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주둔이 계속되는 한 남한은 언제나 미국의 전쟁 총알받이 신세다.

 

 

글: 정대화 (전 하버드大 국제문제연구소 연구교수)

 

6.25 한국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에서의 전쟁’이 올바른 정의

미국의 김일성 남침 유인으로 발발한 미국이익 전쟁

전쟁을 유인하여 미국이 이익을 챙긴 사례는 다반사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작은 음모, 미국의 큰 음모”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한국전쟁은 미국의 기획과 유도와 김일성의 남침으로 일어났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전쟁“(Korean War) 혹은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

이 전쟁은 미국놈들의 짓(남침유인->내려오게 해 놓고 대대적으로 반격한 전쟁)이다!

먼저 세계평화 학의 창시자 Johan Galtung박사님은 “한국전쟁(Korean War)”이 아니고 “한국에서의 전쟁”이라고 정의하신다.

한국전쟁이라면 “內因론”에 의한 한국/조선 사람들의 짓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아니라 한국/조선인 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참여하여 싸운 “한국에서의 전쟁”이라는 것으로 外因론으로 보는 입장이다.

소련, 일본과, 중국, UN16개국을 포함하면 인류역사상 초유의 약 20개국이 참여한 전쟁이며, 이 전쟁에서 한민족은 527만이라는 인적희생(사망, 부상, 실종)으로 세계 전사 상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미군사망은 겨우 36,000정도이다-54,000명에서 정정).

6.25전쟁 역시 맞지 않는 말이다. 김종필의 말대로 6.23일에 일어났다는 말도 있고, 실은 1949년에 일어났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의상 이 글에서도, (이제 뜻을 안 이상), 한국전쟁, 6.25전쟁이라고 쓰겠다. 다른 말로하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 전쟁은 큰 틀에서, 즉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미국 의 짓“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미-스페인 전쟁(1898)이 그랬고(Maine호를 미국이 폭파를 하고 스페인에 둘러 씌웠다), 베트남전쟁(통킹 만에서 역시 미 해군의 매독스 함이 북 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둘러 씨웠다).

이 역시 미국의 짓 이였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도 미국이 사전에 알았으나, 몰랐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이제는 알려지고 있다(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인들을 격앙시켜 2차 대전에 참여하기 위해서 루즈벨트가 거짓말을 하였단다).

이라크의 침략은 자신들이 한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다. 미국역사 246년 중에 20 여년 여를 빼고는 전쟁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남침전쟁(특히 극우 관변학자들), 북침전쟁(좌파견해) 외에, 함정 설(남침 유인 설)등이 있다.

따라서 이 글의 I장에서는 필자의 견해로서 미국의 남침 유인 설(혹은 함정 설)을 논하고, II장에서는 Bruce Cumings 교수의 ”이승만의 도발 설“ 및 미국의 남침 유인 설에 대하여 논해 보기로 한다.

한국전쟁의 배경으로서는 세계 2차 대전 후의 미국의 공산주의와의 대결과 공산주의 봉쇄정책에 있다고 하겠다. 구체적으로는 세계 2차 대전에 있어서의 소련의 큰 희생(약 2,000만 희생?)으로 나찌 독일과 일본 이태리 파시스트들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영국수상 처칠의 “배신적철의장막” 발언과 선언으로 미-소간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미국은 소련공산주의 팽창을 우려하여 1947년에 ”공산주의 봉쇄정책(Policy of Containment)“을 실시하여 세계적인 긴장을 조성하였다.

필자가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이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개입과 역할(남침유인 혹은 함정 설)을 의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은 배달겨레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천인공로한 살륙 범죄였다. "이 사진은 맥스 데스포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유엔군 북진 때 사리원 못 미친 곳에서 영국군 아가일 대대원[스코틀랜드 대대]의 오인 사격으로 죽은 엄마와 졸지에 엄마를 잃은 비극을 당한 아기들이다." 출처: https://mnd9090.tistory.com/3907 [동고동락]

미소냉전체제하 국민당군 지워하던 미국, 조선 땅서 미군철수

1. 1949년 6월 30일 미국은 왜 남한에서의 미군철수를 해야 했냐나?: 왜 중국이 공산화 된 1949년 같은 해에 미군을 철수를 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미국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원했기 때문에 장개석 군이 모택동에게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30일에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철수를 완료하였다.

즉, 6.25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30일에 미국은 미군 철수를 완료한다. 나는 이것이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에 어떤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을 한다.

