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중국과 미국, 한반도 분단 계속하기로 합의'

기사승인 2020.04.24  23:59:20

공유
default_news_ad1

- 자주독립투쟁 실패의 역사를 끝내는 길은 남북전면교류에 있다.

 

 

이승만의 종신 집권욕으로 4.19혁명 일어나서 민주시대 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의 개혁, 비리척결 포기로 박정희 반란 초래

중립화 통일방안 등 통일기운, 박정희의 탄압으로 모두 사라져

통일은 중립화 방안을 토대로 남북합의와 주변4강 협력 받아야

중국과 미국은 우리민족 통일 원하지 않고 분단 상태 유지 원해

미국에게 자주적인 자세로 나가야 미국이 더 이상 갈취 안 해

 

▲ 조선개국 2020.04.19. 서울 종로구 3호선 전철 안국역 2번출구 맞은편 '광화문아침'에서 강종일 박사가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승만은 끝없는 권력 탐욕으로 객지에서 죽어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칠 줄 모르는 권력욕은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그는 서기 1945.8.15 해방당시 70세였다. 대통령 한번으로 만족을 못하고 죽을 때 까지 대통령 권좌를 놓기 싫어 평시든, 전시든 공권력을 동원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헌법을 뜯어 고치고 선거를 조작했다.

그의 명을 재촉한 3.15 부정선거 상황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선거를 빙자한 정권 탈취범죄였다. 3선 집권을 목적으로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을 억지로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민심이 떠나기 시작하고 다음 집권이 불안해졌다.

민심이반은 서기1958년 8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나타났다. 이승만 자유당보다 야당 및 무소속이 다수당이 됐다. 그는 다음 선거에서 실각할 위험이 현실로 다가오자 언론활동을 제한하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정적들을 탄압했다.

서기1960년이 되자 원래는 5월 10일이 선거 날인데 3월 15일로 당겨서 실시했다. 미리 자유당 지지표 40%를 투표함에 집어넣고, 60% 지지율 달성하기 위해 3인조, 9인조로 구성된 투표를 강요했는데 이는 누가 누구를 찍는지 알게 하는 것이었다.

여당을 안 찍을 경우 나중에 공격을 받게 되니 안 찍을 수도 없었는데 투표장에 완장을 찬 패거리가 버티고 있었다. 투표소에서는 야당참관인을 내 쫓았다. 투표함 운송 중 투표용지 교체 등 다양한 불법을 저질렀다.

그렇잖아도 민심이 좋지 않아 이전부터 시위가 일고 있었는데 3.15부정선거가 알려지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권타도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눈 맞아 죽은 김주열 고등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학생시위대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몰려가자 친일경찰들이 발포하여 183명이 사망하고 6529명이 부상당하는 천인공로할 일이 벌어졌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쫓겨 갔고 거기서 죽는다. 서기1945.08.15. 당시 70세였으니 서기1960년 4월 쫓겨 갈 때는 이미 85세였다. 당시 85세면 천수를 누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정말 죽을 때 까지 대통령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승만의 시체를 다시 본국으로 가지고와 현재 동작동 현충원에 ‘알뜰히 모신’ 사람이 5.16.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오카모토미노루岡本實)다.

▲ 4.19혁명으로  하와이로 쫓겨 가 남은 생을 보내던 이승만이 죽었다. 서기1965.07.23.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시신을 공수해 온 미국 공군기에서 이승만의 시신이 군의 의장대에 의해서 운구되고 있다. 자료: 테이티비 갈무리

 

▲ 서기 1965.07.23. 이승만 시신이 도착하자 공항에 나가 영접하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 침울한 표정으로 맞이하고 있다. 이날 정일권 국무총리,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을 비롯 정부 주요 인사와 목사 그리고 많은 시민이 공항에서 이승만 시신을 맞이했다. 자료: 케이티비 갈무리

 

서기2020.04.19. 4.19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종로구 전철3호선 안국역 2번 출구 맞은편에 위치한 광화문아침에서 통일학당이 주최하는 강연회가 있었다.

