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다민족 공동체의 산실, 천년역사를 만든 힘의 원천지다.

 

초기신라위치에 대하여 이병도, 천관우, 김성호 등 견해
신라도읍지 한강이북 경기북부지역 가능성 배제 못해
마한과 전쟁으로 신라남하차질, 파사왕 때 경주로 진입
경주신라는 여러 문화 융합의 다민족 공동체 성격 농후

 

▲ 서기전57년, 경기북부지역에서 출발한 박혁거세의 신라는 150여년의 기나긴 남하과정을 거쳐 파사왕 때인 94년, 드디어 천년수도 경주에 정착한다. 출처 : [신라역사의 명암] (2018,논형출판)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⑪ 신라 천년수도 경주의 오해와 진실

경주는 신라 천년역사의 중심지이다. 고구려는 홀승골성→위나암성→환도성→평앙성→국내성→평양으로, 백제는 위례성→웅진성→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며 역사의 부침을 겪는다.

그러나 신라는 오로지 경주 한 곳만을 고수한다. 물론 한때 수도 이전을 검토한 적은 있다.

한반도통합(*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31대) 때로 달구벌(대구) 천도를 추진하려다 경주귀족들의 반발로 그만 둔다. 그럼에도 신라가 천년역사를 일구면서 수도 이동을 하지 않았다는 자체는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하다.

그러나 초기도읍지로써의 경주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병도는 박혁거세의 초기신라(서라벌) 위치를 한강유역으로 비정한다. 근거는 [북사(北史)] 신라전 기록이다. ‘신라는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그 땅은 고구려 동남쪽에 있는데, 한(漢)대의 낙랑이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낙랑은 중국(秦/漢) 유민들의 한반도 망명지인 평안남도 일대를 가리킨다. 이 기록은 신라가 낙랑지역 주변에 존재한 사실을 증언한다. 같은 연장선에서 천관우는 한강중류지역을, 김성호는 항해도 남부지역을 각각 신라의 건국지로 이해한다.

박혁거세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삼국사기]는 거서간을 진한(辰韓)말로 ‘왕’이라고만 소개한다. 그러나 [소부도지](박제상 찬술)는 ‘거서간(居西干)’을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詰拒西方而防禦之長)’으로 설명한다. 또한 서방(西方)은 ‘서침(西侵)하여 거짓 도를 행하는 자(彼西侵而行詐道者)’로 규정한다.(#1[소부도지]기록) 서방은 낙랑지역의 중국(漢) 유민집단을 가리킨다. [소부도지] 기록 역시 박혁거세의 신라가 낙랑 주변지역에 위치한 사실을 증언한다. 이는 신라의 건국지가 한강이북의 경기북부지역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경주는 언제부터 신라의 수도가 되었을까?

파사왕(5대) 때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면, 파사왕은 94년(파사15년) 경주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한다. [삼국사기]가 기록한 최초의 군대사열이다. 이는 파사왕이 경주지역 세력집단을 병합한 사실을 설명한다. 군대사열은 신라가 경주의 새주인 된 사실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정치행사이다. 이어 파사왕은 101년(파사22년) 처음으로 경주 월성에 성을 쌓고 왕이 거주한다. 신라 월성 궁궐은 그렇게 탄생한다.

▲ 신라 천년역사의 상징, 경주 월성궁궐 복원도 출처 : 구글 이미지


초기신라의 남하과정이다.

서기전57년 경기북부지역에서 건국된 박혁거세 신라(서라벌)는 변한, 낙랑, 동옥저 등을 만난다.

변한은 ‘卞(성씨 변)’자를 쓰는 ‘변한(卞韓)’이다. 한강유역의 초기변한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치원이 ‘백제는 변한(卞韓)이다.(卞韓 百濟也)’라고 설명한 바로 그 변한이다. 이들 초기변한은 서기전39년 박혁거세의 공격을 받아 한강유역을 신라에 내주고 점차적으로 남하하여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다. ‘弁(고깔 변)’자를 쓰는 ‘변한(弁韓)’이다. 후기변한이다.