중국대륙에서 장개석이 모택동에 지고 있었고 1949년에 중국대륙이 공산화 되었는데, 같은 해인 1949년에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필자의 견해로는 전쟁의 유인 설(혹은 함정 설)의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동북아의 전황과, 세계정세를 보면 1949년에 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문제는 미군이 있을 때 까지는 이승만의 ‘북진통일’ 야욕이 방지되었는데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의 일제 관동군 출신 군 장성들이 준동을 시작하여 38선을 전후하여(특히 옹진) 수많은 북한에 대한 도발과 공격을 시도하였다.

전 미 국무부 정보 조사국장 John Merrill박사에 의하면 한반도 전쟁은 1949년에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그의 책과 Delaware대학의 박사논문에서 말하고 있다(John Merrill. ”KOREA; THE PENINSULAR ORIGINS OF THE KOREAN WAR“(Newark: University of Delaware Press, 1989).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

2. 1950년 1월 12일, 미국은 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하는 Acheson Line을 발표해야 했나.

이것이 한국에서의 전쟁 유인/유도정책이 아닌가?: 이 임시에 미국 국무장관 Dean Acheson은 1950년 1월 12일에 소위 ”Acheson Line“ 이라는 미 극동방위선을 발표하였다.

이 선에 의하면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산열도에서 시작하여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 베트남“은 제외 하었다. 이 지역은 침략해도 좋다는 신호가 아닌가?

이 공개적인 미국의 외교, 국방정책 선언 역시 북한과 공산권에 어떤 신호를 주었음이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일부 미국의 학자들은 이 선이 북한의 침략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을 하나 필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의도적인 선의 목적이 조선 땅서 전쟁을 유도하거나 유인하는 함정설과 충분히 관련이 있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러한 선을 6.25전쟁 직전인 1950년 1월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선포를 하였느냐는 말이다.

 

모택동 대만침공설 나오자 마자 미 7함대 대만해협 즉각 출동

3. 모택동의 1950년 7월 15일 대만 침공 설과 6월 25일 조선땅 전쟁의 상관관계는 어떤가.

또 하나 중요한 정보는, 1950년 7월 15일에 모택동의 대만 침공설이 있었다는 것인데 미국이 이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이 정보가 1950년 6월 중순에 국무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Cumings 책 II권, 566, 600-1, 604쪽).

그렇다면 미국이 1950년 6월에 전쟁을 시작하여 사전에 손을 써서 모택동의 대만 공략을 막았다고 볼수 가 있다. 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났는데, 미국은 미 7함대를 전쟁발발 2틀 후인 1950년 6월 27일에 대만해협에 전광석화와 같이 출동시켜 대만해협을 방어하였다.

 

전쟁 임박해서 극동방어선에서 한국 제외한 말 뒤집은 미국

4. 왜 1950년 6월 19일 John F. Dulles는 Acheson장관의 대리로 38선을 시찰했나. 대한민국 국회에서 “만약 한국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한국을 방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5개월 전 “1950. 1. 12일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 라고 한 Acheson의 말을 뒤 집은 것이다.

또 왜 같은 시간에 미 국방장관 Louis Johnson과 미 합참의장 Omar Bradley가 동경에 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은 명목상 일본과의 강화조약 협의차 와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방문이 6일 후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여러문제 즉각 해결효과

5. 또한 미국 대통령 Truman은 한국전쟁 개입정책으로 당시 미국의 골치 아팠든 일들, 즉 대만봉쇄문제, 일본방어문제, 인도차이나(베트남) 원조문제, 필리핀 원조문제 등을 해결했다. 특히 미국의 대규모 군비증강문제, 나토 동맹국의 군비 및 군사력 증강문제, 서독의 조기 재무장문제 등등 일련의 미국 국방, 외교상의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광석화 같이 행동

7. 미국이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보는 하나의 정황증거들이 드러난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자, 같은 날 미국은 이미 알았다는 듯이 이 문제를 UN에 상정을 하고 2틀 후 인 27일에 UN은 ‘집단안보’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전에 개입을 하였다.

2틀 후인 27일에 대만해협에 미 7함대를 파견하여 중국으로부터 만약의 대만 침공을 방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작전으로 사전에 준비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가 없는 외교행동과 군사행동 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때 분단국의 아들인 북한의 김일성이 통일전쟁을 준비하였다면 전연 놀랄 일은 아니다. 김일성은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미국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은 김구 등을 초청하여 통일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를 하였고 미국의 정책인 신탁통치안은 남한의 근시안과 반대로 실패했다. 한국문제를 미국은 UN에 넘겼다.

