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일으킨 세력이 명치유신으로 조선침략을 했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임진왜란을 주도한 세력은 죠수번으로 현재 야마구치현

덕천 막부에 패하고 절치부심 명치유신으로 부활 조선재침략

이들의 후예가 현재 일본 자민당 세력, 아베신조가 선봉장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조슈(현 야마구치 현)의 초대 번주(藩主, 다이묘).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은 병력을 이끌고 조선침략의 선봉에 섰다.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히데요시 편의 총대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오사카의 여인 > 네번째 이야기

메이지유신의 2개 번(藩): 조슈 번ㆍ사쓰마 번

일본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철저하게 짓밟고 약탈했다. 그러한 임진왜란의 주도세력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250년 만에 막부(幕府)를 뒤엎고 메이지유신을 일으켰으며, 바로 조슈 번주(藩主,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바로 그들이다.

임진왜란의 왜장(倭將)이라고 하면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등은 잘 알지만 사실 이 '하기(萩)'를 건설한 '모리 데루토모(毛利輝元)'가 가장 많은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또 임진왜란 때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의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조선에서의 활약과 메이지유신에서의 비중도 조슈의 '모리 데루모토'와 놀랄만큼 닮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모리 데루모토'와 '시마즈 요시히로' 두 장수의 행적은 상위 왜장(倭將) 5명에 포함될 정도로 중요 인물이다.

모리 데루토모(毛利輝元)

조슈(현 야마구치 현)의 번주(藩主,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일로 히데요시 수하의 번주 중 최대의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공적에 의하여 '모리 데루모토'는 오대로(五大老)에 임명되었다. 오대로란 히데요시 말기에 번주(藩主) 중 가장 공이 크고 신뢰할 만한 다섯 명을 선발하여 임명한 것인데, 임종 때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남은 아들의 보좌를 부탁하고 죽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일본 전역의 번주(藩主)가 두 편으로 갈라져 싸웠는데,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전투라고 하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이다. 이때 '모리 테루토모'는 히데요시의 아들 편인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東軍)과 대적하였으나 패하였다.

▲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의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 번주(藩主,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역시 히데요시의 전국통일에 협력적이었으며, 임진왜란에서는 만 명의 군역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명(明)나라 병사들이 귀신장군이라고 불렀는데 '요시히로'에 대한 아래 평가는 그가 얼마나 조선에 큰 피해를 주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진주지역으로 들어오는 바다 사천만(泗川灣). 이곳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왜성(倭城)이 있던 곳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수륙요새 선진리성(船津里城)은 일본군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노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하기 전까지 사천만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바다였다. 결국은 이 지역을 통해서 일본군이 안전하게 철수 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우리의 포로라든가 정유재란 때 지리산을 중심으로 약탈했던 많은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서 일본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서군에 가담하였다가 사쓰마(현 가고시마 현)로 도주한 '시마즈 요시히로'를 토벌하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규슈 번주(藩主)들의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시마즈 요시히로'를 토벌하지 못한 이에야스는 이 일이 마음에 걸렸고, 죽음에 이르러 유체(遺體, 시체)를 사쓰마를 향하도록 하여 장사지내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에야스의 우려는 250년 후 도막운동(倒幕運動, 막부타도)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 사쓰마 번(藩)의 외성(外城). 사쓰마 번의 외성은 사무라이 사회의 전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 가고시마 시의 본성(鶴丸, 츠루마루) 주위에 설치된 해자 등의 방어시설과는 별도로 100여 개의 외성(外城)을 설치함으로서 사무라이의 생존 본능을 과시하고 있다.

사쓰마 번(藩)의 생존본능 - 외성제(外城制)

앞에서 조슈의 하기 성(城)을 중심으로 사무라이의 생존본능을 이야기했다. 이곳 사쓰마의 번성(藩城, 수도)인 가고시마에서도 '하기' 못지않은 독자적인 생존본능의 철학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외성(外城) 제도이다.

사쓰마 번(藩) 하나에 100개가 넘는 외성(外城)이 배치된 것은 분명히 앞에서 본 소라게(집게)의 생존방식과 같이 지나친 면이 있다. 백성들과 차별화된 특권 지배층과 영주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발상으로 사무라이의 과잉된 생존 철학일 것이다.

▲ 임진왜란의 왜군진격로.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문록의 역(文祿の 役)'이라고 한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왜군 중 가장 많은 3만 명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며, 부산.청주.죽산.한양.안변.춘천.원주로 진격하였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진격로는 한양.안변.강릉.삼척 등으로 이어졌다.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어문학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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