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해석도 일 극우파 따라가는 식민사학계를 일소해야 국사가 산다.

 

 

일본제국 황군이 태왕 비문 탁본한 것 믿는 것이 비정상

임나일본부설 근거로 드는 비문 신묘년조 倭자만 불확실

신묘년조 왜를 주어로 보는 것은 전체 비문 맥락과 배치

태왕을 주어로 봐야 전체 비문 내용과 맞아 들어가 어울림

 

▲ 조선개국 4353.04.26. 서울시 종로구 3호선 전철 안국역 맞은편 '광화문아침'에서 열린 통일학당 강연에서 이찬구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 본부 사무총장이 광개토태왕 비문 신묘년조를 새롭게 풀었다.

조선총독부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우리나라 역사를 식민지 반도역사로 만들어 놨다. 이제 맞서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무원 김교원 등 독립투사들은 바른 역사를 세워 응전했다.

서기1945.08.15.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정상이라면 일제와 역사전쟁을 벌여 바른 역사를 지킨 이 독립투사들의 역사관으로 국사를 재건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광복군세력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주축이 되지 못한 것처럼 우리역사관을 가진 세력이 우리국사를 세우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부역자들이 서울대학을 장악하고 일제식민주의, 황국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만들었다. 우리역사가 일본제국의 지방사라는 관점을 유지했다.

우리나라 군대는 만주 등지에서 독립군을 학살하던 일본군 출신들이 창설했다. 물론 미군이 개입했지만 주도세력은 일본군 출신이었다. 채병덕, 백선엽, 송요찬, 장도영, 이응준, 신태영, 정일권, 박정희 등이다.

6.25 전쟁도 이들이 주도하여 인민군과 싸웠다. 6.25 동족상잔은 일각에서는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2차 전쟁이라고 비꼬고 있다. 인민군은 친일파가 제거된 빨치산 독립군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제황군 출신들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노예군대 근성으로 우리 군대문화를 만들어 놨다. 고문관이라는 용어, 얼차려, 구타문화, 따돌림, 군 정보를 빼내 적국에 팔아먹는 짓이나, 군대비리 등 온갖 폐습이 일제식민지 군대문화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주인이 없는 노예군대의 비극이다. 우리 군대 문화가 지금도 주인정신은 없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징병제에서 찾아야 할까. 그 보다 다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노예군대문화는 광복군, 독립군이 대한민국 군대를 창설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휘관과 하급자간의 수직적 일방통행, 무조건 명령복종 체제는 광복군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광복군은 형식으로는 상관과 부하가 존재하나 기본정신은 조국광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군대를 만든 동지관계다. 그러니 가장 추악한 군대문화인 하극상이라는 폐습도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역사학계도 광복군 세력이 차지하지 했다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병도, 신석호 같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부역자들이 우리 국사학을 장악했다.

이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후학들을 길러내 전국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국립중앙박물관, 지방마다 있는 국립박물관, 공립박물관, 각종 역사관련 연구소, 고고학 단체, 기타 기관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다.

대를 이어 조선총독부산 일제황국사관을 주입하고 있다. 일제 청산이 많이 됐다고 하지만 적어도 역사에서 만큼은 일제 조선총독부치하 그대로다.

이들이 퍼뜨려서 여전히 살아있는 총독부 식민사관의 대표사례가 소위 임나일본부설이다. 과거 고대에 야마토 왜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만들어 통치했다는 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것이 임나의 위치가 어디냐 이다. 임나가 일본열도로 나타나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역사학을 장악하고 대를 이어 퍼뜨리고 있는 강단식민사학은 임나가 경남, 김해니, 함안이니 하며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우리나라 남부지방임에는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모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고 현재 일본극우파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고 이들의 주장이 그대로 현재 일본역사교과서에 들어가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일본 극우파들이 내세우고 있는데 그 주요근거중의 하나가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신묘년조다.

이와 같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일본 극우파 학자들은 이 문장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 백제 등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국내 식민사학계도 이를 따른다.

‘봐라,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는가.’ 라며 왜가 고대에 남부지방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냐고 따진다.

▲ 이찬구 박사가 광개토태왕비문 신묘년조를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바른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르게 해석한다. 광개토태왕 비문이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하고 기리기 위한 내용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 신묘년조 앞과 뒤는 이 신묘년조 내용과 전혀 다르다. 광개토 태왕이 주어가 되어 정복전과 개척을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갑자기 신묘년 조에 와서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기타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시기는 서기 4세기 후반 경이다. 이 때는 왜가 철기도 못 만드는 때고 배도 제대로 못 만들던 시기다.

