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에 왜곡된 동학혁명의 진실을 회복해야 한다.

 

글: 손윤(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동학혁명사 바로잡기 2

동학혁명의 시작과 끝은 해월 최시형의 충북 보은의 북접 대도소

전봉준은 해월 최시형의 지휘 통제를 받고 농민군 혁명 봉기 당겨

서장옥이 선봉대장으로 봉기를 주도하고 전봉준은 동도대장 위치

전봉준 장군이 동학혁명사에서

영웅적인 행동을 한 역사적 사실과 실체적인 진실은 구분해야

 

▲ 처형을 앞두고 있는 동학 천도교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사진 왼쪽)과  처형을 목전에 두고 서울로 압송되는 녹도장군 전봉준(사진 오른쪽). 해월은 전봉준이 서기1894년 12월 체포된지 약 4년 만인 1898년 체포돼 처형된다. 해월과 전봉준 모두 조선인에게 밀고를 당하고 조선군이 체포하여 일본군에게 넘겨 죽인다.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동학의병을 학살하였다. 이때로 부터 약 3백년전 임진왜란때 해월, 전봉준과 같은 민간의 의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왜군을 몰아낸 것과 정반대 비극의 역사가 벌어졌다. 자기 것을 버리고 성리학 중화사대주의, 소중화를 국시로 창업한 리성계조선의 필연의 결과이며 민낯이다. 복초 최인은 '한일합방'이 있기 전에 리성계와 공자교 신자들이 개국한 리성계 조선 때 이미 '한중합방'이 있었다고 뼈져린 해석을 내놨다. 해방, 광복은 허울뿐이고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선각자들의 외침이다. 죽어나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를 떠 받치고 있는 민초들이다(편집자 주).

2. 북접대도소의 역사

동학은 접주제가 있는데 서기1863년 수운 최제우가 조직했다. 최시형은 서기 1880년대 초에 접주제를 포·접주제도로 확대했다.

서기 1884년 상반기 까지 충북 단양의 10년 시대를 마감하고 조정의 지목을 피해 손병희, 박인호 등 수제자들과 함께 충남 공주 가섭에서 기도 수행과 구상을 한 후, 보은 장내리에 대도소를 차렸다.

서기 1884년 10월 육임제를 실시하면서 동학교단의 조직을 체계화 하였으며 육임을 임명하고 도소 별로 활동하게 함으로써 북접의 실체가 외부에 드러난다.

이때부터 보은 장안의 북접대도소 시대가 열리고 계사년(1893) 3월 11일 소집한 동학민회가 원동력이 돼 갑오년(1894) 3월 8일 금산기포 및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동학혁명이 발발한다.

이해 12월 말 보은 북실 전투에서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게 2,700여 명의 동학혁명군이 하룻밤에 살육당하기까지 10년이상 이어진 보은 시대와 동학혁명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후 최시형 북접대도주와 손병희 북접통령은 살아남아서 충북 충주 등에서 마지막으로 항거했지만 일본군과 관군에게 대항하기엔 이미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3. 동도대장은 전봉준이 아닌 서장옥으로 봐야

전북 정읍(황토현)에 가면 무장·백기포 및 황토현 전승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전봉준을 동도대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무장기포일인 1894년 3월 20일(음력) 당시 동학군의 좌장은 북접대도주 최시형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동학군 선봉대장은 서장옥이었다. 동학혁명 최초의 금산기포를 주도한 조재벽이 서장옥 다음의 북접 동학군 친위부대장이었다.

전봉준이 서장옥의 제자 또는 부하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무장기포를 전후해서 전봉준은 동도대장에 불과했다.

선봉대장 서장옥이 1894년 5월(날짜미상) 관군에게 체포되어 9월에 석방될 때까지 전쟁 중 체포된 전봉준의 군권을 이어받은 선봉장이었다.

일본 영사가 진행한 전봉준 공초를 보면 전봉준은 호서든 호남이든 최시형으로부터 첩지를 받아 행동을 했다는 한 사실이 일관되게 나온다. 처음부터 없었던 남접을 주장하는 것은 북접의 정체성과 최시형의 지도력을 폄하하는 것이다.

서기1894년 동학혁명군을 일본군이 학살한 것은 일본이 조선 침략을 사전에 기획해서 일어난 것인데 아니라고 한다.

이는 일본군이 ‘전봉준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병한 것이고 조선 내부의 사정에 일본군이 지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낸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 스스로 북접과 남접을 비교하는 행위는 우리민족의 위대한 동학혁명사에 오점을 남기고자 하는 일제에 동조하는 범죄로써 매국 행위나 다름이 없다.

한편 서장옥은 서기 1894년 9월 경 대원군의 협조로 감옥에서 풀려나기도 하는데 전봉준은 일본영사가 심문한 서기 1895.03.10. 제 5차 공초에서 자신의 상관인 서장옥의 동학교단 내의 위치를 숨기기 위하여, 대원군과의 관계를 묻는 일본영사의 집요한 심문에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한다.

따라서 1차 사료에 의하지 않고 막연하게 동도대장이 전봉준이라는 무장포고문의 오류는 수정되어야 한다.

북접대도주 최시형의 탄생일인 음력 서기1894.03.21.에 맞춰서 최시형의 지휘하에 서장옥 포 접주를 위시한 손화중 대접주, 김개남 대접주, 전봉준 대접주가 선봉에서 봉기했다.

이는 무장포고문에 따른 것인데 동학교단의 북접대도소 총지휘부 차원의 제1차 동학전쟁의 공식적인 포고령의 산물로 보는 것이 객관적인 역사서술이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혁명사에서 영웅적인 행동을 한 역사적 사실과 실체적인 진실은 구분되어야 한다.

결국 동도대장이 역시 전봉준이든 서장옥이든 동학혁명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 최시형의 지휘 아래에서 임명된 것으로 해석해야 맞다(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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