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수호는 역사적으로 집권 세력보다는 민간의 백성이 더 앞장섰다.

 

서기1696년 안용복과 승려, 뇌헌 독도 우산도라 불러 조선 땅 명시

서기 17세기 후반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선포

호국사찰 여수 흥국사의 승려, 뇌헌이 안용복 사건에 중요한 역할

독도가 조선 땅임을 분명하게 일본에 전달한 사실은 일본 자료 외에

승정원일기에도 뇌헌의 5촌 조카에게 소송문서 작성케 하는 내용나와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의승수군 본부로 확인

충무공이 양성한 의승수군의 후예가 100년 후에 독도 수호한 것

 

 

▲ 중간긴착지인 오키섬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강원도에 속한다고 안용복 일행이 주장한 내용.

일반적으로 조선 숙종 당시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안용복 사건은 안용복의 주도하에 모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흥국사 승 뇌헌의 역할이 안용복 못지않게 컸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24일(토) 흥사단 강당에서 개최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제120주년 기념 독도세미나에서 전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정태상 박사는 ‘안용복 2차도일시 순천 승 뇌헌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서기 2005년 일본에서 공개된 『원록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 각서』(『원록각서』로 약칭)와 일본의 『인번지』, 우리의 『승정원일기』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정박사에 따르면,

서기 1696년 안용복의 2차 도일(渡日) 시에 일행 11명은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 오키섬(隱岐島)과 돗토리번(鳥取藩)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일행 11명 중 뇌헌(雷憲)을 포함한 ‘순천승’ 5명의 소속은 여수의 흥국사(興國寺)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나라 ‘국(國)’자를 ‘국( )’으로 썼기 때문에 많은 학자가 흥국사를 흥왕사로 잘못 번역하여 혼동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원록각서』(3면) 상의 흥국사와 금오산 표기

이는 서기 2005년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에서 발견・공개된 『원록각서(元綠覺書)』의 해독・번역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원록각서』 상의 ‘금오산(金烏山)’과 여수흥국사 부근에 있는 금오산과의 지명 대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수 흥국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의승수군 본부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약 300명의 승군이 흥국사에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 여수 흥국사의 승려들은 이러한 호국정신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흥국사 대웅전(1690년 중창) 불벽에 그려진 화상과 ‘시주뇌헌비구’ 명패

중간기착지인 오키섬에서 뇌헌은 안용복, 김사과와 함께 일행을 대표하여, 일본 관리의 문답에 응하면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강원도에 속하는 땅임’(江原道此道中竹嶋松嶋有之)을 주장하였다.

또한, 오키섬의 농가에서 일본 정부에 제출할 소송문서를 쓸 때도 뇌헌은 안용복과 뇌헌의 제자, 그리고 이인성의 3명과 함께 참여하여 같이 썼다.

일본의 『인번지』에 의하면, 안용복은 ‘조울양도의 세금을 관리하는 장수’(朝鬱兩島 監稅將)라는 뜻의 깃발을 달고 갔는데, ‘조울양도’는 울릉도(일본명 죽도)와 우산도(독도, 일본명 송도)라는 것을 밝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산도에 대하여는 ‘우사무스무(ウサムスム)’라고 일본어 발음까지 함께 적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도를 우산도라고 불렀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자산도(子山島)는 우산도(于山島)를 잘못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 안용복 일행이 일본 돗토리번에 달고 간, 조울양도감세장, 깃발 그림(일본의 『인번지』 참조)

돗토리번(鳥取藩)에서 뇌헌은 그 자신을 '금오승장'이라고 칭하면서, 승군의 장수임을 밝혔다. 더욱더 적극적으로 직함에서부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토수호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돗토리번(鳥取藩)에서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인번지』에도 뇌헌은 소송문서를 작성한 이인성보다 앞순위에, 안용복 다음 두 번째로 직함이 기록되어 있다.

▲ 일본의 인번지(1795년)에 기록된 조울양도에 대한 설명

뇌헌의 역할은 일본 측 기록뿐만 아니라 조선 측 기록에 의하여도 증명이 된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뇌헌은 일본에서 그의 5촌 조카인 이인성이 소송문서를 작성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뇌헌이 안용복과 함께 일행 11명의 대표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후에도 300명의 승군이 계속 유지되었던 여수 흥국사승 뇌헌의 역할을 통해, 그들의 도일은 안용복 중심의 사사로운 도일이 아니라, 도일 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근거는 아직 없지만, 당시 조선조정의 배후지원 또는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발표내용은 올해 3월 『세계역사와 문화연구』 제54집(2020.3. 한국세계문화사학회)에 게재되었다. 이번에 최근 역사적으로 우산도(독도)는 ‘환상의 섬’이라든가 ‘상상의 바위섬’에 불과하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국내 학계에 난무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한 번 더 수정 보완하여 발표한다고 정박사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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