이런 왜가 강력한 철기로 무장한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일본극우파와 국내식민사학계만 빼놓고 상식에 통한다.

그럼에도 비문에 왜라는 글자로 보이니 문장 해석을 왜를 주어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하여 최근에 획기적인 해석을 내놓은 학자가 있어 화제다. 이찬구 박사다.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조선개국 4353.04.26. 서울 종로구 3호선 전철 안국역 맞은편 ‘광화문아침’에서 열린 통일학당 강연 강사로 나와서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그는 이날 광개토태왕 비문을 서기19세기 말 일본군 참모본부 사카 중위가 첩보원으로 만주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다고 밝혔다.

일제는 이 발견으로 비석 탁본을 만들어 공개했다. 일제는 이미 서기1868년 명치유신이후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정한론을 내세우고 서양 무기체계로 무장한 군사력 증강과 침략을 정당화하는 침략이론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침략 정당화 이론은 일제가 왜 조선을 침략하여 보호해야 하는지 역사적 근거를 찾는 것으로 모인다. <일본서기>의 이른바 ‘신공황후’조에서 찾았다.

신공황후라는 여성이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와서 신라와 백제를 복속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른바 당시 야마토 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이 기록을 근거로 해서 나왔다. 이게 일제침략을 정당화 하는 주요 이론이다. 

일제가 내놓은 광개토태왕 비문탁본도 이런 침략이론을 합리화 시킬 목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 비문 맥락에도 배치되니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자는 것이다.

이러던 중에 재일교포 학자 이진희 선생이 일제가 비문에 회를 발라 조작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이에 대해 반론이 있으나 근거가 미약하다.

반론은 일본인 학자가 한 것이 아니라 왕건군이라는 중국학자가 서기1980년대 일본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서 주장했다.

이찬구 박사는 이 같은 내막을 밝힌 뒤 일본인 학자들의 해석하는 것과 우리나라의 위당 정인보, 이형구 등이 해석한 내용을 소개했다.

우리나라 위당 정인보, 이형구 등 학자는 주어를 광개토태왕으로 보고 해석하거나 조작됐다는 것을 전제로 글자를 바꿔 해석한다.

▲ 그림 오른쪽이 서기1876년 구로다 탁본이다. 옆의 서기1907년 샤반느 탁본 희미한 왜자와 비교해 보면 전혀 알 수 없다. 먼저 나온 탁본에서는 전혀 파악이 안되는 글자가 십년이 넘은 뒤에 나온 탁본에는 보인다. 조작설이 나온 근거다.

이 같은 풀이를 가능케 하는 증거도 이날 소개됐다. 서기1876년 구로다 탁본에는 왜倭 자인지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이 박사는 대전에 사는 김재문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라며 보여줬다. 서기1907년에 나온 샤반느 탁본도 보여주었는데 이 탁본에는 희미하게 나마 왜자의 흔적으로도 볼 수있는 글자가 드러나 있다. 

이를 보건데 일제가 비문에 회를 발라 조작했다는 이진희 선생의 주장이 설득력이 생긴다. 원래는 서기1876년 구로다 탁본 처럼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글자였는데 일제가 이후 비석에 회를 발라 왜자를 새긴 후 이를 탁본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박사는 이를 토대로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것을 소개했다.  倭자를 광개토대제를 뜻하는 제帝로 보아, 왜가 아니라 광개토대제가 등극한 이래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왜 이렇게 해석하는지 근거도 제시했다. 먼저 해당 내용 비문을 보면 왜라는 글자가 너무 흐려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 주목했다. 얼마든지 '제帝'자로도 판독이 된다고 했다.

또 광개토태왕비문에도 '제'자가 나온다고 했다. 초반부에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문구다. 제자가 나온다.  또 <삼국유사>에 고구려 주몽을 뜻하는 동명성제라는 말이나온다. 여기서 성제의 제가 帝이다. 

이 박사는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책을 최근에 출간했다. 신묘년조 해석을 위해 수백쪽의 단행본으로 내는 경우는 이찬구 박사가 처음으로 보인다. 그 만큼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읽힌다.

▲ 이찬구 박사의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듣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몰려와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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