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골은 유목제국 발원지이며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몇 안 되는 중핵지역이다.

 

 

글: 공관(동북중앙아시아연대의장)

동몽골 유목하기에 적합한 환경

기마군사가 될 환경으로 역동성 유지

서로는 초원 곧 바로 동유럽으로 질주가능

대흥안령 산맥 초원지대 선비족 반농반목

동몽골 유목제국 <신지비사> 3경체제 유지

 

▲동몽골초원에 있는 요나라 거란 때 불교탑

■동몽골 지역의 개관

‘동몽골’이라는 지역/공간의 범위와 의미/정의는 역사적 시대마다 달랐다. 흉노의 5경(五京) 때는 좌곡려왕, 몽골제국 3경 때는 좌현왕左賢王의 영역이었다.

중앙유라시아에 터 잡은 민족은 지역과 국가의 틀을 넘는 다多부족/다민족/다중심의 초민족 공동체metaethnic community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 대지의 풍수(산세와 지세)가 워낙 대판도가 되기에 그러하다.

그곳 길지(吉地)에 자리 잡은 부족/민족은 어떤 계기로 ‘아사비야Asabiyyah’ (*1)가 형성되면 질풍노도처럼 일어나고 구름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 중앙의 지배세력은 광역의 여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수도를 여러 곳에 둔다.

예컨대 3개 대륙에 걸쳐 광대한 판도를 장악했던 아케메네스(B.C. 559~B.C. 330)의 페르시아 제국이 그랬다. 여러 개의 수도를 두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복수의 ‘왕권의 소재지’를 갖고 있었고 일시적이라고 해도 머무르고 주둔한 곳이 이른바 ‘수도’였다.”

또한 광역을 다스리기 위해 “전지역을 20주로 구분해서 총독을 통해 통치하는 유명한 분할위임 방식을 사용”했는가 하면, 하이웨이라 불리는 “‘왕의 길’ 간선도로와 역참의 정비하고 통일 도량형의 시행을 시행했으며, 금은화폐를 주조하고, 정부주도로 통상 교역을 활성화했다”.(*2)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광역의 초민족공동체 체제의 전범을 보여준다.

한참 뒤긴 하지만, 동쪽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 가지다. 흉노나 몽골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5경五京을 두었던 발해나 걸안(요)의 사시날발四時捺鉢 제도와도 닮았다. 그것이 유라시아 제국의 자연스런 생존의 지정전략이다.

▲북방 초원 유목제국 분포도.흉노에서 부터 선비족 까지 동몽골 훌룬부이르 초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계사적으로 본 동몽골

몽골고원은 유라시아 전체와 연계되어 있다. 역사/지리적으로 그기에 포함되는 동몽골이라는 지역공간도 그렇다.

유라시아의 기마유목민족의 활동시발의 한 무대이면서도, 수렵·어로·반농의 정주민들과 교차/경계선에 위치해 있었다.

다안령산맥과 한티산맥의 부족들이 어쩌다 동몽골 훌룬부이르·시린구오레 초원에 이르면 유목민족으로 바뀐다. 그곳의 생존환경이 유목하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레 기마군사가 된다. 그리고 달린다. 그러므로 광역의 중앙유라시아라 초원지대(steppe)와 이어진다. 한 지역의 지리/장소는 다른 지역과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동몽골은 역동적 지리공간이다.

예컨대,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군단이 부르칸산不咸山의 한티산맥 동쪽 자락, 훌룬·보이르 초원에서 서쪽을 향해 말을 달린다. 알타이 산맥을 넘어도 일망무제의 평원이다.

카자흐스탄 초원을 지나면 바로 러시아 헝가리 평원에 닿는다. 동서 이만리, 8천 킬로미터이다.

알타이 산맥의 북서쪽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쪽으로도 큰 장애되는 산맥과 지형이 없다. 바로 이란고원과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른다. 남북 일만리다.

또 한 예로, 징기스칸의 몽골시대 천여 년 이전, 다싱안령 대백산大白山아래 우리 겨레와 친연관계가 있는 수렵과 어로, 반농의 선비족이 있었다. 그 한 갈래인 탁발부가 어떤 연유로 가이샨동굴嘎仙洞 부근을 떠나 서남쪽으로 간다.

그리고 훌룬부이르 초원 동몽골에 이른다. 본격적인 유목기마로 바뀐다. 남쪽으로 내려가 지나의 황하 중원을 차지한다. 그리고 남조 송과 경계했다.

역사에서 평등(均田制)과 포용(太和改新)으로 상징되는 북조 북위北魏(386∼534)다. 북위에서 수. 당이 나온다. 북방민족에 의한 중원의 통일제국의 탄생이다.

▲게르로 알려진 천막생활을 하면서 이동하며 목축을 하는 동몽골 현지 주민

■‘신지비사’의 ‘3경’과 역사/지리적 동몽골의 정의

흉노를 비롯해 다중심의 초민족 공동체였던 중앙기마민족은 우리 고래의 3경三京의 지정전략(*3)이 계승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사 김위제전’ 『신지비사神誌秘詞』(4) 50자 속에 천행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비장의 ‘3경三京의 생존지정학’과 ‘균평均平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나중 따로 게시해 볼까 한다.

