와는 다른 전 인민이 참여한 투쟁으로 확대 전개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삼일혁명 정신이 새겨져 있어

 

▲ 서기1919.03.01. 서울 종로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시민들. 간판에 '경京'자는 보이지 않지만 '경성 종로'라고 추정되는 글자가 가판 오른쪽에 세로로 쓰여져 있다. 사진: 서울시

1차 동학혁명이 내세운 것은 두가지다.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이다. 먼저는 안으로는 제폭구민 除暴救民, 보국안민 輔國安民이다.

대외적으로는 왜군을 위시한 외세 침략을 물리치자는 척왜양 斥倭洋이다. 당시 군사침략은 물론 경제침략도 심해 외국자본이 우리나라 경제를 장악하여 국내 농업과 상업이 외국자본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경제 노예화가 진행됐다.

이는 외세종속을 말하는 것으로써 자주독립을 해치는 것이었다. 동학혁명군이 내세운 척왜양은 자주독립의 다른 말이다. 이 정신으로 싸운 동학혁명군은 해월 최시형이 임명한 의암 손병희의 지휘를 받았다. 그의 당시 직책은 이른바 동학의 ‘남접’, 북접을 통할하는 ‘통령’이었다.

동학의 자주독립 의지가 손병희가 주도한 삼일혁명 기미독립선언서 첫 문장에도 나온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이다. 자주독립으로 삼일기미독립선언서를 요약할 수 있다. 자주독립은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나머지는 왜 자주독립을 해야하는지 이유를 적은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조선이 왜 자주독립을 해야하는지 중요한 이유로 량심을 꺼내들고 있다. 양심상 도저히 조선의 식민지상황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에 조선의 식민지상태는 부자연하고 불합리한 것으로써 조선이 자주독립을 해야 지나(차이나, 중국)는 물론이고 세계에도 도움이 되고 특히 일본에게도 좋으니 강점을 풀고 돌아가라고 타이르고 있다.

자주독립요구는 구원 舊怨의 일시적 감정이나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님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차분한 민족 이성에서 나온 정당한 권리라고 한다. 불합리하고 부자연한 식민지 상태를 원래상태로 돌리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이어 세계는 신문명 시대로 접어들어 평등과 자유, 평화를 갈구하는데 일제는 위력으로써 조선을 강점하고 있으니 세계적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이한 점은 일제의 조선강탈과 식민지 폭압을 일제가 아닌 우리 탓으로 돌리고 있다. 외세보다는 우리가 못나서 이렇게 됐다는 반성이다. 원수 갚는 것에는 관심 없고 자주독립이 급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일제가 서기 1876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 이후 저지른 죄행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다. 이는 일제가 범한 죄악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

기미독립선언서는 한편의 철학사상을 보는 듯하다. 민족에 바탕을 두고 세계보편의 가치를 역설하며 이 가치를 파괴하는 일본의 행태를 지적하며 잘못된 것이니 그만하고 물러가라고 한다.

안 물러가면 자주독립을 위해 모든 조선인이 최후의 일각까지 정당한 권리를 외칠 것이라고 한다.

독립선언서 끝에는 삼일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이 기록돼 있다. 맨 처음에 의암 손병희가 새겨져 있다. 의암은 동학의 3대 교주다.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중 15명도 동학에 몸담은 인물들이다.

거의 절반 가까이가 당시 의암 손병희가 주도하는 동학 천도교인이다. 삼일혁명 추진과정도 의암 손병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독립선언서 인쇄를 천도교 자금으로 했고, 타 종교가 들어와 함께하도록 자금도 지원했다. 이는 천도교만의 혁명이 아닌 기독교와 불교를 설득하여 전국민의 혁명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삼일혁명은 의암 손병희의 머리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해진다.

또 삼일혁명과정에서 조선민중은 종파와 지역을 초월하여 손병희를 민족의 최고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천도교가 발행하는 조선독립신문에서는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거한다고 하고 있다.

또 묵암 비망록에는 대한민간정부를 구성하는데 대통령이 손병희로 돼 있다. 서북간도와 연해주에서는 독립투사들이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고 대통령에 손병희를 세우고 있다.

서울시내에 삼일혁명을 알리는 ‘조선민국 임시정부 조직 포고문’과 ‘도령부령 都領府令’ 등 전단지가 살포됐는데, 도령부령에는 정도령正都領이 손병희, 부도령이 이승만으로 돼 있다(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채륜, 2017.).

이는 삼일혁명이 성공한 경우와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추대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공한 뒤까지 예상하여 정부형태를 미리 짜놓은 것을 보면 삼일만세봉기가 단순하고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삼일운동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운동이 아니라, 혁명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수그러들었지만 해외에서는 계속됐고 후속타로 임시정부들이 속속 생겨났고 특히 상해임시정부는 삼일혁명이 만들어낸 대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삼일혁명이후 이를 잇는 임시정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제와 치열한 전쟁을 벌여 얻은 해방공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미제의 탄압과 방해로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정부를 세우는데 주도하지 못했다.

이처럼 의암 손병희가 주도한 삼일혁명은 서기1945년 해방공간 직전까지 영향을 끼쳤고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이 “삼일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엇다.”라고 새겨넣어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의암 손병희의 혼이 들어 있다. 결국 동학의 혼이 대한민국 바탕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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