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위화도 회군은 우리를 반도로 가두고 중화패권시대를 열었다

글: 공관(동북중앙아시아연대의장)

 

일제의 끝없는 탐욕, 류조호사건으로 만주침략 재미 보더니

할인골 전쟁까지 도발했다가 괴멸,

정신못차리고 태평양 전쟁 도발, 패망 길 걸어

할힌골은 고려말 동북아 역사를 가르는 전투가 벌어진 곳

고려 공민왕 요양점령, 북원과 명 모두 우리강토임을 인정

나하추의 명나라 투항과 이성계 위화도회군반란으로

고려고토회복과 몽골의 재기 물거품, 명나라 시대 개막

 

▲고려말 서기1388년 북원군과 신생 명나라가 동몰골 할인골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쟁으로 북원은 대패를 한다. 동북아시아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모든 역사는 다른 색깔의 옷을 입은 현대사라고 이야기되어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말 속에는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다

- 에릭 홉스봄. (*1)

동몽골 부이르 노르 전쟁 615년 후인 2003년, 몽골정부는 같은 혈족인 ‘솔롱고스 고리 한겨레’와 한반도 넓이의 약 1.3배에 이르는, ‘동몽골 3개 아이막’을 ‘친생명적, 자족적 사회운영기제를 실현해나가는 선도 공생모델’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2)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다. 그렇다. 현재도 우리에게 던지는 역사/지정학적 과제/경험은 팔팔 살아서 진행 중이다.

20세기, 동아시아사를 넘어 세계사를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쟁이 있었다. 1939년의 동몽골 할힌골전쟁(일본명 노몬한전쟁)이다.

섬족속 왜국이 간땡이가 부어 바이칼 이동과 캄차카 반도까지 차지하고자 하는 대전략, 시베리아 출병(1918~1920)실패 후의 하산호전투(1938, 일명 장고봉전투)에 이은 두 번째 전쟁이었다.

왜국은 대전략을 숨기고 국경분쟁으로 위장했다. 할힌골전쟁에서 일본관동군은 러·몽연합군에게 괴멸적 패배를 맛보았다. 그로써 그들은 태평양으로 가는 남진정책을 택했다. 세계사의 대전선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동몽골 ‘할힌골전쟁’으로부터 551년 전인 1388년 4월, 같은 지역에서 몽골(북원)과 신생의 지나족 명나라 사이에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이 있었다.

‘부이르 노르전쟁“이다.(*‘노르’는 몽골어로 ‘호수’를 뜻한다) 이 전쟁이 있기까지 20년간(1368~1388), 고려·북원·명의 삼각구도에서 부여고토 만주를 둘러싼 상호 힘의 투사를 전편에 이어 다시 간략히 살펴본다.

제1국면. 1368~1370, 고려·북원·명 삼각구도, 요동의 문제.

1370년, 북몽골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유시리다라는 기황후의 아들이다. 그는 원의 잔여 세력을 통합해 다시 세력을 구축했다.…(그리고) 명을 압박하였다. 때문에 요동의 문제는 몽골의 남진과 명의 북진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3)

이 무렵까지만 해도 북원의 군사력은 강력했다. 고려가 한반도를 넘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북원은 카라코룸으로 귀환을 마쳤고, 신생국 명나라 군사가 미쳐 요동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때 고려가 요양성을 공략(1370년)하였다. 이때는 북원과 명나라 모두 고려의 부여고토 점유를 인정했다. 고려 또한 요양과 심양 지역이 고토임을 내세우며 주민들을 초무하였다. (*4)

제2국면. 1371년, 유익의 요양13주 명에 귀부

1371년, 요양평장사 유익이 요양13주를 가지고 고려에 귀부하려 하였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고려가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요양의 지도와 정보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5) 당시의 상황에서는 요양13주는 매우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유익의 명나라 투항은 고려·북원·명 3각 구도에 결정적 변곡점을 제공하게 된다.

“이로써 명은 요동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6)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는 고려의 요양·심양 진출을 무효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몽골이 가진 요동에의 거점을 상실케 하였다. 그 17년 후인 1388년, 부여고토가 명나라에 귀속되는 단초를 열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제3국면. 1372-1384, 명의 수세와 몽골의 공세.

