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지 못하고 고인 리조선 체제는 무수한 인재를 매장했다.

글: 류돈하(역사저술가)

 

 

 

양천 허씨 4남매 이야기

난설헌, 교산 남매의 우애는 각별했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 태어나 천부적인 재능으로 문장과 시에 빼어나기도 하였거니와 시대를 초월한 사상은 오늘 날에도 능히 통용되는 바이다. 남매의 부친 초당 허엽은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낸 문관이다.

일찍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서 학문이 높았으며, 훗날 김효원과 함께 동인을 이끌었던 영수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초당의 또 다른 스승 퇴계 이황은 초당을 선인(善人)이라 일컬었다.

허엽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 청주한씨에게서는 허성, 박순원의 처, 우성전의 처를 재취부인 강릉김씨에게서 허봉.허초희.허균을 얻었다.

훗날 매천 황현이 허봉.허초희.허균 남매를 세그루 보배나무로 비유하였고 허초희는 천선지재(天仙之才)라 평하였다.

초당의 장남 악록 허성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인물이다. 또 선조의 고명칠신으로 조선 제 16대 임금 인조의 동복삼촌 의창군을 사위로 두었다.

작은 형 하곡 허봉 역시 시문에 능하였으며 사헌부지평 등의 청요직을 거쳤다. 그는 바른 말 잘 하는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율곡 이이를 공박하다가 함경 갑산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38세로 요절한 허봉은 허초희,허균 남매에게 있어 세상의 부당한 모순에 눈을 뜨게 해준 스승이자 서출 손곡 이달의 절친한 벗으로 동생들에게 그를 시 스승으로 정해주었다. 또 사명대사와도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난설헌 허초희는 선안동김씨 김성립(우의정 김질의 7대손)과 혼인하였다. 신혼초의 둘 사이는 괜찮았다.

그러나 김성립은 과거공부의 이유로 집을 비웠고 점점 시문을 비롯해 여러모로 재능이 뛰어난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감을 가진 정황이 기록에도 드러난다.

난설헌은 규방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를 짓고 읊었다. 또 시어머니 은진송씨(송기수의 딸.송기수는 우암 송시열의 증조부 송귀수와 6촌.)와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다.

난설헌은 남매를 낳았으나 잇따라 조졸하여 그 슬픔이 매우 깊었다. 난설헌은 세가지 한이 있다고 했다.

1. 이 넓은 세상에서 왜 조선에 태어났는가?

2.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3.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의 주자성리학의 굴레가 꿈틀거리던 시기에 난설헌은 스스로 신선의 세계를 꿈꾸었다.

향기로운 나무는 물이 올라피고

궁궁이 싹도 가지런히 돋아났네.

봄날이라 꽃피고 아름다운데

나만 홀로 슬프고 처량해지네.

벽에는 오악도를 걸고

침상위에는 참동계를 펼쳤다네.

단사약을 달구어 만들어낸다면

돌아오는 길 창오에서 순임금 뵈오리.

 

▲허균과 허난설헌은 남매지간이다. 조선 중기에 태어나 천재소리를 들으며 불꽃같이 살다간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난설헌의 시 중에는 하늘나라 생활을 꿈꾸는 이야기들로 모여진 87수의 유선사(遊仙詞)라는 작품도 있다.

난설헌은 자신이 죽기 1년전 이상한 꿈을 꾸고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란 시를 지었다.

그 시에는 '연꽃 스물일곱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서리 위에 차갑기만 하다' 라는 구절이 있다.

난설헌은 그 귀절대로 27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교산은 누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추모하였다.

훼벽사(毁璧詞)

