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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간첩, 러시아 혁명 배후 조종하다

기사승인 2020.09.27  23: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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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전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글: 공관(북동중아시아연대 중앙위 의장)

 

일본 간첩 아카시 모토지로, 러일전쟁 승리 기여 및 러시아 혁명도 관여

호주 언론의 기자가 일본의 남진을 막고자 러일전쟁이 나도록 유도해

러일전쟁당시 일본은 러시아 10분의 1 국력, 정보전 우위가 승리로 이끔

일제는 아카시의 첩보활동비로 일본예산의 9%에 가까운 비용을 투입함

아카시는 1910~1914까지 조선총독부 헌병사령관과 경무총감을 지낸 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그는 조선총독부 헌병사령관이면서 경무총감을 지냈다. 동시에 러일전쟁을 이끄는 첩보전을 벌이기도 한 간첩이기도 했다. 사진: 일본위키피디아 

국가의 생존법. 정보공작의 힘 (4)

한 사람의 중요한 비밀공작이 세계사를 바꾼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한몫한 세계적 간첩 아카시 모토지로

 

『(러·일)전쟁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1). 그를 다룬 책 제목이다. 섬족 왜국의 정보장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1864∼1919)이다.

우리에게 일본의 러·일전쟁(1905년)의 승리는무엇일까?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일방적으로 일본에 끌려가기 시작하여 빛 좋은 개살구 격인 대한제국으로 잠깐, 청일전쟁을 거처 일본제국의 한반도 강점이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슬프게도 러·일전쟁은 섬족 일본이 동아시아를 대표하여 다극적 국제체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이 한국을 차지하기 위한 청·일간의 아시아적 규모의 대립이었다면, 러·일 전쟁은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러·일 전쟁은 강대국들이 직접적인 교전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들도 분명히 관련되어 있었다.”(*2)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를 앞세운 세계적 규모의 대립이 중첩되는 국세가 되었다.

“독일은 러·불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동아시아로 집중시킴으로써 자국의 동부 국경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것이 바로 독일의 계략이었다.

이어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영국의 권익을 침해하게 함으로써 영·러의 갈등을 부추키고 이 틈을 자국의 중동진출의 호기로 이용한다는, 말하자면 이중·삼중의 효과를 한꺼번에 거두려는 계략이었다.” (*3)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몬로주의를 벗어나 팽장정책을 추구하되 영국을 의식해 태평양 진출을 조심스럽게 행보할 때였다.

그들은 중국의 문호개방 정책을 내세우는 일본편에 기울어져 있었다. 프랑스는 러·불동맹에 따라 러시아 편에 섰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착공(1891)함으로써 침략의 방향을 동아시아로 확정짓자, 한반도에서는 영·러의 대결보다 러·일의 대결이 더 확실하게 부각되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피할 수 없게 된 러시아와의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서전(緖戰)이었다.”(*4)

여기에 호주 기자도 자기 조국을 위해 활약했다. 런던 타임스 북경 주재원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 (1862~1920)이다.

그는 일본이 태평양으로 남진 못하도록 펜으로 한몫했다. 1898년 1월 17일 청·러 비밀조약을 런던 타임스에 폭로하는 등 러·일전쟁을 유도하는 데 진력했다.

그는 일본의 남진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하기 때문에 북방 러시아와 전쟁을 유도했다. 그래서 러일전쟁은 모리슨의 전쟁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당시 호주는 대영제국의 자치령이었다. (*5)

섬족 일본은 이러한 세계적 국세를 볼 줄 알았고, 그 국세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이러한 격변기에 세계를 무대로 종행무진 활동한 섬족 왜국 정보장교가 있었다. 아카시 모토지로 대령이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러시아의 후방을 교란하는 정보공작을 펼쳐 일본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후에 러시아의 공산혁명의 성공과 그 주변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발호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한다.

러·일전쟁에서 3대 중요전을 이야기들 한다. 쓰시마 해전, 봉천회전, 그리고 아카시 공작전(明石工作戰)이다.

도이치 황제 빌헬름 2세는 “아카시 모토지로 대령 한 사람이 일본 만주군 20만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경탄했다.

일·러 전쟁 후 다시 독일무관으로 부임했을 때 2중 3중으로 감시를 시켰다. 그는 세계적 스파이 반열에 올랐다.

러·일전쟁 당시의 국세를 비교해 보면 일본은 러시아의 10분의 1의 국력밖에 안 되었다. 경제력을 재정규모로 보면 러시아 세입 20억엔, 일본은 2억5천만엔. 군사력만 해도 러시아는 상비병력 250만 명인데 비해 일본은 20만 명에 불과했다.

