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원은 박씨왕조, 양정릉원은 석씨왕조, 대릉원은 김씨왕조의 왕족묘역이다.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⑯ 경주 신라왕족묘역 능원(陵園)에 대한 검토

신라는 3성(三性)왕조 국가이다. 박혁거세의 박씨왕조, 석탈해의 석씨왕조, 김알지의 김씨왕조이다. 천년수도 경주는 3성왕조의 세력기반이다. 당연히 3성왕조의 왕족묘역(능원)은 경주일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김씨왕조의 왕족묘역인 대릉원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박씨왕조와 석씨왕조의 왕족묘역은 알지 못한다.

 

▲ 경주 오릉. 박씨왕조의 왕족묘역 사릉원(蛇陵園) [출처:구글이미지]


박씨왕조 왕족묘역, 경주오릉 사릉원

경주 월성 남서쪽 탑정동에 크고 작은 고분 5개가 모여 있다. 오릉(五陵-5개 무덤)이다. [삼국유사]에 오릉의 유래가 나온다. 박혁거세의 시신을 ‘5체(五體)로 나누어 장사지내 오릉(五陵)이며, 또한 사릉(蛇陵)이라고 한다.(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박혁거세의 5체릉이 사릉인 셈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사릉(오릉)에 묻힌 사람이 박혁거세와 알영, 그리고 남해왕(2대), 유리왕(3대), 파사왕(5대) 등 5명으로 설명한다. 무덤 숫자 5개는 같으나,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단일무덤으로, [삼국사기]는 5명의 별개무덤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두 기록의 사실성은 떨어진다. 이유는 초기신라가 경주에 입성한 시기가 파사왕(5대) 때이기 때문이다. 서기전57년 경기 북부지역에서 건국된 박혁거세의 서라벌은 점차 남하하며 남해왕, 유리왕을 거쳐 파사왕 때인 서기94년 비로소 경주에 안착한다. 따라서 파사왕 이전의 박혁거세, 남해왕, 유리왕 등 3명은 경주에 묻힐 이유가 하등 없으며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오릉은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적도 없고, 또한 도굴당한 기록도 없다. 현재로서는 발굴조사하지 않는 한 무덤주인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참고로 신라초기 무덤양식은 움무덤(토광묘)으로 추정한다. 오릉의 외관은 원형봉토분(흙무덤)이다. 특히 대형의 원형봉토분은 4세기 이후 등장한다. 이런 까닭으로 오릉은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구조로 볼 수 없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경주시대 박씨왕조의 왕은 4명이다. 파사왕(5대), 지마왕(6대), 일성왕(7대), 아달라왕(8대) 등이다. 그런데 [신라사초](남당필사본) 기록을 보면, 사릉(오릉)에 묻힌 왕과 왕족이 다수 나온다. 왕은 파사왕, 지마왕, 일성왕 등 3명이며,(*아달라왕 무덤은 낭산(狼山)) 왕족은 파사왕의 왕비 아혜(阿惠-석씨), 어머니 아리(阿利), 형 일지(日知), 지마왕의 어머니 사성(史省-김씨), 아들 우옥(右玉), 일성왕의 왕비 애례(愛禮), 그리고 아달라왕(8대)의 어머니 지진내례(只珍內禮) 등 7명이다.

오릉은 박씨왕조의 왕족묘역인 사릉원(蛇陵園)이다. 다만 현존하는 무덤은 5개이나 주변 숲에서 추가적으로 발견될 개연성은 남아있다. 

참고로 [삼국유사]는 민간의 구전(口傳-박혁거세 5체릉)을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고, [삼국사기]는 신라역사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신라(서라벌)의 최초 건국지를 경주로 고정시키다보니, 경주입성 이전의 5명을 기록에 포함시킨 것이다.


석씨왕조 왕족묘역, 경주 쪽샘지구 양정릉원

경주시가지 서북방 표암(瓢巖-동천동)근처 소나무숲속에 무덤이 하나 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원형봉토분으로 신라후기에 조성된 돌방무덤(석실분)이다. 석탈해왕릉으로 알려진 표암무덤이다.

[삼국사기]는 석탈해를 ‘성의 북쪽 양정(壤井)의 언덕에 장사지냈다(葬城北壤井丘)‘고 기록한다. 양정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석씨왕조 왕들이 즉위이후 시조묘가 있는 양정을 찾아가 대제(大祭)를 올린 기록들이 [신라사초]에 일관되게 나오고 있어, 석탈해의 무덤이 양정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석탈해를 ’소천(䟽川)의 언덕 가운데(中)에 장사지냈다(葬䟽川丘中)‘고 기록한다. [삼국사기]의 양정과 [삼국유사]의 소천은 동일한 장소로 이해된다. 특히 [삼국유사]는 ‘소천 언덕 가운데’로 표기하여 석탈해왕릉 뿐 아니라 다른 무덤들의 존재도 시사한다.

