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조작한 광개토태왕비문을 바로 잡아야 한반도 재침 야욕을 꺾을 수 있다.

 

 

겨레얼 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이찬구 박사,

일본극우파 추종, 식민사학계의 광개토태왕비문 신묘년조 풀이 무력화

<새로운 광개토태왕릉비 연구>에서 일제가 조작한 비문 발견, 바로잡아

일제가 조작한 비문 탁본을 비롯해 이제까지의 모든 탁본 조사 후 확인

광개토태왕비문 신묘년조를 가지고 책을 통해 심도있게 연구한 것 처음

 

▲ 일제침략기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만주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태왕비, 옆에 농부가 서있다. 일본인이 찍은 것을 보인다. 일제는 고고학 발굴이나 유적에서 반드시 현지인을 배치시켜 사진을 찍었다. 가짜 점재현 비로 판명난 비도 그 지역 소년을 데려다가 비 옆에 배치해 사진을 찍었다. 경주, 가야지역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광개토태왕비의 정체

광개토태왕릉비는 현재의 중국 집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아버지인 광개토태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건립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전인 장수왕 2년(414)이다. 응회암(凝恢岩)으로 만든 이 비석은, 높이 6.39m에 무게가 39톤에 달한다.

울퉁불퉁한 표면에 바둑판처럼 선을 반듯하게 그은 뒤 14×15㎝ 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한자를 새겨 넣었다. 글씨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예서체(隸書體)이다. 동양 최대의 거석기념물이며, 가장 오래된 실물 사료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730 여년 앞선 중요한 기록물이다. 지금은 중국의 주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이라는 이름으로 광개토태왕릉비, 장군총, 국내성, 무용총 등 43건이 일괄 등록되어 있다.

내용은 고구려의 창건과 왕계(王系)의 유래와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대왕 생전의 대내외 업적,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 서기 2005년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 회원들과 집안의 광개토태왕비를 답사했다. 뒷줄 우측 첫번째가 저자.

일본군 참모본부 해석을 추종하는 식민사학계

이 가운데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며 논의되었던 부분은 신묘년조(辛卯年條)의 해석과 이를 둘러싼 비문에 대한 일제의 변조 여부였다.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로 알려진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놓고 동양 삼국이 논쟁을 벌였다.

특히 일본은 1883년에 사카와[酒句景信]중위가 처음으로 입수해온 쌍구가묵본을 집중연구하여 1889년에 자국에 유리한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그 해석을 토대로 조선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사료로 활용하였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억지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삼아왔던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그런 침략적 해석을 유지하고 있고, 청소년들에게 과거에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를 경영하였다고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국내 식민사학계도 일본 극우파의 광개토태왕비문 신묘년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사실상 고대 일본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식민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인보(鄭寅普)은 이 구절 중에 도해파(渡海破)의 주체를 고구려 광개토태왕으로 보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신민(臣民)의 주체는 왜가 아니고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이 신묘년조 기사를 비롯한 비문의 해석은 1970년대 재일(在日)동포 사학자인 이진희(李進熙)에 의해 일제 군부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되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의 석회도부설은 설득력을 얻었으며,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 광개토태왕비문 중 일제가 조작한 것으로 판명난 신묘년 조의 문구. 구로다 탁본(1876년) 1면 상단 [이왜이] 부분

저자의 새로운 주장

저자는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탁본을 대조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가장 오래된 탁본인 구로다(黑田) 탁본(1876년)과 프랑스인 샤반느(Chavannes) 탁본(1907년)을 비교한 바, 신묘년조의 而倭以(이왜이)의 왜(倭)자가 크게 손상된 것을 발견하였다.

이는 이진희의 변조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본래 임금 제(帝)자를 왜(倭)자로 변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래 이제이(而帝以)였는데, 이를 而倭以(이왜이)에서 일제가 변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倭(왜)자와 근사해서 변조하기 편한 글자가 帝(제)자였다고 본 것이다.

帝(제)는 비문에 나오는 王(왕), 또는 太王(태왕)의 의미와 같다.

역사적으로 신묘년은 서기 391년으로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해이다. 태왕의 즉위년에 대한 기록에 남의 나라 왜(倭)자를 새길 이유가 없다.

『삼국유사』에도 고구려 시조 왕을 동명성제(東明聖帝)라 칭했고, 『수서(隋書)』(고구려전)에도 고국원왕을 소열제(昭烈帝)라 칭한바 있다.

이처럼 고구려 임금에 대한 칭호로 제(帝)라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본래부터 왜(倭)자였다면 그 글자가 일제에 의해 손상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현 탁본상의 而倭以(이왜이)를 이제이(而帝以)로 고치고 빠진 글자를 연왜(連倭)로 보결하여 해석하였다. 선문대 이형구교수도 而倭以(이왜이)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를 而後以(이후이)로 고친 바 있다.

▲ 일제가 조작 날조한 광개토태왕비문 중 신묘년조 부분을 복원한 이찬구 박사의 책. 단일 문구를 대상으로 책으로 연구해서 내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사학계는 물론, 비문해석에서 일본 극우파 주장을 따르는 제도권 식민사학계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리>

1889년 이래 이제까지 일본측이 주장해온 원문과 해석이다

(일본측 주장)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일본측 해석) 우리 일본이 신묘년(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저자가 바로 잡은 신묘년조는 "이제이 신묘년래 도해파백잔연왜 신라이위신민(而帝以 辛卯年來 渡海破百殘連倭 新羅以爲臣民)"이며, 그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원문)而帝以 辛卯年來 渡海破百殘連倭 新羅以爲臣民

(해석)임금(태왕)께서 신묘년에 등극한 이래로 수년 동안에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어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묘년조 비문의 주어가 고구려 광개토태왕이라는 것과 당시 삼국과 왜와의 국제적 친소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와 왜를 공격의 대상으로 보았고, 신라를 보호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것이 당시 고구려 대외 정책의 골간이며, 태왕의 안보 대전략이라고 본 것이다.

 

 

이찬구(李讚九, Lee, Chan-goo) 박사 약력

1956년 충남 논산 생

대전대학교 철학박사. 大山(김석진)문하에서 한문수학, 가톨릭대학교에서 논어, 주역 강의, 인하대학교에서 민속학 강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한국철학사전 집필위원, 한국민족종교문화대사전 편찬위원, 겨레얼살리기운동 참여, 미사협, 홍역학회 활동 등

[저작] : ≪천부경과 동학≫ ≪주역과 동학≫ ≪고조선의 명도전과 놈≫ ≪천부경≫ ≪홍산문화의 인류학적 조명≫ ≪紅山文化と檀君史話≫ 등

[논문] : <단군신화의 재해석> <주역의 선후천변역과 제3역학의 가능성> <천부경 대삼합륙의 우주론> <단(檀)과 홍익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 <광개토호태왕비문의 신묘 병신년조 기사에 대한 고찰> <수운교 개벽사상의 역리적 고찰> 등

[인터넷 강의] : <홍산문화강의> <천부경과 인류의 미래> <단군과 홍익인간> <광개토태왕릉비의 진실을 찾아서> <홍산문화와 환웅> <고구려와 광개토태왕릉비> 등

(lee2918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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