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나 지금이나 왜구의 잔악함은 변한 적이 없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청일전쟁 직전 일제는 풍신수길 묘와 유적지 정비 해

이등박문과 풍신수길 뜻하는 풍국신사가 주도하여 단장

풍국회까지 만들어 추진 임진왜란 왜장 후손이 핵심인물

임진왜란 조선인 코 무덤을 찬양하는 내용 새긴 비문세워

 

 

▲ 교토 토요쿠니(豊國) 신사 앞의 이총(耳塚). 메이지유신이 성공하자마자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신으로 모신 토요쿠니 신사가 전국에 세워졌다. 쿄토의 토요쿠니 신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를 잘라서 묻은 코무덤(鼻塚, 나중에 귀무덤(耳塚)으로 바꾸어 부름)의 바로 앞에 세워졌다. 코의 수는 10만 개로 추정한다.

<오사카의 여인> 여덟번째 이야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300년제(1898년)와 이총(耳塚)에 숨겨진 비밀

앞에서 말한 토요쿠니(豊國) 신사 외에 명치(明治) 신정부가 출범한 이후 오사카와 교토에서 거행되었던 일련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현양(顯揚)사업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1894년)이 일어나기 직전, 교토 토요쿠니(豊國) 신사의 주지는 황폐해진 히데요시의 묘소와 관련 유적지를 정비하여 풍신수길(豊臣秀吉)을 기념하고 숭경(崇敬)의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사업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1890년에는 풍국회(豊國會)가 결성되었다.

풍국회취의서(豊國會趣意書)에는 풍국회 회장인 쿠로다 나가시게(黑田長成) 후작이 1896년에 행한 다음의 연설이 실려있다.

후작은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후손이다.

"하늘에 있는 풍태합(豊太閤: 풍신수길)의 영(靈)을 위로하고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태합의 위대한 업적을 흠모하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 <중략>

풍태합과 같은 영걸의 업적을 숭고웅대(崇高雄大)하게 만들어 국민으로 하여금 그의 공적과 위풍을 흠모하려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 나가하마(長浜) 시의 풍공축제(豊公祝祭). 일본 나가하마 시 홈페이지에는 2012년 풍공축제 참가자가 '풍태합(豊太閤: 풍신수길)'이라는 깃발 옆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있다(인터넷 사진으로 모자익 처림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망령이 현재에도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풍신수길(豊臣秀吉) 300년제

18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300년제가 거국적으로 거행되면서부터 히데요시의 위상이 현재와 같이 국민적 영웅으로 고착되었다.

이때는 명치(明治) 천황 집권 31년으로 유적복구와 기념행사는 아래와 같다.

이총(耳塚)에 숨겨진 비밀

이 시대에 정비된 것 중 중요한 것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히데요시의 유골을 비밀리에 묻었던 쿄토 방광사(方廣寺) 앞의 이총(耳塚)이다.

이총은 조선 군민의 코를 베어 묻은 무덤(鼻塚)으로 에도시대 중기에 스스로 야만적이라고 여겨 귀무덤(耳塚)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1830년 대지진으로 황폐화된 후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 발발 4년 후인 1898년 풍국회(豊國會)의 자금지원으로 복원되었고 이총수영공양비(耳塚修營供養碑)가 세워졌다.

비문(碑文)의 원본을 현대일본어로 보면 다음과 같다.

"춘추(春秋)시대 필(邲)의 전쟁에서 초(楚) 나라 사람들이 적의 시체를 쌓고 무덤을 만들어 승리를 과시하는 경관(京觀)을 만들자고 청하였지만 초왕(楚王)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훌륭한 행위이지만 풍태합(豊太閤, 풍신수길)의 자비로운 마음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한전쟁(征韓戰爭: 1597년의 정유재란)에서 아군이 잇달아 승리하여 적을 참하고 코를 잘라 바치니 그 수가 몇 만이었다. 공(히데요시)이 그들의 승리를 기뻐하여 상을 내렸지만, 적국의 병사(실제로는 민간인이 많음)들을 불쌍히 여겨, 그 코를 쿄토의 대불(大佛) 앞에 묻고 분묘를 만들어 비총(鼻塚)이라 하고 크게 공양하였다. 당시는 1597년 9월이었다. 은혜와 원수를 구분하지 않고 피아(彼我)를 논하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평등하게 공양하는 저 아름다운 공(히데요시)의 은덕이 해외에까지 미침이 넓도다. 공의 이런 마음은 금일의 적십자사의 뜻을 300년 전에 발현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좋은 것이다"

비문(碑文)은 아래에 계속된다.

"세월이 흘러 풍신가(豊臣家)는 망했지만 비총(鼻塚) 만이 홀로 엄존(儼存)하여 우뚝 솓아 평안한 위용으로 사방을 바라보고 있다. 당시의 위대한 업적과 풍공(豊公, 히데요시) 자비스런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략>

이총(耳塚)은 일본의 위세 확장의 상징이며 풍공(豊公)의 성덕(盛德)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조선과 아국과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으며, 근래에는 타국에 앞서 위기에 빠진 조선의 독립을 도와 대전(청일전쟁, 1894년)을 치루면서 이웃나라의 교의(交誼)를 완수했으니, 옛날에 풍공(豊公)이 행하였던 일의 감회가 새롭다." <하략>

-명치31년(1898년), 육군대장 창인친왕(彰仁親王) 전액(篆額)-

비문(碑文)은 코를 베어 무덤을 만든 행위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덕이라고 찬송하고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조선인의 코를 베어 무덤으로 만들어 후세에 남긴 일은 역사에 남는 잔악의 극치이다.

그런데 300년 뒤에 명치(明治)정부는 이러한 잔악행위를 찬양하고 임진왜란을 현창하고 있으니 비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총(耳塚)에 대한 어느 일본인의 생각

아래는 이총에 대하여 쓴 에조에(江添亮)이라는 일본인의 블로그 글로 일본인이 이총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한 단상을 볼 수 있으며,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실로 평화적이다. 만약 그들이 이총(耳塚)의 왼쪽에 있는 비석에 적혀있는 한문을 알았다면, 열화처럼 분노하고 머리털이 위로 치솟고, 눈초리가 찢어지며 비석을 둘러싸고 맨손으로 파괴를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어문학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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