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공원내에 복원된 교육기관 석천암에서 동학정신 가르치길 기원한다.

 

식민주의 역사관과 친일파 후손들이 많은

충북 보은군 동학공원내에 교육기관 석천암 준공

동학혁명군 마지막 항쟁지 피로 얼룩진 보은군

지역민들의 역사정신함양 보은동학북접이 담당

 

▲ 복원 준공식 뒤에 닫혀 있는 석천암

2019년 9월 20일 보은 동학공원 내에서 석천암 복원 준공식이 있었다. 2006년 석천암은 건물과 토지의 소유주가 원만한 합의를 보지 못한 결과 해체되었었다.

석천암은 경주 김씨 문중에서 자제교육을 위하여 만든 서당으로 1971년 백인말로 이전되었던 것이 다시 해체된 것이었다.

김정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 김씨 문중은 공부의 대상을 마을 아이들로 확대하여 지역배움터로 종곡초등학교가 건립되기 전까지 활용하였다.

석천암의 진정한 가치는 유명한 유학자 김정이 공부했던 장소가 아니라 지역배움터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석천암은 종곡초등학교 내에 복원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교육기관인 석천암이 왜 동학공원 내에 복원해야 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2001년 보은군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기획하고 보은에서 동학의 사적지로 의미가 있는 동학민회가 열렸던 장안리도 아니다.

또 약 2600명 동학군이 학살된 종곡리도 아닌 옆 마을 성족리에 동학공원을 완공하였다. 공원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국궁장도 함께 들어섰고 이제 석천암까지 들어왔다.

동학은 보은에서 어떤 의미인가? 동학은 조선사회가 무너져 갈 때 혁명의 차원을 넘어 인류사회가 사람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하늘사상으로 삶의 방향을 제시한 내외적 변화를 수반하는 개벽철학이었다.

1894년 계속된 패배로 동학군이 보은에 들어와 보니 장안은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이미 모두 불타 없어진 상태였고 지치고 굶주린 동학군들은 북실로 들어간다.

일본군과 관보군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날 밤 공격하여 새벽녘에야 전투가 끝난다. 2600여명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이 당시 유림을 중심으로 편성된 민보군은 고을에 한 두 명이었는데 보은 옥천 지방은 12명이나 되었다. 이는 보은이 양반사회의 세력이 강했으며 동시에 동학도의 세력도 강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장안을 불태운 이두항은 명성황후시해사건 살인집단의 중심에서 활약하였고 일본에 가서 피신하다가 1907년 귀국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인 전북 관찰사 겸 재판소판사로 엮임하고 1916년 사망하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정치가들은 역사서들을 불태우는 상황을 반복한다. 역사를 새로 각색하여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동학은 아직도 바로 읽고 재해석하기엔 부족하다. 일제 강점기를 걸쳐 식민사관이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 지배계층은 친일파의 후손들이 많고, 개인이 살고자 민보군으로 활동한 유림들은 여전히 지역의 유지들이며, 공동체가 무너진 마을의 개개인들은 돈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의 석천암이 우리의 현 모습이다. 우리는 잘못된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할 때는 진중하게 책임져야한다.

보은군수 이하 공무원, 군의원, 군민들은 바른 역사의식을 가졌는가? 잘못된 역사의식으로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시간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세금을 낭비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고 사전에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 충북 보은 종곡리에 있는 동학공원 안의 정자를 수리하기 위해 시설물을 설치해 놨다. 오른 쪽에 석천암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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