1372년, 유익의 투항으로 요동의 정세를 파악한 명은 15만 대군을 북원의 왕정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시켰다. 하지만 몽골의 명장 쾨쾨 테무르의 전술에 휘말려 톨강에서 궤멸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톨강의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승승장구하던 기세가 꺾였다.”(*7)

'톨강 전투'의 패배로 전국戰局은 역전되었다. 명은 그 후 10년간 수세적 장기전으로 대처했다. 그 전략의 첫 번째는 요동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무칼리 국왕의 자손 나하추의 명나라 편입이었다.

두 번째는 고려가 북원과 결맹하지 못하도록 초무하는 것이었다. 명은 공갈과 회유의 외교책략을 구사했다. 고려에 대량의 군마軍馬 공납 등을 요구했다. 군사력의 무력화였다.

제4국면. 1384-1387, 명의 요동 장악.

1384년, 명나라는 몽골과 고려를 연결하는 중간고리였던 여진부락을 공격, 몽골과 고려를 연결하는 고리를 끊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나하추는 고립되었다.

1387년 명군은 북만주에 진군하여 나하추가 이끄는 20여 만의 원군元軍을 투항시켰다. (*8) 나가추의 투항은 고려·북원·명의 삼각구도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그의 투항으로 고려↔요동↔몽골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몽골의 왼쪽 날개를 잘라버린 것이다.

그로써 전략요충지 요동은 명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한나라 무제가 흉노의 좌익 왼팔인 고조선을 누른 것(BC 108년)과 같다.

제5국면. 1388년, 부이르노르 전쟁 결과

나하추의 명나라 투항이 북원에 준 충격은 컸다. 1387년 북원의 황제 토쿠스 테무르는 왕정을 카라코룸에서 동몽골 부이르 호수변(할하 강)으로 옮겼다.

요동의 재진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의도였다. 징기스칸의 발주나 맹약을 되새기는 결연한 행위였다. 믿는 세력이 있었다. 고려였다.

고려와 연합하여 명군을 협공하는 전략이었다. 고려가 압록강을 넘어 명군의 요동 옆구리를 치는, 그러한 출병을 기다렸다. 그러나 고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9)

그 사실을 알아버린 명나라는 1388년 3월 지금의 천진 부근(薊州)에서 카라코룸을 향해 15만의 군사를 출병했다. 시라무렌강 상류인 경주에서 몽골 왕정 이궁처를 알았다.

명군은 대싱안령 산맥 서록의 편벽한 길로 삼천리 이상을 쾌속진군 했다. 무인지경이었다.

4월에 부이르 노르에 주둔하고 있던 북원군을 큰 모래바람과 함께 급습했다. 무방비 상태였던 토구스 테무르의 전군은 궤멸 되었다. 허무한 패배였다. (*10)

3대 북원 왕조의 중원회복의 꿈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 후 몽골은 20년간 명나라에 대항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고려가 출병했다면 동방의 우치긴 왕가와 나하추의 군사가 여·몽 연합군에 합류할 공산이 컸다.

아니 고려가 출병하긴 했다. 그것마저 한두 달이 늦었다. 그해 5월 압록강 위화도까지 진군한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우며 급히 회군했다. 쿠데타였다.

부이르노르전쟁으로 고려와 북원의 쿠빌라이 왕가는 몰락했다. 북원은 아리크. 부가가家의 예스테르가 후비라이가家를 대신해서 몽골 칸 위에 올랐다.

1264년에 아리크·부가가 후비라이에게 항복한 이래 124년 후의 일이다. (*11) 한반도에서는 왕조의 교체로 이어졌다.

쪼끔은 부여고토 회복의 꿈이 남아있었던 474년간의 고려왕조는 원나라와 함께 망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조를 창업했다.

친명문명사대親明文明事大의 편승전략이 500년간 이어졌다. 아니 지금도 우리의 의식/무의식 속에 큰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자주적 견지에서 한반도 밖을 웅시雄視하면 별종취급이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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