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 연구는 안하고 중화노예사관을 전파하는 한중연은 해체돼야한다.

글: 김상수(작가, 연출가, 미술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방물을 고려가 송에 바친 조공물로,

일본이 고려에 바친 조공을 토산물로 날조해 번역

국사편찬위원회,

고려는 중국에 조공하지도 않았다는데 조공했다고 날조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 추종이 만들어낸 역사 참극

고려는 역동적인 해양제국이었고, 대 중국관계에서도 황제국

 

▲ 고려시대 활달한 문명의 교류는 오늘 ‘코리아’ ‘꼬레’로 세계가 명명하고 있듯이 고려시대 때 해외에 나라가 알려졌음을 뜻한다. 고려는 고려청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고려금속활자, 고려불화, 고려인삼 등 문물의 완성과 교류는 왕성했다.

사흘 전 아침이다.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강효백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치는’ 비분강개(悲憤慷慨) 하는 목소리였다.

“김 선생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 나라의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은 자기 멸시와 자기 비하에 이렇게 빠져있을 수 있습니까?

1945년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75년이나 흘렀는데도 아직도 잘못 전수된 일본 식민 역사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자들이 역사 교육을 좌우지 하니..,

국사편찬위원회라는데서 번역한 ‘984년 고려가 사신을 보내 중국에 조공하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고려사> 어디에도 ‘조공’이란 글자는 없습니다.

고려라는 나라가 힘없고 무기력한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 강력한 패권 국가였지요. 그런데 그런 고려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고려사> 기록에는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조공(朝貢)이라고 하면 종속국이 종주국에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던 일, 또는 그 예물을 말하는데, 고려사 기록에는 ‘조공’이란 표기는 아예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산물을 저쪽의 산물과 서로 주고 받은 것이지, ‘바친 것’이 아닙니다. 조공도 아니고 방물(方物)이라고 표기했지요.

그런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이라는 국책 기관은 방물을 ‘조선 시대에, 명나라에 보내던 우리나라의 산물’이라고 해석해 놨습니다.

엉터리이지요. 그러면서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방물은 '조공'으로, 일본이 고려에 바친 방물은 '토산물'로 번역해 놨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역사학자들이 일본 식민지 때 해석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본이 고려에 투항하고 귀순하거나 조공을 바친 <고려사>기록 중에 14번의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 황실이 일본에 뭔가를 주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작은 답례물을 하사했지요. 고려가 종주국이었고 일본이 종속국이었지요.

<고려사>에는 송, 왜, 금, 요, 인도, 사우디등 50여개국에서 '방물'을 고려에 바쳤다는 기록이 323회나 나옵니다. <고려사>를 일본의 식민지 역사관을 이어 받아 국보가 아닌, 지방문화재로 처박아 놓은 세계사 유일의 셀프역사왜곡범행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된 고려, 왕조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다면 오늘까지 1,100년이 된다. 고려시대 활달한 문명의 교류는 오늘 ‘코리아’ ‘꼬레’로 세계가 명명하고 있듯이 고려시대 때 해외에 나라가 알려졌음을 뜻한다.

고려는 고려청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고려금속활자, 고려불화, 고려인삼 등 문물의 완성과 교류는 왕성했다.

문물만 오고 간 것이 아니라 인적 교류도 활발했고 다른 민족을 받아들인 사례는 오늘날 한국의 외국인 이주자 이상의 비율을 차지한다.

기록을 보면 당시 인구의 약 9% 가량을 고려 건국 이후 200년간 외국 민족의 이주를 허락했다. 당시 고려 인구 약 210만이었는데 17만 명이 송(宋)나라 한족(漢族) 등 중국 대륙에서 왔다.

아시아 남방과 멀리 서역에서도 왔다. 이슬람 계통의 상인들도 왔다. 한국 사회 성씨가 275개쯤 되는데 절반 130개가 귀화 성씨이다.

신라 때 40개, 고려시대 60개, 조선시대 30개 정도다. 고려시대 보다 조선이 더 패쇄적이었다. 이렇듯 고려는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요즘말로 하면 가장 국제화 다문화 국가였다.