당시 러시아는 급속한 영토확장으로 그 세력이 중앙아시아부터 시베리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러 인도와 국경하여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에 도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여기에 일본의 정보 첩보전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일본 대본영에서는 아카시에게 국방 예산 7000만엔 중 금액상의 100만 엔을 지원하였다.

1905년의 국가예산 규모는 현재의 20만분의 1이며, 예산 금액상의 100만 엔은 1200억 엔(약 1조3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에 해당된다 (*6, 6-1, 6-2)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가? 섬족 일본이 정보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이다. 손자병법의 용간편을 체화했던 것인가? (*첩보비 100만 엔의 현재 환산은 논자들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100億엔?(1,100억원, 박노자는 3500만 달러(약 350억 원으로))

2500년 전 손자병법이 저술될 당시 10만의 군사가 출정하면 하루 전쟁비용은 천금이 들었다고 한다.

그 1/10인 백금과 벼슬을 건다면, 적정을 알아 전쟁마다 공을 이루는 것이 남들보다 뛰어나게 되는 것은 먼저 알기(先知) 때문이라고 했다. (*7:)

묘하다. 미국이 손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미국의 년간 정보비 예산은 국방비의 약 11%. 세계 최대 미국 첩보예산 연간 92조원 이상으로 팽창 중이라고 한다. (*8)

아카시는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렸다.

그는 조선총독부 헌병사령관과 경무총장을 겸직했다.(1910~1914) 면단위까지 헌병보조원을 두면서 무자비한 무단정치로 조선병탄을 완성한 자이다.

씁쓸하게도 “1900년대의 폴란드, 핀란드의 민족주의 입장의 그들에게는 조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아카시가 다름 아닌 ‘독립운동의 은인’이었다.”

그는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을 통하여 그루지야, 라트비아, 벨로루시의 민족주의자까지 알게 됐다. 코카서스 지역의 급진파 민족혁명가들에게까지 투자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적국인 러시아의 후방을 교란해서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즉 지구상에 공산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것을 도운 인물인 것이다. 물론 그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러시아 심장을 교란, 분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자는 그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 George Santayana

“러일전쟁으로 시작한 20세기가 끝나가고 새로운 21세기를 맞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20세기 초의 러일전쟁을 되돌아보는 연유는 어디에 있는가?

만약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면 역사의 연속성이 역사적 변화만큼이나 강력하다는 것이다.” (*9)

왜냐하면 일본의 본성이나 지리적 조건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10)

이제 우리도 비스마르크의 경구처럼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우자愚者를 벗어나 타인의 경험에서 배우는 현자賢者가 되어야” 한다. 그는 타인의 경험의 누적은 오직 전사戰史에서 배우는 사건이 전략론의 제1보라고 역설했다.

국가정보에 국방비의 10분의 1은 투입되야 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 국가가 제대로 선다.

 

참고

(*1:『動乱はわが掌中にあり ― 情報将校明石元二郎の日露戦争』 水木揚 著, 東京, 神潮社. 1991. 38쪽.)

(*2:『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러일전쟁의 외교와 군사전략- 』 강성학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24,24쪽)

(*3:『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최문형, 서울, 지식산업사, 2007. 183쪽 )

(*4:『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최문형 서울 지식산업사 2007. 24쪽)

(*5:『日露戦争を演出した男モリソン(G.E.Morrison)』上‧下, Woodhouse Eiko, 東京, 新潮社文庫版, 2003.)

(*6:『動乱はわが掌中にあり ― 情報将校明石元二郎の日露戦争』 水木揚 著, 東京, 神潮社. 1991. 38쪽.)

(*6-1:

https://www.ncbank.co.jp/.../furusato.../hakata/025/01.html

(*6-2:한겨레 21. 제640호 2006.12.21. 박노자 칼럼. 보편적 ‘민족주의’는 있는가

http://legacy.h21.hani.co.kr/.../021109000200612210640012...)

(*7:『孫子兵法』 「用間篇」 第十三. 興師十萬…日費千金…而愛爵祿百金…所以動而勝人,成功出于眾者,先知也)

(*8:한국일보. 2018.07.3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7160098349745 )

(*9: John Lukacs,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the End of the Modern Age (New York: Ticknor & Fields, 1993. 강성학 1999. 27쪽 주12 재인용)

(*10: 강성학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러일전쟁의 외교와 군사전략-』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27쪽)

2020.08.28. 서울의 남쪽 인릉산 아래 누실에서, 아우를 보낸 날. 공관.

공관 객원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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