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해상국가의 결정체로 여러부여계열 국가를 대표한다.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⑨ 백제 국호의 변천과정에 담긴 숨겨진 역사 

흔히 백제를 단일 국호로 이해한다. 이유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기록이 모두 백제로 통일해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의 국호는 시대상황에 따라 적잖이 변화한다.

백제 국호의 변천과정이다.

첫째는 십제(十濟)이다. ‘十(열 십)’자의 백제이다. 건국초기 만들어진 최초의 국호이다. [삼국사기] 건국(시조)신화에 나오는 내용으로, 시조 온조가 10명 신하의 도움을 받은 데서 유래한다.(#1[삼국사기]) 온조는 형 비류와 함께 고구려를 출발, 한반도 미추홀(충남아산)로 남하하여 백제를 공동 창업한다. 이후 온조는 마한으로부터 땅을 빌려 직산위례성(충남천안)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며 비류로부터 분가한다. 이때 온조의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10명의 신하이다. ‘十濟’는 신하들에 대한 보은(報恩)의 성격이 강한 국호이다. 참고로 온조는 이후 어머니 소서노의 죽음과 함께 다시금 직산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경기광주)으로 도읍을 옮기며 비로소 백제 ‘한성시대’를 개막한다.     

 

▲백제 건국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세력은  온조왕의 10명 신하이다.


둘째는 백제(伯濟)이다. ‘伯(맏/우두머리 백)’자의 백제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연맹체 54국 중의 하나이다. 이병도가 추정한 백제의 국호이다. 그러나 학계의 공식입장은 아니다.(#2[조선정사조선전역주]) 그런데 뜻밖에도 [고구려사략]에 온조가 국호를 ‘伯濟’로 바꾼 기록이 있다.(#3[고구려사략]) 다만 이 해는 온조가 부여출신 해루(解婁)를 우보(右輔-국무총리)에 임명한 해이다. 따라서 앞의 十濟의 ‘十’이 10명의 신하를 가리키듯, ‘伯’은 우보에 임명된 해루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伯濟이다.       
 

▲[고구려사략]은 온조가 국호를  伯濟로 변경한 사실을 명확히 기록한다. 변경년도는 해루가 대보에 임명된 해로 고구려 대무신왕 2년인 19년(온조왕37년)이다. [삼국사기]의 23년(온조왕41년)에 해당한다. 기년은 다소 차이가 난다.그럼에도 이병도의 추론적 해석이 이 부분만큼은 요행히 맞다. *출처 남당필사본


결국 十濟와 伯濟는 온조가 두 차례 도읍을 옮기면서 신하의 도움을 받았기에 만들어진 국호이다. 이는 온조의 초기백제 성립과정이 매우 불안정함을 반증한다. 다만 후자의 ‘伯’은 해루가 아닌 온조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해루를 전면에 내세워 신하들의 권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온조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면서 만든 국호일 수도 있다.     

셋째는 백제(百濟)이다. ‘百(일백 백)’자의 백제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국호이다. [삼국사기] 건국(시조)신화는 ‘백성낙종(百姓樂從)’ 즉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百姓)이 즐거이 따랐다.’는 이유로 百濟의 유래를 설명한다. 참고로 백성은 고려 때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더구나 기록대로라면 百濟가 앞의 十濟, 伯濟와 병행해서 썼다는 얘기가 된다. 앞위가 맞지 않는 논리적 모순이다. ‘百姓樂從’은 김부식이 시조역사를 정리하면서 개작한 내용이다. 말 그대로 정리된 기록이다. 

그렇다면 百濟의 국호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걸까?    

세 번째 시조 구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서부여를 창업한 (위)구태의 후손집단이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기존의 온조계열(해씨왕조)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구태계열(부여씨왕조)을 성립하면서 만든 국호이다. 중국사서는 ‘백가제해(百家濟海 - 100개의 가(家)가 바다를 건너왔다.)’의 줄임말로 유래를 설명한다.(#4[당회요]) 참고로 구태계열이 바다를 건너온 시기는 4세기초반이다. 이들은 한반도 서남부지방을 장악하고 있다가 4세기후반 광개토왕에게 깨져 대부분 일본열도로 망명한다. 에가미나미오의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의 주인공인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大倭)의 실질적인  건국주체세력이다. 만세일계 일본 천황가의 본류인 부여기마족이다. 한편 한반도에 잔류한 일부 세력은 아예 한성백제(온조계열)를 접수한다. 5세기초반 구태계열의 비유왕(20대)이다   
 
마지막으로 남부여(南夫餘)이다. 성왕(26대)의 백제이다.(#5[삼국사기]) 공식적으로 부여 계승을 천명하며 한반도에서의 부여제국 부활을 꿈꾼 성왕의 의지가 반영된 국호이다.

