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절불굴의 의지로 살아온 한 조선여인의 대미항쟁정신은 이 시대 독립혼이다.

 

글: 은영지(소성리 미군사드퇴출 투쟁가)



 

소성리에 박힌 미군무기, 사드철거 투쟁에 뛰어든 소녀같은 아줌마

일상의 후원에서 외세가 지배하는 것 알고 외세 척결 투쟁에 뛰어 들어

보수 교회에서 민중진보 교회로 옮긴 후 투쟁방향을 확실하게 잡아

찌져기게 가난한 어린시절과 성인이 돼서도 끝나지 않는 궁핍에 단련돼

죽을 듯한 역경에 굴하지 않고 뛰어든 대미독립투쟁은 은총선생의 사명



▲ 경북 성주군 소성리 미국무기'사드' 퇴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은총 선생이 '사드' 퇴출을 즐겁게 하고 있다.

<밥 잘하는 예쁜 언니>

 2월8일 성주소성리 진밭교 토요아침평화행동 (사드반대 평화운동가 은총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착하다, 천사다라는 얘기를 듣지만 가난하지 않게 만드는 정책은 빨갱이라 한다" 고 누군가가 말했듯 ‘모두가 공정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공공정책을 잘 만들어야 ...하는 것" 이라고 말하는 그는 천상 빨갱이 공산주의자 같다.

유니셰프나, 한비야씨가 만든 월드비젼에 20년 이상 후원한 본인의 헌신이 가난한 사람에게 온전히 가는지 확신이 안들고 한계를 느꼈다는 은총샘이다.

이제 방향을 바꾸어 이름없는 단체를 후원하거나 정치를 바꾸어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2002년부터 촛불을 들었다.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간첩죄를 뒤집어씌우는 국가보안법 폐지운동과 반미평화운동을 해온 활동가이지만 소성리에서 마주한 그는 지킴이들에게 '밥 잘하는 언니, 누나'다.

소성리에 올 때마다 부엌일을 도맡아 하며 우렁각시처럼 맛깔스런 음식을 뚝딱 차려내는 일을 즐긴다. 그가 해준 전복죽 맛도 좋았고 김치찌개와 겉절이 맛도 감동이었다.

마을회관 냉장고에 딱히 해먹을 찬거리가 없는 듯한데도 윤기 좔좔 흐르는 더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술손을 가졌다.

이번에 내려 왔을 때 뭐 해드시느냐고 물었더니 "냉장고 파먹기만 했다"고 대답한다. 그의 알뜰함과 넘치는 힘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궁금하여 토요일 아침 진밭교에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소녀같은 천진난만함을 간직한 밝고 순수한 모습과는 달리 가난하고 힘든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다는 고백에 마음이 아려왔다.

▲서기2016년 미국무기 '사드' 미사일 기지가 소성리에 배치된 뒤 애국시민들이 줄기차게 퇴출 투쟁을 벌여 왔다.

돌이켜 보면 누구에게나 아름다웠을 추억으로 채색돼 있지만 그에겐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옛날' 이었다. 그 회고담은 쓰라린 한 편의 장편소설로 다가왔다.

스물두 살 때 공장 사장과 싸우기도 했는데 노동자 계급의식이 부족할 때이니 약간의 집착도 작용했을 대립과정에 '수녀가 되던지 비구니가 되던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을 비관하기도 했다.

"언니가 다니는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며 첫아들을 죽이는 출애굽기에서 하느님이 만들어 놓고 왜 하느님이 죽이지? 공의롭지 않잖아? ‘예수님 아니고는 천국에 갈수 없다‘라는 구절을 보며 예수를 모르고 죽어가는 불교국가의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하지 않으셨나? 그 생명은 예수 몰라서 지옥가야 한단 말이야?‘ 라는 우울한 생각이 들어 목사님에게 물어봤더니 '네 조그마한 머리로 어떻게 큰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느냐.' 그러면서 '무조건 믿으라' 하는데 안 믿어졌어요. 그래서 하느님과 맞짱 뜨는 심정으로 하느님께 물어보려고 자그마치 20일을 금식하며 기도(단식투쟁) 했지만 아무 답도 못 들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를 못 떠난 것 보면 난 예수에게 잡힌 몸 인가 봅니다”

20여년을 방황하다가 인천의 작은 교회에 갔더니 목사가 '사장'같이 보여서 다시 순복음교회 비슷한 주안장로교회에서 예배만 드려야지 했는데 국가보안법 폐지반대 성회를 하는 걸 보고 뛰쳐나와 민중교회를 찾아서 다녔지요. 거기서 '맞아. 예수님은 이런 모습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세상을 바꾸는 촛불을 들었고 내 눈에 보이는 '요것만 고쳐지면, 요것만 고쳐지면, 정치만 잘 되면...' 하는 심정으로 일인시위 등등 광우병, 세월호 참사 때 진실규명을 위한 촛불시위에 이어 지금까지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전에는 조직 없이 나 홀로 촛불을 들었는데 2015년쯤 전봉준 서거(동학농민운동) 121주년을 맞아 시민단체에 섞여 전주 황토현에 갔을 때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을 만나 평통사에 가입, 깃발을 꽂고 방황을 끝냈다.