낙랑은 진한낙랑이다. 평안남도 낙랑지역에서 분리된 진(秦)의 유민집단 진한(秦韓)이다. 이들 진한낙랑은 경기도 중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한다. 한강유역의 박혁거세를 남쪽으로 밀어낸다. 참고로 박혁거세가 빠져나간 한강유역은 뒤늦게 건국한 백제의 온조세력이 차지한다. 하남위례성(경기광주)이다. 그러나 온조의 초기백제 역시 진한낙랑으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한다. 당시 진한낙랑은 신라와 백제보다 월등히 힘이 강하다. 참고로 동옥저는 함경남도 함흥지역의 세력으로 박혁거세집단의 한반도 유입경로와 관계가 깊다.  

진한낙랑에 밀린 박혁거세의 신라는 한강유역을 포기하고 점차로 남하한다. 이후 신라는 남해왕(2대), 유리왕(3대) 등을 거치며 지금의 충청북도 남부지역까지 밀려 내려온다.

이때 신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한다. 신라 나로왕(4대)은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집단인 충청남도지역의 마한을 만난다. 61년 마한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충북영동)을 신라에 바치고 자신도 망명한다. (※ 나로왕은 석탈해가 신라왕으로 편입되면서 왕력에서 빠짐) 이 사건으로 인해 신라와 백제는 처음으로 만난다. 당시 백제 다루왕(2대)은 마한의 요구에 따라 한강유역에서 낭자곡성(충북청주)까지 직접 내려와 나로왕에게 면담을 요청하며 ‘망명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나로왕은 면담을 거절하고 두 나라는 와산성(충북보은), 구양성(충북옥천) 등에서 격하게 싸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신라의 남하행로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 신라는 곡창지대인 서남부지방이 아닌 추풍령을 넘어 산악지대인 동남부지방으로 방향을 튼다. 당시 신라는 마한을 대적할 엄두도 못 낸다. 이후 신라는 경상북도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며 대가야(경북고령)를 만난다. 그리고 상주지역까지 지배영역을 확대하며, 파사왕 때에 경주세력마저 흡수한다.
     
그렇다면 경주세력은 어떤 집단일까?

석탈해의 사로국이다. 파사왕의 신라는 석탈해의 사로국을 병합(*연합)한다. 그래서 신라 왕력은 석씨시조 석탈해를 4대왕으로 편입한다. 이때 경주지명은 서라벌이 되고 신라국호는 사로가 된다. 참고로 신라국호는 크게 세 계통으로 나눈다. 박씨왕조의 서라(벌), 서벌, 서나와 석씨왕조의 사로, 사라, 그리고 김씨왕조의 계림 등이다.


결론적으로 경주는 박혁거세의 초기도읍지가 아니다. 박혁거세의 신라가 한반도에 뿌리 내리기 위해 온갖 역경을 물리치며 마지막으로 찾은 안식처(Shelter)이다.   

경주는 스펀지이며 용광로이다. 수많은 외부세력이 경주로 몰려든다. 박씨왕조는 건국초기 진한인, 낙랑인, 말갈인, 예인 등을, 석씨왕조는 왜인과 가야인을, 그리고 마지막 김씨왕조는 흉노와 선비족 출신을 받아들인다. 경주는 이들 외부세력을 배척하지 않고 모두 흡수한다. 그래서 경주는 스펀지이다. 또한 경주는 이들 외부세력의 서로 다른 이질적 문화를 모두 융합한다. 경주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몰아넣고 계속해서 담금질하여 신라만의 독특한 문화로 탈바꿈시킨다.

경주는 다민족 공동체의 산실이며 신라 천년역사를 만든 힘의 원천지이다.  

 

【참고기록】

#1 [小符都誌] 二十八章 … 六村之人 共扶養育 漸長 神氣秀明 有大人之度 十三世諸人推擧 爲居西干 居者据也 干者防也長也 卽詰拒西方而防禦之長之意 西方者 卽彼西侵而行詐道者也 … 6촌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령스러운 기운이 빼어나게 밝고 대인(大人)의 도(道)가 있었다. 13살에 여러 사람이 추천하여 거서간(居西干)이 되니, 거(居)는 거(据)요, 간(干)은 방(防)이요 장(長)이다. 즉 서방(西方)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御長)이라는 뜻이다. 서방(西方)은 즉 저들이 서침(西侵)하여 사도(邪道)를 행하는 자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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