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단군영정은 일연의 삼성기가 우리겨레의 원형 전하고 있음을 말한다.
<강도지>에 실린 단군대황조 영정은 서기1867년으로 편년
일제침략기인 서기1932년 <강도지> 수정증보록에 실려 전해
서기 1867년 단군대황조 원본 전해지고 있을 가능성 많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지배하는 남한 역사학에서는 단군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현행 국사교과서가 단군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국고대사학회' 같이 우리 역사학을 장악하고 국사 교과서를 좌지 우지 하는 세력이 자발로 넣은 것이 아니다.
서기1970~1980년대 민족사학의 국사찾기협의회 등에서 국회 청문회 등,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다. 이 마져도 얼마전 까지 만하더라도 마치 남의 나라 역사를 전하듯이 표현하여 여론의 따까운 비판을 받았다. 이후 억지로 주체적 문구로 바꾼 바 있다.
우리 역사학을 조선총독부 사관인 일본 극우파 역사학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니, 단군영정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일제침략기 독립을 위해서 대종교 계통에서 이 시기에 만들었다는 것이 주된 분위기다. 인위적으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단군영정이 역사성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개 종교의 교주 정도로 치부한다. 불교 석탄일이나 기독교 성탄절만 국경일로 하면 반발이 일 까봐, 구색맞추기로 개천절을 인정한 측면이 많다.
역사가 아닌 구색맞추기용 국경일에 사용되는 상징으로써의 단군영정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실정이라서 단군영정은 아무리 오래 가 봐야 일제침략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본지에서는 서기2019.09.28. 10.04.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천도교 대교당 및 수운회관에서 단군문화포럼(대표, 이애주)이 주최하는 단군영정과 천부경석 발굴 학술대회와 전시회 소식을 전한바 있다. 이 때 서기19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오방색으로 채색된 단군영정을 소개하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도했다.
이제가지 전해오는 단군영정이 일제침략기에 대종교 계열에서 급조된 단군영정이라는 기존의 견해를 뒤집었다. 대종교 계열에서 전하는 단군영정과 기본개념에서는 같으나 후광(광배)이 그려져 있는 것과 오방색으로 치장된 점 등이 달랐다.
대종교 계열에서 전하는 단군영정이 급조한 것이 아닌, 이전에 전해오던 것을 바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었다. 역사성이 있었다.
그런데 서기19세기 후반에 나온 오방색 단군영정 보다 더 오래된 것이 나왔다. 현재 <강도지>에 실려 있는 단군영정이다.
강화도에 사는 안성수 선생이 자신의 부친이 강화도 문화원의 이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강도지> 한권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강도지>는 소화7년 2월 15일 발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서기1932년으로 환산된다.
<속수증보 강도지 상> 이라고 돼 있다. 수정해서 추가 보충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실린 단군영정은 '단군대황조'라고 써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4200년전에 참성단에서 천제를 했다고 나온다(距今四千二百年前에 參星壇에서 祭天).
기미독립선언서에 나오는 단기(조선건국)가 4252년이다. 서기로 1919년이다. 이를 기준으로 4200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서기1867년이다. 이에 따르면 현존하는 단군영정 중 가장 오랜 된 것이다.
단군대황조라는 말은 대종교와 뜻이 맞지 않아 갈라진 정훈모 단군교의 <단전요의>라는 책에서도 사용되는 이름이다. 물론 대종교 계열에서도 단군대황조라고 하고 있다. <단전요의>에도 단군영정이 실려 있다. <강도지>의 단군영정과 대동소이하다.
오방색 단군영정이 서기19세기 후반, 1883년 것으로 편년되고, <강도지>에 실린 단군영정이 서기1867년 것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이전에도 민간에서든 단군신앙하는 단체에서든 역사성을 가지고 전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충남 부여박물관이나 태안의 단군전에서 소장하고 있는 단군영정이 오래된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방에서도 단군영정이 꾸준히 전해오고 있음이 확인된다.
안성수 선생은 강화도 문화원이나 강화도 박물관 또는 인천시의 관련 기관을 뒤져 보면 서기1867년판 단군영정이 실린 강도지 원본이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고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