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열국병합원천은 추모왕의 혈통 및 열국도 고구려처럼 부여계통이었기 때문이다.


【정재수 작가의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역사시평】
④ 추모왕의 고구려, 북부여 열국(列國)을 병합하다.

 

고대에 혈통 아닌 능력으로 공동체 수장되는 방법은 활쏘기
추모왕과 송양왕 서로 활쏘기로 나라 통합여부 가려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을 비롯한 노로아호산(奴魯兒虎山)은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산’의 뜻
현재 요녕성 요양은 단군의 왕검성, 최리 낙랑국, 고구려 평양성

 

▲ 추모왕은 북부여 계승을 앞세우고 옛 북부여 연맹체인 열국을 하나하나 병합한다. 초기고구려가 영토 확장에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추모왕의 혈통이 배경이다.

 초기고구려 영토 확장, 시조 추모왕의 혈통이 배경
서기전37년, 추모왕은 소서노와 정략결혼을 성사시키며 홀본국을 모체로 고구려를 건국한다. 당시 대륙 동북방은 북부여의 열국(列國-many nations) 시대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서울특별시인 홀본국(홀본부여)을 중심으로 각 도에 해당하는 여러 소국이 주변일대에 퍼져있다. 이들 열국은 모두 옛 북부여의 연맹체이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추모왕) 편을 보면,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3개 열국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 열국은 추모왕이 직접 군사를 보내 정벌한다.

무슨 이유 일까?

첫째 비류국(沸流國)이다. 고구려 북동쪽에 인접한 지금의 요녕성 흑산현(黑山縣) 북쪽지역에 소재한다.

당시 왕은 송양(松讓)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추모왕은 고구려 건국 직후 송양왕을 찾아간다. 송양왕은 일찍이 군자(君子)를 만난 적이 없다며 추모왕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에 추모왕은 천제(天帝-북부여 왕호)의 아들임을 밝히고 비류국이 고구려의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두 사람은 활쏘기로 승부를 가린다.(#1)

추모왕은 서기전36년(추모2) 송양왕이 항복해 오자, 그 땅에 다물도(多勿都)를 설치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송양왕이 처음 언급한 군자(君子)의 실체이다. 일반적으로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의 군자는 ‘단군의 아들(자손)’을 지칭한다.

[고구려사략]은 이때 송양왕이 ‘선족(仙族-선인왕검 의 후손)’을 칭했다고 기록한다.(#2) 다시 말해 추모왕은 비류국 송양왕과 단군조선(고조선) 계승의 혈통문제를 놓고 다툰 것이다.

둘째 행인국(荇人國)이다. 추모왕은 서기전32년(추모6)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행인국을 정벌한다.

행인국은 고구려의 북서쪽인 지금의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赤峰)을 포함하는 노로아호산(奴魯兒虎山) 주변일대에 소재한다.

노로아호산은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산’의 뜻이다. 이는 단군왕검의 탄생신화에 나오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를 연상시킨다.

이 일대는 우리 민족의 시원지이다. 특히 적봉지역은 요하문명의 상징인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다. 참고로 [유기추모경]에 당시 행인국 왕의 이름이 나온다.

해존(解存)과 해문(解文)이다. 둘 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와 성씨가 같다. 또한 왕호는 ‘천제(天帝-북부여 왕호)’를 쓴다. 행인국은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에 해모수의 직계후손이 세운 나라이다.

뒤늦게 북부여 계승을 기치로 건국한 추모왕의 고구려로서는 행인국 존재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결국 추모왕의 행인국 정벌은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재확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셋째 북옥저(北沃沮)이다. 추모왕은 서기전28년(추모10)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벌한다. 북옥저는 지금의 요하 동북쪽의 요녕성 심양(瀋陽), 철령(鐵嶺) 일대에 소재한다.

