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조선민족의 정신을 지킨 세계적 무용수 최승희를 기억해야 한다.

글: 최병선(자유기고가)

 

 

김일성 주석의 춤꾼, 최승희 평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이 우심하던 때 일본 춤이 아니라

조선 춤을 추었으면 애국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럽, 미국, 남미, 몽골 등 세계춤꾼으로 명성 날리며 전성기 만끽

일본군에게 끌려 다니며 위문 공연한 것이 친일파로 낙인찍어

해방공간서 월북하여 북조선에서 활동하다 남편 안막 몰락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진 후, 서기1969. 사망, 북 애국열사릉에 묻혀

친일파 낙인에 대한 최승희의 반격,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 일제침략기 조선의 혼을 조선 춤으로 불살랐던 최승희. 그는 유럽, 미국, 나미, 몽골, 중국 등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좌절과 승리를 맛보면서 춤으로 조선을 알렸다. 자료출처: news.dreamwiz.com/NEWSAVuRtRjQj-JSpPEk-wG0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편집인 붙임).

통일의 뿌리 남북을 잇는 전설의 무희로 불리는 최승희. 남편 안막의 권유로 조선(북)을 조국으로 삼았고, 김일성 주석으로 부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이 우심하던 때 일본 춤이 아니라 조선 춤을 추었으면 애국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최승희…

왠지 최승희에게서는 다른 친일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절이나 타협 같은 느낌보다는 그저 자신의 예술 활동에 매진했던 순수함만이 엿보인다. 순수한 영혼으로 시대의 격랑을 살아내야 했던 한 예술가의 냉철하고 고독했던 삶을 알아보자.

최승희(崔承喜, 1911.11.24~1969. 8. 8) 본관은 해주이며 서울 수운동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승희는 소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2번이나 월반하여 1925년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숙명여학교에 다닐 때, 졸업 후 도쿄(東京) 음악학교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연령 미달로 좌절되고, 사범대학도 같은 이유로 불합격되었다.

그러던 중 큰오빠 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 '수인(囚人)'을 보고 감명 받아 무용에 입문하기로 하고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어 도쿄로 떠났다. 1927년 가을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공연할 때 한병용과 함께 출연했다.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귀국하여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조선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 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기방(妓房)이나 지방 춤꾼들로 부터 전통춤을 익혀 고전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 최승희 춤꾼이 전성기를 누릴 때 모습. 서기1936년대 중반이라고 사진에 써있다(편집인 붙임).

1931년 5월 최승희는 스무 살의 나이로 와세다대 러시아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인 안막(安漠, 본명-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최승희 보다 한살위로 대학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결혼 후 서울에서는 창작 여건이 어려워 1933년 이시이에게 되돌아갔다. 일본에서 이시이의 공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934년 9월 일본 청년회관에서 최승희의 첫 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 '거친 들판에 가다', '칼춤', '승무' 등은 조선의 정취를 담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최승희는 순회공연도 하고 학용품, 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다. 또 신흥영화사에서 만든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舞姬)'에서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 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이 포함돼 있었다.

19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는 조선인의 우상이 되었다. 최승희는 이런 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9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 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1937년 미국을 거쳐 38년 12월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게 되고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돌며 순회공연 했다.

유럽 순회공연 후 많은 평론가들은 동양의 무희라고 극찬했고, 벨기에에서는 제2회 국제무용 콩쿠르 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최승희의 화랑춤으로 알려져 있다(편집인 붙임). 자료출처: https://brunch.co.kr/@nogada/66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 첫 번째 공연을 하기도 했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며 최승희의 인기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이때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가부키 극장에서도 공연했는데 내용은 대개 조선무용이었고 반주는 조선에서 데리고 간 악사들이 맡았다.

한편,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 미국, 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골을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는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 최승희의 장고춤(편집인 붙임). 자료출처: https://brunch.co.kr/@nogada/66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밞지 않았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때에 최승회는 일본군 위문 공연이 친일경력으로 평가되어 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북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이후 최승희는 조선(북한) 무용계를 선도하여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1948년 김구 환영 공연과 무용극 '해방의 노래', '춘향전' 등을 발표했다.

1950년 소련 순회공연을 했고 중국무용을 연구하여 '조선의 어머니', '거친 파도를 헤쳐'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조선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터졌다. 한국 전쟁 때 평양이 미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평가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의 학춤(편집인 붙임). 자료출처: https://brunch.co.kr/@nogada/66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1955년 최승희는 인민배우가 되었고 무용극 '맑은 하늘 아래서'를 발표했으며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그녀가 만든 '최승희무용연구소'는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고, 그녀의 무용도 주체예술사상에 맞지 않는다 하여 무용계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최승희는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을 펴냈다. 이 교본은 이남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 되기도 했다.

조선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잠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기고 있다. 1966년에는 문학신문에 <조선무용 동작과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했다.

1967년 그녀도 숙청(은퇴?) 당했고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으며, 그녀의 딸 안선희가 볼쇼이 발레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2003년 2월 조선은 최승희가 문인 한설야, 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이때 최승희의 묘비에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조선 신무용의 개척자였던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국제주의적 성향이 섞여 있다. 그녀는 장기공연과 지속된 순회공연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모음으로써, 당시 춤 작품의 유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과 함께 무대 위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강렬한 눈빛과 몸동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 북조선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는 최승희 춤꾼(편집인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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