 

퇴출위기 장개석과 정치위기몰린 이승만과 정치야욕의 맥아더의 합작품설

이제 마지막으로 필자의 견해가 아닌, 한국전쟁연구의 세계적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대학의 Bruce Cumings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이승만의 도발설과 미국의 “남침 유인 설”을 지적하며 이 글을 맺을 가 한다.

그는 약 2,000쪽 이상의 많은 책들을 발간을 하였는데 지면상 더 이상 소개불가하다. 특히 그의 2권의 책: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II(Princeton, N.J.: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가 특히 유명하다. 필자는 그의 가설들과 방대한 연구의 일부분을 인용함으로서 이 글을 마무리 하겠다.

그의 책 II권에서 그는 중요한 3가지 Mosaic(모자익)을 제시한다(이 모자익에대한 이후의 수정이 있었을 수 있음).

그의 모자익 #1은 “북한이 전면 남침한 것도 아니며(II권, 584-5, 594쪽)”, 모자익 #3은 “남한이 전면 북침 한 것도 역시 아니라(588쪽)”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선호하는 모자익 #2인데, 이것은 “이승만이 전쟁을 도발한 가설(615-9쪽)” 을 제시하고 있다(위 글에서 필자가 제시한 6번). 이제 이승만의 도발 가능성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Cumings 교수는 전쟁은 옹진에서 시작하여(이것은 모두가 동의한다고 한다. 571, 582), 동부로 번져갔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Cumings교수는 남한이나 이승만이 전쟁을 도발한 가능성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든다.

이승만이 5.10선거 이후 국내정치상 대단한 어려움에 처해 몰락직전에 있었으며(599-601) 장개석 역시 1950년 6월 23일 미국의 Dean Rusk와 대만의 호적이 만났는데 그 주나 그 주말에 반 장개석 반란이 계획 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6월 25일 한국전쟁이 장개석을 구했다는 것이다(600쪽). 즉, 궁지에 몰린 이승만과 장개석이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맥아더와 함께 전쟁을 도발하였을 수 도 있었다는 가설을 I.F. Stone과 Cumings교수는 제시한다(600쪽).

Cumings 교수는 악명 높은 일본군 출신 장군들, 김종원, 김석원, 이청천, 김백일, 정일권, 백인엽 등은 관동군 출신으로 도발전문가들이라고 증명한다.

특히 옹진에서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김석원 등에 의한 많은 전투가 있었으며, 남쪽이 더 많은 도발을 하였고(598쪽), 중요한 것은 옹진은 반도로서 북한이 침략하기에는 오히려 불리한 곳이나 도발자들(남한, 미국?)이 “치고 빠지기에는 안성맞춤인 곳” 이라고 말하고 있다(572).

북한은 1950년 6월 초 옹진부근에서 하계훈련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 훈련은 6월말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596, 615).

그런데 그러던 그들이 6월 25일에 갑자기 별 장비도 없이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는가? 그들의 갑작스러운 방향전환과 시기(6.25)가 바로 핵심적인 질문이다.

시기로 말 할 것 같으면 남한의 논에 물이 대어진 6월보다는 땅이 얼어붙은 겨울이 북한 탱크의 침공에는 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Cumings 교수는 그 이유는 어떤 오열(미국 혹은 한국의 특수부대-필자)에 의해서 아무도 모르게 북한군이 “반격”하도록 하는 남쪽으로부터의 “도발“”이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 방향전환이 갑작스러웠든 것이, 건국대 신복룡 교수에 의하면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은 모포는 고사하고 숟가락도 제대로 없는 보급 상태였다고 한다.

Cumings 교수는 이승만-장개석-맥아더의 음모 설, 7월 15일 대만침공 설에 자극받은 미국의 개입흔적과 개입설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의 안보에 “한국이 오른쪽 날개요 대만이 왼쪽 날개”라면 1950년 6-7월 미국은 이 것 모드를 잃을 수 있는 위기에 처했으며 일본의 위협은 곧 미국안보의 위협이라 고 간주하고 있지 않았든가?

Cumings 교수에 의하면, 미 국무장관 Acheson은 이 때 대만과 남한 모두를 방어하려 했다는 것이다(602쪽). 하기와라 료 는 한국전쟁을 “김일성의 작은 음모, 미국의 큰 음모”라고 묘사하고 있다(그의 저서: <한국전쟁: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서울: 한국논단, 1995)>).

Cumings 교수는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이 최소한으로 시사하는 것은 6.25일 아침에 일어난 증거로는 미국의 개입과 UN의 개입을 정당 화 하기에는 약한 근거가 아닌가 생각 한다.(580족)“ 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전면전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전쟁(그의 모자익 #1)을 누가 이용했다는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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