근현대 우리나라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 오랫동안 뿌리박힌 남북 분단이고 그 악의 뿌리는 미국이므로 미국에 대항하려면 평통사 활동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어릴 때의 기억은 눈물깨나 흘려야 들을 수 있는 얘기였다. 아버지는 편찮으셨고 5년이상 수제비로 끼니를 때워야 했을 정도로 그의 가족은 가난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학교 지각을 하더라도 아침 먹고 설거지를 해놓고 가곤 했다.

소풍 갈 때조차 김밥을 말을 밥이 없었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선생님 사모님이 김과 밥을 한 바가지 가득 담아줘서 그것으로 김밥을 싸서 갈 수 있었다.

 엄마가 쥐어준 20원으로 먹고 싶은 과자도 안 사먹고 가져와 검정고무신을 살 정도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였다.

초등 5학년 때 엄마 친구들한테서 조그마한 게 아궁이에 불 때어 하는 밥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부엌살림을 도와드렸다. '밥 잘하는 언니'의 구력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으리라 짐작된다.

체구도 작은 아이가 펌프질해서 물 받아 함지박에 보리쌀 씻어 안치고 왕겨로 불 때서 밥 하는 고난이도(?)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는 게 안쓰러웠다.

초등학교 졸업한 지 3일만에 대전 봉제공장에 들어갔다가, 15세 때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가 언니가 다니는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하루 10~12시간을 쉴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해서 수시로 오줌소태(방광염)에 걸려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엄마와 공터에서 미나리 농사를 지어 쏠쏠하니 팔아서 살았다. 하얀 카라가 달린 교복입고 다니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그는 낙오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드' 퇴출 투쟁은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다.

결혼하고 나서도 교실을 헤매고 다니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러면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몹시 우울하고 속상했다.

"도대체 이 꿈을 언제까지 꿔야 되는 거야? 나는 공부 안해도 좋아. 인생이 수학의 인수분해만 풀고 사는 거 아니잖아. 사는 게 인수분해란 말이다."

혼자 꽥 소리를 지르며 저항한 이후 다신 그 꿈을 안 꾼다고 했을 땐 얼마나 공부 못한 게 한스러웠으면 상처딱지가 되어 잠재의식 속에 박혔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16세 때 숭전대(지금의 한남대) 학생들이 가르치는 야학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봐서 중학졸업자격을 따게 되었다.

교복 제작하는 공장에 다니는 둘째 언니가 후레아 치마를 보내주어 학생 같은 느낌이 들어 나폴나폴 얼마나 즐겁게 입고 다녔는지. 대전엔 고등과정 검정고시 공부할 곳이 마땅찮아서 서울에 있는 학원을 다녔다.

영어, 수학, 과학에 기초가 없어 검은 건 글씨고, 하얀 건 백지로 보이는가 하면 책만 펼치면 잠이 쏟아져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실망한 언니에게 꾸중을 들은 후 가출해 기숙사 있는 공장에 취직했다.

몸도 약하고 일도 서툴다고 화를 내며 뺨을 때리는 재단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열여덟 살 짜리 어린 은총은 그곳에서도 갑을병정에서 '정'의 신세가 된 주눅든 인생이었다.

▲냄비처럼 한 때 유행으로 그치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줄기차게 '사드' 퇴출 투쟁은 이어진다.

이후 전화국의 교화원이 되고자 했으나 그 일도 사양길이라 들어가지 못했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마냥 부러워하며 절망하는 청춘을 보냈다.

 그의 형제들은 유난히 머리도 좋고 일도 똑 소리 나게 잘 했다, (막내오빠인 강장로님은 교육감상을 받은 수재였고 두 언니는 ‘생활의 달인’ 수준의 미싱사였다.) 

 그러나 그는 뭐하는 잘난 것이 없었다. 남들보다 뒤늦게 A급 미싱사로서 도급제 일을 하게 되어 월급의 세배 가량 탈 기회를 얻어 뛸 듯이 기뻤따.