이런 막강한 문화국가였던 고려에 대하여 일본은 열등감을 지녔던 것이고, 일본이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기록한 <고려사>를 애써서 외면하고자 했고, 숨겨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시기가 끝난지 75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의 식민 역사관에 매몰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고려사>를 지방문화재로 처박아 두고 있는 현실이다.

 

강 교수는 <고려사>에서 일본이 고려에 ‘조공’을 바친 14번의 기록을 이렇게 정리했다.

 

1.世家 卷第三 999년 10월 (음) 일본인 도요미도 등 20호가 내투(귀순 투항)하여 이천군에 편입시키다.

日本國人道要彌刀等二十戶來投, 處之利川郡, 爲編戶.

2.世家 卷第四 1012년 8월 3일(음) 일본국 번주 35인이 귀순 투항하다

戊戌 日本國潘多等三十五人來投.

3.世家 卷第七 1056년 10월 1일(음) 일본국 사신이 금주(김해)까지 와서 조공을 바치다.

冬十月 己酉朔 日本國使正上位權隷滕原, 朝臣賴忠等三十人來, 館于金州.

4.世家 卷第九 1073년 7월 5일(음) 일본인들이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다

東南海都部署奏, “日本國人王則貞松永年等四十二人來, 請進螺鈿‧鞍橋‧刀‧鏡匣‧硯箱‧櫛書案‧畵屛‧香爐‧弓箭‧水銀‧螺甲等物. 壹歧島勾當官, 遣藤井安國等三十三人, 亦請獻方物東宮及諸令公府.”, 制, “許由海道,...

5.世家 卷第九 1074년 2월 2일(음) 일본국 선장 39명이 조공을 바치다

(甲寅)二十八年 二月 庚午 日本國船頭重利等三十九人來, 獻土物.

6.世家 卷第九 1076년 10월 15일(음) 일본국 승려 25인이 영광군에 와서 왕의 장수를 비는 불상을 바치겠다는 것을 윤허하다.

戊戌 有司奏, “日本國僧俗二十五人到靈光郡, 告曰, ‘爲祝國王壽, 雕成佛像’, 請赴京以獻.” 制許之.

7.世家 卷第九 1080년 9월 11일(윤) 일본 살마주에서 조공을 바치다

閏月 庚子 日本國薩摩州遣使, 獻方物

8.世家 卷第九 1082년 11월 9일(음) 대마도에서 조공을 바치다

丙戌 日本國對馬島遣使, 獻方物.

9.世家 卷第十 1084년 6월 20일(음) 일본 상인들이 수은 250여근을 바치다.

戊子 日本國筑前州商客信通等獻水銀二百五十斤.

10.世家 卷第十 1087년 7월 21일(음) 대마도인들이 조공을 바치다

庚午 東南道都部署奏, “日本國對馬島元平等四十人來獻眞珠·水銀·寶刀·牛馬.”

11.世家 卷第十 1089년 8월 19일(음) 일본 상인들이 예물을 바치다

日本國大宰府商客, 來獻水銀·眞珠·弓箭·刀劒.

12.世家 卷第二十三 1243년 9월 29일(음) 일본국이 조공을 바치면서 우리 표류민을 귀환시키다

壬申 金州防禦官報, “日本國獻方物, 又歸我漂風人.

13.列傳 卷第五十 1388년 7월 (음) 일본국 국사등이 조공을 바치고 포로25인을 돌려보내주며 대장경을 달라고 청했다.

日本國使妙葩, 關西省探題源了俊遣人來, 獻方物, 歸被虜二百五十人, 仍求藏經.

14.世家 卷第四十六 1391년 11월 6일(음) 일본 큐수 번주, 미나모토 료순(源了浚, 원료준)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日本國源了浚遣使來, 獻方物.

이미지 - 1450년경 발명된 구텐베르크식 금속활자 인쇄술보다 73년 앞선 1377년 인쇄된 『직지심경』의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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