덧붙여 [삼국유사]는 석탈해왕릉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전한다. 김씨왕조 문무왕(27대)이 680년 3월 보름날에 꿈속에서 석탈해를 만나고, 석탈해의 지시에 따라 소천의 석탈해왕릉에서 뼈를 수습하여 따로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다시 말해 문무왕이 석탈해왕릉을 없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석탈해왕릉으로 추정하는 표암무덤은 적잖은 결격사유가 있다. 우선 표암은 진한6촌의 하나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 소재한 곳으로 알천(閼川)집단의 집성촌이다. 알천집단은 표암봉에서 강림하는 신화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알천집단의 집성촌에 석탈해의 무덤을 썼다는 자체가 무리이다. 또한 표암무덤의 조성시기는 신라후기이다. 물론 문무왕이 석탈해왕릉을 없애면서 시신 없는 가묘를 따로 만들어 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시간상의 인과관계이지 공간상의 인과관계는 아니다. 표암무덤은 알천집단의 수장급 무덤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석씨왕조는 석탈해를 비롯하여 벌휴왕(9대), 내해왕, 조분왕, 첨해왕, 유례왕, 기림왕, 흘해왕(16대) 등이다. 왕이 8명이며, 왕족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상당하다. 당연히 석씨왕조만의 왕족묘역(능원)을 따로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삼국사기] 뿐 아니라 [신라사초] 역시 이들 석씨왕조의 무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경주 쪽샘지구 고분군. 석씨왕조의 왕족묘역 양정릉원(蛇陵園) [출처:구글이미지]

대릉원 우측에 쪽샘지구(황오리) 고분군이 있다. 대릉원의 고분크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수십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쪽샘지구 고분군은 신라무덤의 변천양식을 집약한다. 이사금시기의 덧널무덤(목곽분)과 마립간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이 중 덧널무덤은 석씨왕조시기에 조성된 무덤들이다.   

쪽샘은 우물물이 쪽빛을 띤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남천(藍泉)이다. 항상 우물물이 마르지 않고 넘쳐나는 곳으로 [삼국사기]의 양정(壤井)이며 또한 [삼국유사]의 소천(䟽川/䟽泉)이다. 쪽샘지구 행정명칭 황오리는 근처에 신라왕실터가 있어 고려때는 황촌(皇村)으로 불린 지역이다. 만약에 석씨왕조가 경주시내에 능원(왕족묘역)을 조성하였다면 쪽샘지구가 가장 유력하다. 마찬가지로 석탈해왕릉이 실존한다면 쪽샘지구 왕릉급 무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쪽샘지구 고분군은 석씨왕조의 왕족묘역인 양정릉원(壤井陵園)이다.


김씨왕조 왕족묘역, 경주 대릉원

경주 대릉원은 김씨왕조를 대표하는 왕족묘역이다. 대릉원 명칭은 ‘미추왕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王薨 葬大陵)’는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한다. 노서리, 노동리, 황남리 일대의 평지에 23개가 분포한다. 무덤양식은 신라 마립간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관총(1921년), 금령총, 식리총(1924년), 서봉총(1926년) 등을, 광복후에는 호우총(1946년), 마총(1953년), 쌍성총(1963년), 천마총, 황남대총(1936년) 등이 발굴조사된다. 신라유물을 대표하는 出자형 금관이 출토된 지역이다.

▲ 경주 대릉원. 김씨왕조의 왕족묘역 [출처:구글이미지]

마립간시대 김씨왕조 왕은 내물왕(17대), 실성왕(18대), 눌지왕(19대), 자비왕(20대), 소지왕(21대), 지증왕(22대) 등 6명이다. 대릉원은 왕과 왕족들이 무덤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무덤에서 무덤주인을 특정화할 수 있는 유물(예, 명문)이 나오지 않아 일부 추정만 할 뿐이다.

참고로 김씨왕조는 법흥왕(22대)때부터 마립간이 아닌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왕의 무덤에도 변화가 생긴다. 대릉원 평지에 조성된 대형무덤이 경주외곽의 야산이나 구릉지로 옮겨가 소형무덤으로 조성된다. 무덤양식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돌방무덤(석실분)으로 바뀐다. 김씨왕조 지배체제가 확고히 구축되고 국가시스템이 정비되면서 무덤주인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웅장함과 화려함보다 평범하고 간결한 실용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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