몸이 너무나 부실하여 채 두달도 못하고 다시 월급제로 강등 되었던 스물다섯 살 시퍼런 청춘은 삼남매 자취방에서 홀로 누워 방바닥을 두드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가난한 탓에 엄마 뱃속에서도 못 먹은데다 태어나면서 암죽을 먹어 배에 복수가 찬 아픈 아기였고 여덟살이 넘도록 야뇨증으로 아버지 발치에서 잤던 아이였다.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네." 라며 머리 쓰다듬어주던 엄마 친구의 얘기도 아프게 들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큼지막한 양은다라이(대야)에 미나리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장사 나가는 엄마 따라 나설 때 꼬맹이인 자신도 미나리를 이고 가서 "미나리 사세요, 미나리 사세요." 를 외쳤더니 같이 노점하시는 어른들이 무척 기특해하고 이뻐해 주었다고 한다.

"동생은 한두 번 엄마따라 미나리를 팔러 갔는데 학교선생님에게 들킨(?) 일이 있었어요. '아이구 기특한 거' 하면서 바로 효녀상을 받았어요. 엄마가 상은 저것이 받아야 하는데 라고 하시어 서러움에 울컥 했어요“

그래도 막내동생은 언니들처럼 공부 못한 서러움을 겪지 말라고 언니들이 우기고 지원해줘서 중, 고등학교를 나왔다.

아들은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만 딸은 공부를 시키지 않는 집안 분위기에 순응하여 대학을 안 가려고 하는 동생을 설득하는 했다.

동생을 대학에 안보내면 자신이 이 집 호적에서 파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입에 대지도 못하는 술 한 잔 먹고 헤롱거리며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덕분에 동생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교직으로 진출했고 결혼한 은총샘은 지하 셋방살이를 못 면했지만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밥 잘하는 '은총샘' 해주는 음식은 온 정성이 가득 들어가 있다. 꿀맛이다.

직장도 안정되고 아파트에 사는 막내오빠 (강형구장로)가 자신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걱정을 하곤 했던, 욕심없고 착해빠지기만 한 은총샘에게 "겨드랑이에 날개 있나 보라"고 얘기하거나 "모자라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쯤 남편이 잘못되는 바람에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자신이 가난하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공장에 가서 일한 만큼 대가도 못 받았고 끝내 사장이 월급 떼먹고 도망가 어린 두아이 데리고 살기가 수시로 막막했다.

하루는 장롱문을 붙잡고 " 하나님 10만원만 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하소연한 적이 있는데 진짜로 장롱안에 10만원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딸아이가 살레시오 유치원 졸업 때 아이 아빠가 잘못된 것을 안 수녀원장님이 주신 후원금 봉투을 발견한 것이다.

진짜 돈이 없고 궁핍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공황상태 있었지만 자신이 견뎌야할 몫이라고 생각하고 인내했다.

 계속 불안할 때는 부담스러워하는 형제나 친구들보다는 상담전화나 이름 모를 신부님에게 털어놓으며 마음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애들 아빠가 잘못되고 본인이 한 부모가 되어 아이가 원하지 않게 받은 상처는 내내 어미가슴에 생체기로 남아 수시로 아프다는 그다.

"수치를 놓고 남과 단순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빈곤한 축에 들지는 몰라도 나는 결코 궁핍하지 않으며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은총샘.


오늘 받은 기운이 바닥까지 드러나도록 다 써버려 폐 끼치지 않을 정도의 힘이 남으면 집에 들어와 완전히 퍼져 버린다고.

그러다가 샘물처럼 에너지가 다시 고이면 가지고 나가서 하루분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다. 오늘 하루만 산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그는 나름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한 듯했다.

"간병인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내 힘으로 밥 먹고 똥 싸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박근혜가 소성리에 사드를 들여놓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현장에 달려와 반대투쟁에 결합한 사람이다.

북핵핑계를 대지만 중국과의 패권싸움에 한국을 전쟁터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미제의 음흉한 속셈을 알기에 생업을 뒤로 하고 투쟁해오고 있다.

14살 때부터 어린아이가 하기 힘든 공장생활과 미나리 장사를 하며 단련된 정신력이니 사드투쟁현장에서도 변함없이 씩씩하다.

지쳐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른 아침, 함께 평화행동을 한 후 잰걸음으로 내려가면서 "아침상 차려 놓을테니 밥 먹고 가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추위에 떨었을 지킴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술 뜨게 하려는 정스러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눈물겨운 동지애다.

"하늘의 은총, 이 땅의 평화
소성리의 은총, 지킴이들의 평화
밥 잘 먹고 끝까지 사드 빼자
가난한 평화는 투쟁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사드와 미군 뽑고 평화 심자"
소성리의 젊은 주민 소야 훈님의 구호도 잔잔한 감동으로 마음을 울렸다.

▲ 소성리에 박힌 미군무기 '사드'는 이 시대 독립군, 의병들의 정성과 투쟁으로 반드시 뽑힐 것이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