강종일 국제정치학 박사가 본 강의에 앞서 4.19혁명 특별 강연을 했다. 4.19혁명 전후 상황을 먼저 설명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주요 골자다.

이날 강연은 4.19 혁명을 알리고 기념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았다. 혁명이 가져온 성과 중 하나를 끄집어내어 오늘날 상황과 연결시켰다. ‘한반도 중립화 방안’이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총선거를 통해 민주당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강 박사는 장면정권 1년여 기간에 일어난 통일운동에 주목했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정권이기 때문에 4.19혁명세력의 주장이 봇물이 터지 듯했다. 남북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장면정권은 이 운동을 지지도 안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중립화 통일 방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UN)과는 다른 비동맹 중립주의 운동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기 1955년 4월 구성된 소위 ‘반둥회의’다.

여기에는 미. 소 냉전체제 속에 편입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국가들이 참여했다. 인도,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신생독립국가들이다.

또 미국 존 덜레스 국무장관의 우리나라 중립화 방안과, 미국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서기1960년 10월에 제출한 한국통일 문제를 오스트리아 식으로 중립화를 하자는 제안에서도 힘입었다.

또 당시 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추진하던 영세중립국화 촉구운동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당시 국내서는 통일을 어떤 방식을 할 것이냐를 가지고 다양한 방안이 난무했다. 유엔 감시 하에서 남북한 총선거, 남북한 협상통일론, 중립화 통일방안, 북진통일안 등이다.

학생들이 4.19혁명의 주역이었기에 학생들은 거침이 없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판문점에서 남북한 학생들은 이 구호에 따라 남북 영세중립 통일방안 회담을 갖기도 했다.

강 교수는 이날 중립화 통일방안이 정부가 주도 하지 못한 것은 혁명주체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혁명세력이 아닌 민주당의 구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민주당 장면정권은 현재 초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처럼 개혁, 비리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지금 적폐청산과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척결대상인 기존 구태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고, 초불혁명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혁과 비리세력 척결 사명을 띠고 들어선 민주당 장면 정권이 제 역할을 안 하자 사회는 혼돈으로 빠져 들었고 연일 혼란정국이었다. 결국 혼란을 바로 잡겠다는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강 박사는 지금도 4.19혁명 세력이 주장한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이 유효하다고 피력했다. 나아가 남북통일국가도 중립화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먼저 남북이 통일하려면 남북합의도 있어야 하지만 주변 국가의 동의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이 왜 필요한지 몇 가지를 근거를 제시했다. 먼저 우리나라 지정학 형세는 4대 강대국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국가에게 기울어지면 다른 국가에게는 불리하게 된다.

또 남북한 합한 국력도 주변 4강의 국력과 비교할 때 미약하기 때문에 다 대응하기 보다는 중립화가 낫다고 했다. 이는 어느 한 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와는 적대 관계를 갖는 안보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중립화는 어느 한 국가와 동맹을 맺지 않아 주변국 누구에게도 적이 아니다.

또 중립화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고 조정자 역할을 가능케 한다. 중립화로 나가면 우리나라는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같이 영세중립국이 되기 때문에 강대국들 사이에서 완충지대가 되어 동북아 평화에도 기여한다.

이날 강 박사는 중립화는 그동안 이어온 외세지향성이 사라지게 한다. 강 박사의 주장을 요약하면 외세지향성은 외세의존성이다.

