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사학자 쓰다소키치가 지배하고 있는 국사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한다.

 

 

허구로 가득한 <일본서기> 일왕가를 비판했다고 해서

양심적인 실증사학자로 부풀려진 쓰다소키치의 실체

열렬한 천황주의자 였음이 밝혀져, 그럼에도 국내

한국고대사학회 등에서는 그를 여전힌 실증사학자로

떠받들며 그의 역사관을 고수, 숭배하기에 바빠

 

▲지난 조선개국4352.11.02. 서울 여의도 한국화재보험협회 대회의실에서 홍익재단(이사장, 문치웅)이 주최한 제6차 식민사학 해체 학술대회가 열렸다.

황국사관자이자, 조선총독부 대표 식민주의 역사학자,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우리나라 역사학에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크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국사교과서가 그의 역사관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조선인 제자들이 우리나라역사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정신이라고 하는데 우리 정신이 일제조선총독부의 지배를 아직까지 받고 있다는 말과 같다.

쓰다는 서기 1940년 <고사기>, <일본서기>의 실증적 연구로 일왕(천황)가를 모독했다고 고소당했다. 당시 일본 검찰은 <고사기> 및 <일본서기>는 신성하고 범해서는 안 될 성전이기 때문에 설령 학문적 연구라 할지라도 비판하는 내용을 쓰면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며 기소했다. 그가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전시 중에 필화사건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는 이유로 쓰다소키치는 양심적인 학자로 국내 식민사학계에게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황국사관에 맞선 양심 있는 실증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쓰다가 길러낸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은 이병도(1896~1989), 손진태(1900~?), 이상백(1904~1966) 등이 있다. 이병도는 현재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로 알려져 있고 그의 역사관이 우리 국사책을 지배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식민지역사관이다.

양심적인 실증사학자, 이것이 쓰다의 진짜 모습일까. 이는 잘 포장된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조선개국 2019.11.02. 한국 화재보험협회 회의실에서 홍익재단(이사장, 문치웅)이 주최한 ‘식민사학 폐기를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제2주제 발제자로 나선 세키네 히테유키(가천대) 교수가 쓰다소키치의 진상을 밝혔다. 그는 이날 쓰다의 역사학이 패전이후에 일본고대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그가 천황가에 대항한 양심 있는 학자로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 잡았다. 그가 이날 발표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쓰다가 서기1946년 발표한 <건국사상과 만세일계의 사상>은 천황제를 옹호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직접보자.

“2000년의 역사를 국민과 함께 한 황실을 현대국가나 현대의 국민생활에 적응하는 지위에 두고 그것을 아름답고 평안하게 하고 그 영구성을 보장하는 것은 국민 스스로의 사랑의 힘이다. 국민은 황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곳에 바로 민주주의 철저한 모습이 있다. 국민은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이루는 곳에 민주정치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황실을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세계로 통하는 인도주의 정신의 위대한 발로이기도 한다(津田左右吉2006: 321~322).”

2천년 역사를 가진 황실과 민주주의가 모순 없이 잘 조화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더욱 천황을 사랑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경죄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사실은 전혀 불경스럽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천황을 경애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 그의 저서에도 천황을 모독하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쓰다를 비판하는 학자는 주로 재야사학이다. 쓰다가 야마토 왕조의 역사만을 유일한 일본사로 삼는 황국사관을 정립하는데 힘썼다고 비판한다.

쓰다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황국사관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황국사관이라는 용어는 서기1942년에 나타났다. 일본 국어사전에 나오는 황국사관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가신도에 기초하여 일본역사를 만세일계의 현인신 천황이 영원히 군림하는 만방무비의 신국의 역사로 사는 역사관. 15년 전쟁기에 정통적 역사관으로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국민통합 및 동원에 큰 역할을 했다.”

쓰다의 역사관은 그가 서기1902년 29세 때 지은 일본사 교과서를 보면 잘 드러난다.

“우리 일본민족은 커다란 가족이다. 황실은 우리의 종가이며 우리는 황실의 지류라 할 수 있다. 양자가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것은 실로 국체의 정화이다.”

일본민족과 황실을 한 가족으로 보고 있다. 혈연관계로 잇고 있다. 피정복자나 귀화인도 황실의 혈족으로 융화 화합된다는 긍지로 가득차 있다.

또 쓰다가 서기1913년 <신대사의 새로운 연구>에서 주장한 천황관은 그가 얼마나 천황주의자였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황실과 여러 민족 즉 국민과는 동일부모에서 생긴 동포이며 황실은 그 동포의 종가이기 때문에 황실과 국민은 본래 일체이며 멀리 떨어진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양자는 뼈와 살처럼 내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본래는 끊을 수 없는 관계, 끊어서는 안되는 관계이며 그러므로 만세일계이다.”

천황가와 일본인이 일심동체라고 주장한다. 황실과 일본민족은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이나 정과 같은 자연적 충의심으로 맺어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신념은 패전 후에도 이어졌으니 그가 말년까지 고수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1966년에 그가 보인 역사관을 보면 더욱 강고하다.

“황실은 정치적 군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신이라는 지위에 계신다. 천황은 ‘현인신 現人神’으로 계신다.”

천황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現人神)이라고 지극히 떠받들고 있다. 극렬 천황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서기1946년 일제패망이후 내놓은 저술, <건국사상과 만세일계의 사상>을 보면 그의 천황주의자의 면모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다음과 같다.

1. 황실은 일본민족의 내부에서 나와서 일본민족을 정치적으로 통일했으며 외부세력에 의해 정복된 것은 아니다.

2. 그 통일 방법은 대체로 평화적이었다.

3. 천황은 예로부터 스스로 다스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4. 황실은 직접 일반 민중에 대하는 위치에 없었다.

5. 황실은 항상 시세변화에 순응하면서 형태와 역할을 변화해 왔다.

6. 천황은 정치의 실무를 맡지 않아도 정신적 권위를 저절로 갖추고 있었다.

7. 고대에 황실은 문화 중심이었다.

8. 황실의 존재는 민주정치와 모순되지 않고 민주정치의 정신은 황실을 사랑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었다.

1항에서부터 5항에 흐르는 역사관은 건국사상이나 만세일계의 사상이다. 황실이 일본민족에게서 나왔다는 것과 시세에 순응하면서 항상 일본역사와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신적 권위를 저절로 갖추었다는 말에서는 천황이 천부적 신적인 존재임을 주입하고 있다.

쓰다의 이러한 황국사관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은 물로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활용되었다. 침략하여 차지한 땅은 일본제국의 천황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천황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논리까지 진행될 수 있다. 대아시아주의로 확장해 나갔다. 통치대상으로서의 아시아와 통치 주체로서의 일본을 분리했다. 침략한 식민지를 일본제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이론을 만들어 냈다. 중국문화의 대일본 영향력도 부정하는 것으로 나갔다.

“일본은 과거에 문화재로서 많은 중국 문물을 수용했으나, 결코 중국 문화에 포섭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수용한 문물이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을 방해하고 왜곡시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일본으로서의 독자적 생활을 발전시켜서 문화를 창조해 왔다.”

중국문화의 영향권하에 없었다고 한다. 쓰다는 또 소위 <일본서기>에 나오는 허구로 유명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설화’를 수용하여 일제의 대 조선침략 및 식민정책을 부추켰다.

쓰다소키치의 진상이 이렇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고대역사학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쓰다소키치가 일제에 대항한 양심적인 실증사학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역사관에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적극수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그의 황국사관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한국고대사학계는 이것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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