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대의 연장인 일본 극우파를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조선은 조정이라는 공론장을 통해서 국가정책 수립

일본 무사정권은 한사람이 독단으로 결정해 밀어부쳐

풍신수길파와 에도막부파의 원한 250년 지속은 비정상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이여,

나니와(오사카)의 일은 꿈 속의 꿈이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상의 살육 속에서 생겨난 허무주의가 사무라이 바탕

 

 

 

▲ 일본군의 만세돌격(Banzai charge). 1942년 10월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에서의 만세돌격 후 일본군 시체들이 해변에 흩어져 있는 광경. 일본군의 유명한 만세돌격은 옥쇄(玉碎)와 같은 의미이며, 태평양전쟁 중 여러 곳에서 있었다. 만세돌격이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전 부대원이 소총 등 개인무기, 심지어 칼을 들고 적의 기관총이나 탱크를 향하여 무조건 돌진하여 옥쇄하는 사무라이 특유의 방식이다.

<오사카의 여인> 다섯번째 이야기

역사는 반복되는가?

조슈(현 야마구치 현) '모리(毛利)' 가(家)의 새해는 번주(藩主)와 소수의 측근 가신(家臣)들 간에 다음과 같은 신년인사가 의례적이고도 250년간 은밀하게 계속되어 에도막부(江戶幕府)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을 키워왔다.

"주군, 올해는 거병하여 막부(幕府)를 타도하여 세키가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며, 힘을 키워 다음을 기약하자."

그런데 이러한 대화가 250년간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조선의 경우 국가의 어떤 정책도 왕이나 어느 대신 한사람이 독단으로 결정하는 일이 없고 조정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결정을 내리게 되며, 그렇게 내려진 결정에 대해 어느 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게 되며, 그 결정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내린 것으로 된다.

따라서 일본에서 250년간 계속된 두 가문의 원한관계는 일본이라는 전근대적인 사회의 산물이며,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의 중국 춘추시대에 나온 고사(故事)인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오월동주(吳越同舟) 등과 같은 태고적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아래의 도막(倒幕, 막부타도) 운동을 살펴보면 메이지유신의 본질이 더욱 명확하게 설명될 것이다. 그것이 명분없는 반란이라는 것이다.(90쪽)

위대한 메이지유신은 위와 같은 음모와 획책을 바탕으로 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선동과 생도들의 착실한 훈육, 조선을 정복하고자 하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 700년 동안 존재감이 없던 천황을 앞장세워 에도막부에 대해 무력으로 도발하려는 4개 웅번(雄藩: 조슈, 사쓰마, 도사, 히젠)의 음모와 야욕 그리고 획책이 있었다.(91쪽)

흔히 메이지유신은 대단한 사상과 이념에서 진행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아래의 글은 막부(幕府)를 타도한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라는 인물들의 실상과 '도막운동(倒幕運動, 막부타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92쪽)

우리들 한국인의 관점으로는 복수라는 말은 언어도단일 뿐이다. 우리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관점으로는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사는 일은 자랑도 정의도 아니고, 복수의 행위도 인정되지 않을뿐 아니라 미덕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본에서는 '도막운동(倒幕運動)'이라는 대의명분으로 다루어져 왔는데, 도막운동이나 메이지유신에 대한 일본인들의 편협한 시각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일은 앞에서 말한 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이야기와 같으며, 일본이 에도(江戶)시대에 근대적인 국가의 기틀은 다졌지만, 한편으로는2500년 전의 구습과 낡은 사상이 혼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94쪽)

사무라이의 로망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의 영주인 시마즈(島津) 가문에 내려오는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 사무라이들의 수명은 20세 전후였다는 것이다. 또 죽음도 일상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목숨이 항상 죽음 앞에 놓여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사무라이들의 로망은 무엇이었을까?

유난히 죽음을 찬미하고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무상함을 적은 짧은 단가(短歌)나 사세구(辭世句 )등을 남기는 전통이 사무라이들의 로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한편 생각해보면 또 다른 형태로 사무라이의 로망이 발현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들의 '허무주의'와 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허무주의에서 출발한 일본 문화는 '무의미의 철학'으로 귀착되는데 이것이 일본 문화와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코드가 아닐까?

사무라이들은 결국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사무라이들의 문화는 일시적, 찰나적 또는 순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무라이들의 이러한 철학이 결국은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는 허무주의에 흐르고 있으며, 그러한 것이 죽음에 임하여 남긴 사세구(辭世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이여, 나니와(현 오사카)의 일은 꿈 속의 꿈이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도쿠가와 이에야스)

"치쿠마(筑摩) 강가의 횃불이 질 때, 나의 이 몸도 함께 꺼지리." (이시다 미츠나리)

이에 반하여 우리의 경우 죽음에 임하여 남긴 시(詩)들은 인생에 대하여 또는 사회에 대하여 이루지 못한 꿈을 한탄하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즉 사회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아직도 남아 있음이 일본 사세구(辭世句)와 다른 점일 것이다. 우리나라 선비들을 죽음 뒤에는 적어도 자신의 혼백이라도 남기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사무라이들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미군으로부터 궁지에 몰릴 때는 마지막 결전을 다지는 밤을 맞아서는 부상당한 동료마저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는 다음날 아침에는 '만세돌격(Banzai charge)'으로 모두 자폭하는 것으로 전투를 마감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만세돌격은 승패의 전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는 생명에의 애착도 미련없이 버리고 있다. 사무라이들의 허무주의는 옥쇄(玉碎), 할복, 자결 등의 화려한 용어로 포장되지만 긍극으로는 자신의 목숨도 내다버리고 있으며, 무의미한 살생을 벌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동양에는 이러한 자폭 정신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동양 삼국 중 일본만이 갖는 정신일 뿐이며 한국과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의 그러한 옥쇄정신이 이해가 잘 안된다.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어문학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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