국가생존과 외국 지원을 받아 정권을 획득해오면서 생겨난 것이 외세지향성이라고 했다. 중립화가 되면 외국이 간섭을 할 수 없기에 외세의존성향이 사라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중립화 방안은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 서양열강이 앞을 다투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부터 중립화 방안이 나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유길준과 조선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서기 1885년에 내놨다. 또 이외에 영국의 체스니 던캔이 조선의 엄정한 중립을 주장했고, 조선 국내부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윌리엄 샌드도 1900년 1월 “조선이 영세중립과 자주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스위스나 벨기에와 같이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열강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건의와 주장을 고종이 1900년 8월과 1903년 9월 조병식을 특사로 해서 일본에 보내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 열강국가들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실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은 이 때 이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줄 리가 없었다. 조선이 영세중립의 준비가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해방 후에도 중립화 주장은 꾸준히 이어졌다. 4.19혁명 직후 김문갑이 영세중립화 통일투쟁을 전개했고, 김대중도 서기1989년 6월 광주교육대학에서 시국강연 차 한 발언에서 오스트리아식 한반도 영세중립국 통일국가를 암시했다.

북한 김일성도 ‘중립국’, ‘비동맹 독립국’을 강조했다. 이외에 미국 버클리 대학 스칼라피노 교수, 하버드대학 라이샤워 교수, 세계평화학회 회장, 요한 칼퉁 교수가 영세중립통일국가 방안을 내놨다.

강 박사는 이와 같은 주장을 토대로 한반도 중립화 접근 방법을 제시했다. 먼저 우리 내부에서 기초를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남북한 신뢰관계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되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 대표부를 두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대북제재사항도 아니기 때문에 미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것이라며 현 정부의 대미 저자세를 우회로 비판했다.

이어 남과 북은 남북 각 1백명씩 2백명으로 하는 민족통일최고회의를 만들어 중립화 통일헌법과 선거법을 제정하여 남북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주변 4강과 협의하라는 안을 빼놓지 않았다. 이어 마지막 단계로 남과 북은 중립화를 거쳐 통일로 나간다.

강 박사는 강연을 끝맺으면서 중국과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진짜 생각을 폭로했다. 중국과 미국은 남북한 평화통일보다는 분단현상유지를 원하고 있다고 했다.

서기1971.07.11. 과 서기2005.08.05. 북경에서 비밀회담을 갖고 일본과 러시아의 한반도 문제개입을 차단하고, 한반도는 계속 분단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차례나 그것도 수십 년이 흘러도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없음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도 이는 마찬가지다.

강 박사는 남북이 하나 되어 통일하는 길은 결국 우리가 주체적으로 나설 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문재인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외교는 낙제점이라고 비판했다. 또 대북제재 사항도 아닌 것도 모두 방치하고 미국 눈치만 보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합의한 것은 그만 두고서라도 문재인 정권 들어 북과 합의한 것만이라도 미국 눈치 보지 말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미국 같은 힘센 나라에게 무조건 복종하면 더 뜯어 먹으려고 하니 ‘아니요’라고 해야 한다고 외쳤다. 미국은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외국인을 대우하고 존경하는 습성이 있으니 대들 건 대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꼭 한번 읽어 보라며 도널드 그레그 대사가 쓴 <역사의 파편들> 책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가 나오는데 남과 북이 좋아지면 미국이 방해한다는 것과, 우리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고 나빠지면 미국이 개입하여 일본에게 유리하게 판정한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했다.

사실 이 같은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 핵심, 힐러리가 공식석상에서 남북분단과 적당한 긴장이 미국이익이라며 분단 고착화 견해를 밝힌바 있다.

지난해 8월 아베의 수출규제 도발로 우리나라와 일본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핵심소재부품에 대한 대한수출규제는 일본이 우리를 적국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더 이상 우방을 전제로 하는 한일군사정보교류협정(GISOMIA)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며 연말에 종료시키겠다고 했다.

이에 미국이 종료통보를 하루 앞두고 우리 정부를 압박하여 종료선언을 취소 시켰다. 결국 미국은 일본 편을 들어주었고 혈맹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미일동맹의 수단임이 드러났다. 

서기1905년 미국과 일본의 ‘테프트-카스라’ 밀약으로 나타난 비극을 보는 것 같다. 당시 조선은 미일동맹의 전리품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조약이었다. 1백년하고도 15년이 지나고 있지만 미일동맹의 총알받이 역사는 바뀌지 않고 있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