종합하면 백제는 시대상황에 따라 ‘十濟→伯濟→百濟→南夫餘’ 순으로 국호를 변경하며 700년 역사를 이어간다.

▲백제는 부여계 국가를 대표한다. 전반기는 동부여계(고구려)인 온조(비류)계열이 왕조를 이끌며, 후반기는 서부여계(부여기마족)인 구태계열이 왕조를 이끈다. 백제는 한반도 중앙을 장악하고 중국대륙, 한반도,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고대 동아시아 해상벨트를 지배한 위대한 제국이다.  *출처 [백제역사의 통곡](논형출판,2018)



참고로 매와 관련한 백제의 별칭이 있다. [제왕운기]의 응준(鷹隼)과(#6[제왕운기]) [삼국유사]의 응유(鷹遊)이다.(#7[삼국유사]) 매사냥은 백제인의 대표적인 습속이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는 백잔(百殘)으로 기록한다. 백잔은 광개토왕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특수한 역학관계를 반영한 비칭(卑稱)이다.       

백제의 국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한자는 ‘百濟’이다. ‘百’은 숫자 100을 가리키는 말로 ‘크다(大)’는 의미이며, ‘濟’는 바다를 건너다는 뜻으로 ‘물(水)’과 관계된다. 백제는 ‘큰 물’을 나타낸다. 특히 [백제서기]는 ‘백제는 대신수(大神水-큰 신령스러운 물)의 뜻이다. (百濟者大神水之義也)’하고, [백제왕기]는 ‘제(濟)는 제사에 쓰이는 물이고, 이를 국호로 사용한 것은 물가에 살았기 때문이다. 백(百)은 크다는 뜻이다.(濟者祭水也以濟爲號者居於水邊故也 百者大也)‘로 기록한다. 백제는 명실공이 ’대(大)해상국가‘의 결정체이다. 또한 중국사서 『한원』은 백제를 가리켜 ‘집부여지조(輯扶餘之曹)’로 설명한다. 부여의 여러 왕조국가를 하나로 묶은 것이 백제이다. 

결론적으로 백제에는 해상국가 뿐 아니라 부여를 통할하는 근원국가의 역사성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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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 신하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로 하였다.  

#2. [조선정사조선전역주]제1권 (국사편찬위원회,1987년). 사실 마한의 한 나라로서의 伯濟國과 삼국의 百濟가 동일한 실체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같은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들이 같다고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伯濟와 百濟가 음이 유사하고 또한 伯濟가 여러 소국을 합병하였기 때문에 百濟라고 이름을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것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3. [고구려사략]<대무신제기>. 二年己丑 十二月 … 溫祚改國號曰伯濟 以解婁爲太輔 婁解素之次子也 - 2년(19년)기축 12월, … 온조가 나라이름을 백제(伯濟)로 바꾸고 해루(解婁)를 태보로 삼았다. 해루는 해소(解素)의 둘째 아들이다. 
※ 참고로, 해소는 고구려 시조 추모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 금와왕(2대)에게 재가하여 낳은 아들이다.
                         
#4 [당회요]. 百濟本 夫餘之別種 當馬韓之故地 其後 有仇台者 高句麗所破 以百家濟因 號百濟 東北至新 - 백제는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 마한의 옛 지역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백가제해(百家濟海)하였는데 백제(百濟)의 국호는 이에 따른다. 동북쪽으로 가면 신라에 닿는다.

#5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十六年 春 移都於泗沘[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 16년(538년) 봄, 도읍을 사비(일명 소부리)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南扶餘)로 하였다. 

#6. [제왕운기]<백제기>. 後王或號南扶餘或稱鷹準 與羅鬪- 후대의 왕이 혹 남부여(南夫餘)라 부르기도 하고, 혹 응준(鷹準)이라 칭하며 신라와 겨루었네.  
※ 참고로, [네이버지식백과] 백제의 국호(두산백과)에는 ’或稱鷹準 與羅鬪‘를 붙여서 ’혹은 응준과 나투라 칭하기도 하였네.‘로 번역하여, 나투(羅鬪)를 또 하나의 백제 별칭으로 해석하나 이는 잘못이다.  

#7. [삼국유사]<탑상> 황룡사9층탑.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 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 또 우리나라 명현인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신라 제27대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다.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9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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