구슬 깨져라 진주 떨어졌으니 / 毁璧兮隕珠

당신 생애 행복하지 않았어라 / 子之生兮不淑

하늘이 부여한 자질 어찌 그다지 풍부하였으며 / 天之賦兮奚富以豐

어찌 그다지 혹독하게 벌 내려 주고 뺏기를 빨리 하였느뇨 / 胡罰以酷予奪之速

거문고 비파 버려져 타지 아니하고 / 捐琴瑟兮不御

아침 밥상 놓였으나 임 맛보지 못하누나 / 有晨羞兮君不得嘗

고요한 침실 처절하게 조용하니 / 闃帷寢兮凄靚

파릇파릇 난초 싹 서리에 꺾였구려 / 蘭茁芽兮摧霜

돌아가 소요하시련가 / 歸來兮逍遙

애통해라 뜬 세상 한순간 / 哀一瞬兮浮世

갑자기 왔다가 홀연히 떠나 / 儵而來兮忽而往

세월 오래 머물지 않았어라 / 曾不淹兮星歲

광릉 무덤 길 구름 뭉게뭉게 / 雲溶溶兮廣陵之阡

유궁에 햇빛도 흐리어라 / 白日翳兮幽宮

층림(層林) 울창하여 아스라이 어두운데 / 鬱層林兮渺冥

혼 어디메로 날아가나 / 魂飄颺兮何所

머나먼 곳 요압 찾아가소 / 窮瑤鴨兮迢遙

백옥루 어디멘가 / 玉樓兮何許

돌아가 소요하며 / 歸來兮逍遙

줄지은 신선 따라 즐겁게 지내소서 / 從列仙兮容與

하계는 급류이고 온갓 잡귀 질주하는 곳 / 下界汨漂兮萬鬼駓駓

가볍게 구름 속에 멀리 올라가 / 焱遠擧兮雲中

무지개로 깃발 하고 난새로 멍에하여 / 虹爲旌兮鸞爲鴐

상천 바라보고 냉랭한 장풍 타고 가서 / 覲上天兮御冷冷之長風

요지에서 서왕모께 술 따를 때 / 酌王母兮瑤池

삼광 나열하여 밑에 있으리다 / 三光羅列兮在下

티끌 세상 굽어보고 지닌 걱정 누르시면 / 俯視塵寰兮抑我憂

어둡던 그 마음 아 조화되리다 / 冥此心兮於造化

오직 살아있는 나만이 슬픔 안고서 / 唯生者兮懷悲

높은 하늘 바라보며 창자 뒤틀린다오 / 睇九霄兮回腸

돌아가 소요하소서 / 歸來兮逍遙

상제 뜰 안은 노닐만 하오이다 / 帝之庭兮可以相羊

훗날 그의 남동생 교산은 당시 계속 주둔해있던 명나라 군영의 문인 오명제에게 난설헌집 초고를 전해 주었다.

이 후에도 1606년 명 사신 주지번에게도 누이의 시를 보여줌으로서 명나라에도 널리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주지번은 난설헌을 인간세계로 귀양온 선녀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2년후, 1608년 4월 난설헌의 시 210수가 담긴 난설헌집을 간행하였다. 

교산은 허엽의 막내아들로 형, 누나들에 못지 않게 재능이 출중하였다. 서애 류성룡과 서자출신 손곡 이달에게서 학문과 시문을 배우면서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인식하게 된다.

서얼은 물론 천민들과도 교류하며 소통하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교산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은 민본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정리한 문집 성소부부고에는 여러 정책들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남겼다.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서얼, 천민들은 여러 부조리, 불평등에 찌들어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교산은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이들과 함께 소통하며 민주적인 가치관을 형성하였다.

주자성리학이 교조화되어 통치이념으로 굳혀지던 시절 교산의 열린 사상은 사대부들에게

용납되지 못했고 급기야 이단아, 괴물,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정당한 절차도 받지 못한 채 서둘러 이이첨 세력에 의해 처형된 교산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내내 그 이름마저 금기시 되었다.

그러나 난설헌과 교산 남매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긴 족적과 그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 교산은 살아생전 자신의 문집을 스스로 편찬하여 죽임을 당하기 전 외손자 이필진(광주이씨. 동고 이준경의 증손자)에게 전했다.

문집에는 호민론.유재론.병론 등을 통해 여러 국가.사회정책을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 중 대표적인 호민론과 유재론은 다음과 같다.

(성소부부고 호민론)

허균은 백성을 세가지로 나누었다.

1.항민恒民: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무식한 백성.

2.원민怨民:지배층에 대해 원망은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백성.

3.호민豪民: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앞장서서 항거하며 주인의식을 가진 백성.

호민이 주도하여 항민과 원민이 단결하면 무도한 자들을 물리치고 개혁을 이룰 수 있다.

(성소부부고 유재론)

하늘에서 인재를 낼 적에 귀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하여 많은 것을 주고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하여 적게 주지는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내었는데도 사람이 스스로 버리면 이것은 역천(逆天)이다.

허균은 양천허씨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기득권을 누렸음에도 서얼의 차별.천민들.여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소외계층들과 어울려 다른 사대부들의 조롱과 빈축을 받기도 하였다.

오늘 날의 민주사상을 16세기에 이미 논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한학자 이가원 선생은 허균을 조선의 이탁오라 평하였다. 이탁오는 이탁오대로 허균은 허균대로 시대를 앞선 사상실천가이자 개혁가였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