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나 승려의 비속어인 중은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에서 유래한다.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⑮ 백제인 출신 신라왕을 찾아서

[수서] 기록의 백제인 출신 신라왕은 남해왕   

[수서] 신라 전에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기록이 있다. ‘그 나라 왕은 본래 백제인 이다.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 왕이 되었다. 대대로 왕을 이어와 김진평(26대 진평왕)에 이르렀다.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傳祚至金真平)’ (※ [북사]에도 나옴)


[수서] 기록의 신뢰성 문제

[수서] 기록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근거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우리 문헌 어디에도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기록이 나오지 않는 점이다. 또한 초기신라의 왕통흐름으로 보아 백제인 출신이 신라왕이 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이 존재하지 않는 점도 근거로 꼽는다. 한마디로 초기신라왕 중에서 백제인 출신으로 추정할 만한 왕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수서(隋書)]는 7세기 초엽인 당태종(이세민) 때 편찬한 사서이다. 당태종의 명을 받은 장손무기, 위징 등이 전(前)왕조 수(隋)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이다. [수서]에 백제인 출신이 신라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게 된 사유를 추적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편찬자들이 과거의 어떤 기록을 참조한 경우이고, 또 하나는 신라인의 증언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백제는 앙숙관계로 백제 멸망을 앞 둔 시점이다. 따라서 당에 파견된 신라인이 자신의 옛 왕이 백제인 출신이라고 증언할리 만무하다. 당연히 [수서]의 편찬자는 과거의 어떤 기록을 참조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수서] 기록은 나름의 신뢰도를 갖는다.


남해왕 출신에 대한 의문

신라 2대왕은 남해왕이다. [삼국사기]는 남해왕을 박혁거세의 아들로 설정한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용의 출현’(반란)으로 보위에서 물러난다. ‘두 마리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더니 폭풍우가 심하게 불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두 마리 용은 박혁거세의 보위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승자용은 남해왕이며, 패자용은 진한낙랑으로 망명하며 남해왕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금성(쇠성)을 포위하기도 한다.  

특히 [삼국유사]는 남해왕이 박혁거세(*알영 포함)를 죽인 다음, 박혁거세 시신을 다섯 갈래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매장했다고 부연한다. 아무리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하지만, 박혁거세와 알영을 죽인 남해왕은 천하의 패륜아가 될 수밖에 없다. 같은 혈육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 경주 오릉. 박혁거세의 오체(五體)릉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박 씨 왕조의 왕족묘역인 사릉원(蛇陵園)이다. 출처 : 구글 이미지

그런데 [삼국사기]는 남해왕 출신에 대해 몇 가지 의심스러운 단서를 남긴다.

첫째는 칭원(稱元)의 표현이다.(繼父卽位 稱元) 일반적으로 칭원은 새 왕이 즉위하여 연호(年號)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이제 갓 건국한 초기신라가 칭원을 했다는 자체가 너무나 뜬금없다. 이는 남해왕이 박혁거세 왕호 ‘거서간(居西干)’을 버리고 ‘차차웅(次次雄)’ 왕호 사용을 일컫는다. 남해왕은 시조 박혁거세와 차별화를 꾀한다. 참고로 김대문(신라중기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차차웅은 ‘자충(慈充)’이며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남해왕은 정치지도자보다 제사장일 개연성이 크다. 참고로, 자충은 반절음(*앞글자 자음과 뒷글자 모음을 결합) 표기로 ‘ㅈ+ᅟᅮᆼ’인 ‘중’이다. 스님이나 승려의 비속어인 중은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에서 유래한다.

둘째는 남해왕을 박혁거세의 적자(嫡子)로 표기한다.(赫居世嫡子也) 원래 적자는 정실부인의 소생을 말하나 [삼국사기]의 적자는 그냥 뒤를 이은 적임자 정도를 의미한다. 통상 [삼국사기]가 후계자를 지정할 때는 직계혈통이면 태자(太子), 장자(長子)를 쓴다. 적자, 서자(庶子)의 표현은 아예 혈통자체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이다.

셋째는 남해왕의 고백이다. 남해왕은 ‘국인의 추대로 보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이다’(國人推戴 謬居於位)‘고 고백한다. [삼국사기] 스스로 남해왕이 박혁거세의 직계혈통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백제인 출신 신라왕은 남해왕

남해왕이 백제인 출신인 근거는 왕명에서 찾을 수 있다. 남해(南解)는 ‘남쪽으로 간 해(解)씨’를 가리킨다. 해씨는 백제왕족(*시조 해온조)의 고유 성씨이다. 참고로 남해왕의 왕비 이름은 ‘아루(阿婁-운제)’이다. 루(婁)는 백제초기 왕인 다루왕(2대), 기루왕(3대), 개루왕(4대)의 루(婁)와 같다. 개구리(蛙)를 지칭하는 말로 백제에서는 귀하게 쓰인 글자이다. 남해왕의 왕비 아루는 백제왕녀 출신이다.

[수서], [삼국사기] 기록의 단서들을 종합하면 남해왕의 실체는 이렇다. 남해왕은 백제 제사장 출신이다. 백제왕녀 아루와 연을 맺고, 이후 어떤 사연으로 백제에서 쫓겨난다. 또는 남해가 백제왕녀 아루와 눈이 맞아 제사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수서] 기록이 해도(海逃-‘바다로 도망가다’)로 표현한 점은 나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해는 반란에 버금가는 대역죄를 범하여 백제에서 축출된다. 여하히 이후 남해는 신라로 들어가고 정말로 반란을 일으켜 박혁거세와 알영을 죽이고 신라왕에 즉위한다.

참고로, 남해왕의 뒤를 이어 태자 유리왕(유례 또는 노례)이 즉위한다. 유리왕은 남해왕의 직계혈통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유리왕은 용의 출현과 함께 서북쪽에서 몰려온 소나기에 의해 보위에서 쫓겨난다.(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서북쪽의 소나기는 진한낙랑의 군사를 일컫는다. 남해왕에게 패해 진한낙랑으로 망명한 박혁거세의 직계후손이 다시금 되돌아와 백제계인 유리왕을 몰아내고 박씨왕조를 부활시킨다.

일찍이 C.W. 쎄람은 [낭만적인 고대사의 산책]을 통해, 역사는 민감함과 상상력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민감함이 발견의 씨앗이라면 상상력은 씨앗을 발아시키는 동력이다. 지금처럼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기]에 매몰되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비록 조각의 기록과 단서일지라도 합당한 조합을 통해 민감함을 찾고 또한 논리적 상상력을 펼친다면 얼마든지 우리 고대사의 ‘진실의 문’은 열릴 것이다.  

[수서] 기록의 백제인 출신 신라왕은 남해왕이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