다만 당시 북옥저가 국가체제를 갖춘 집단인지는 확실치 않다. 참고로 추모왕은 동부여(길림성 길림)를 탈출하여 홀본국으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갈을 만난다. 북옥저는 말갈집단과 관계가 깊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배경이 되는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이 아닌 대륙 동북방 요하동쪽 남옥저 땅에 소재한 전기낙랑국이다. 참고로 후기낙랑국은 전기낙랑국 멸망이후 280년이 지나서 한반도 평양에 다시 출현한다. 이때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미천왕(15대) 시기이다. 후기낙랑국은 313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당시 왕의 이름은 자술(子述)이다. (사진 : 창작오페라 자명고 포스터)

    
그렇다면 열국은 앞의 3개 소국 말고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고구려사략]에는 개마국, 구다국, 낙랑국, 비리국, 섭라국, 환나국, 황룡국(*가다다 순) 등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 고구려(홀본국)를 중심으로 한 주변 열국이다.

추모왕은 이들과 혼인 또는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영토를 넓힌다.

이들 열국은 대부분 추모왕시기에 병합되나, 일부는 계속해서 독립 체제를 유지하며 대무신왕(3대)때에 이르러 개마국과 구다국을 마지막으로 모두 고구려에 흡수된다.(#3기록)        

이 중 낙랑국은 남옥저 땅인 지금의 요하 동쪽 요녕성 요양(遼陽)일대에 소재한다. 요양은 [삼국사기]가 ‘선인왕검이 살던 집(仙人王儉之宅)’으로 소개한 옛 고조선의 수도 평양(왕검성)이며, 훗날 동천왕(11대)이 천도한 평양성이다.(#4기록)

당시 낙랑국 왕은 시길(柴吉)이다. 참고로 시길의 낙랑국은 대무신왕(3대) 때인 32년(대무신15)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배경이 되는 최리(崔理)의 낙랑국이다.

[고구려사략]은 이때에 이르러 낙랑국이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았다.(樂浪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고 기록한다.(#5기록)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시기 열국 중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다. 한반도 북쪽지방에는 평북지역의 황룡국, 함북지역(*개마고원 개마국에서 유래)의 개마국, 함남지역(백두산 남쪽)의 행인국, 동해 북쪽연안의 동옥저 등이다. 또한 한반도 남쪽지방에는 전북지역의 비리국이 있다.

결론적으로 추모왕의 초기고구려가 비교적 손쉽게 영토를 확장하며 급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열국이 모두 북부여의 연맹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열국은 북부여 계승을 천명한 신생국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물론 고구려가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추모왕의 혈통이다.

▲ [삼국지]<위서> 한(韓)전에 한반도 서쪽지방의 마한 연맹체 54개 소국이 나온다. 이 중에는 ‘비리(卑離)’의 이름을 가진 소국들이 있다. 비리국, 여래비리국, 내비리국, 벽비리국, 고비리국, 초산도비리국, 모로비리국, 감해비리국 등 8개이다. 감해비리국을 제외하고 7개 비리국의 소재지는 모두 전북지역이다. 한반도 비리국들이다. 이들의 기원은 대륙의 비리국이다. 북부여 연맹체가 해체된 서기전 1세기를 전후하여 하나 둘 한반도로 건너와 전북지역을 장악하고 마한의 비리국들로 거듭난다.


#1. [三國史記] 始祖 東明聖王.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 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2. [高句麗史略] 始祖 芻牟大帝紀. 東明元年(前37年) 甲申 … 五月 訪松讓于沸流 以德義曉之 妄稱仙族而不屈 遂奪其珍宝妻子而來  

#3. [三國史記] 大武神王. 九年(26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母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4. [三國史記] 東川王. 二十一年(247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5. [高句麗史略] 大武神帝紀. 二十年(47年) 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崔理北走南沃沮. 二十七年(54年) 甲寅 四月 好童太子将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 與理女交好 其女為之破鼓角 而迎王師大軍 自沃沮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皈 以其地為竹岺郡 樂浪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 (*[三國史記] 大武神王 十五年(3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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