1).흉노의 행정 군사 조직은 대선우 왕정을 중심으로 우부와 좌부로 구성되었다. 대선우정이 있는 중앙부는 대선우單于의 직할령인 사얀·바이칼을 포함한 몽골고원의 중심부로 짐작된다.

우부의 우현왕·우곡려왕의 관할지는 알타이 산맥의 동쪽과 남쪽인 기련산맥, 그리고 좌부의 좌현왕·좌곡려왕의 영역은 아무르 강 남쪽의 다·소싱안령大·小興安嶺산맥의 동서강역이다.

흉노시대에는 그 좌현·곡려왕 관할지가 동몽골에 해당했다. 고조선(*5). 부여(*6)를 비롯해 훌룬부이르·송눈평원(*7)에 자리했던 우리 겨레의 고토가 몽골고원에서 볼 때, 동쪽에 있는 왼쪽 팔(左臂), 즉 ‘동몽골’에 해당한다.

2).이재성은 『고대 동몽고사연구.1996』에서 “중국 내몽고자치구의 다싱안령산맥 남방의 동몽고, 그중에서도 지금의 시라무렌Sira-Muren, 노합하老哈河 그리고 난하灤河 상류인 민전하閃電河(舊 上都河)유역은 원래 유목민의 주목지駐牧地로써 이전부터 널리 알려진 바이다”라면서, “원래 동몽고 지역은 북아시아의 유목민족과 화북의 농경민족의 생활권이 서로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그 남북에서 생성된 정치적 세력이 강대해지면 그 침입을 받기도 하고 정복되기도 하였고, 동시에 남‧북 2세력의 격렬한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라고 했다.(*8)

3).“15세기 칭기스칸의 직계인 다얀 칸이 동몽골을 통일하고 오이라트를 토벌하였다. 그는 동몽골을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좌익에는 차하르, 할하, 우량칸兀良哈(오랑케)로, 우익에는 오르도스, 투메트, 융시예부의 3투멘으로 개편했다.” (*9)

그 후 청조가 멸망하기까지 동몽골 지역을 지칭하는 것은 대강 그 기준에 따랐다. 따라서 고대에는 동몽골의 영역이 훌룬·부이르 두 호수의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시라무렌강의 남쪽의 요서와 요동에서 백두산의 북쪽의 송하강 하류 유역 전체를 아우르기도 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강역 대부분이 동몽골에 해당한다.

4).몽골사 전문인 이평래는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알타이 산맥을 기준으로 하여 그 서쪽을 서몽골(오이라트), 동쪽을 동몽골이라 불렸다”라고 했다. (*10)

▲ 동몽골 도르놋드 아니막 초이발산 시 입구 조형물.

■ 동몽골을 기반으로 해서 흥기 했던 민족과/제국

북동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민족과 국가는 모두 몽골고원을 기반으로 해서 흥기했다. 그중에서도 동몽골 훌룬보이르 초원은 북방유목민족의 강보襁褓였다.

우리 겨레의 혈반과 고토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부여,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키즈, 거란, 금, 몽골, 후금의 청제국까지 모두 그곳을 차지함으로서 세력을 뻗어 나갔다.

동몽골 훌룬부이르 초원은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몇 안 되는 중핵지역이다. 이 요소要所를 차지하는 자가 동유라시아를 넘어 헝가리 폴란드 평원까지 닿는다.

고전지정학에서 말하는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라 할 때의 그 시작의 하나가 동몽골이다. 지리란 묘해서 지정학적 단층선에서 중요한 세기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 전략적 요충지를 누가 차지냐가 그 전환국세의 주인공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지정학적 요충지는 그 시대의 국세局勢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상당기간 영향을 미친다.

15세기 해양개척 시대가 개막되기 전, 기동성을 갖춘 병기인 다량을 말을 대단위로 기를 수 있는 곳은 동몽골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좁은 의미의 훌룬·부이르 초원이다.

해발 700~600미터의 토지는 의외로 비옥하다. 이곳은 세계4대초원 중의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우량한 초원이라 불린다.

그곳에 서면, 작게는 동쪽으로 대싱안령 송눈평원을 아우르며, 동해, 태평양의 판국이 되어 지나 중원을 굽이 보며, 크게는 서쪽으로 알타이 산맥을 넘어 카자흐 초원을 지나, 헝가리 평원을 웅시雄視하게 된다.

21세기가 된 지금, 기마군단을 이끌고 유라시아 전체를 호령했던 칭기스 칸 제국의 웅역雄域은 어디가고, 그가 처음 몽골고원을 통일했던 영역만이 남았다.

그에 속했던 동몽골도 많은 부분이 지나족의 지배에 들어가 있다. 그가 군사적 운(運)의 최저점에서 19명의 아홉 부족 출신과 진흙탕의 호수 물을 마셨던, ‘발주나 맹약’(*11)의 조그만 영역으로 다시 돌아 왔다. 그때처럼 위태롭다.

지금 중앙유라시아 대륙 동녘에는 고리/몽골족으로는 한반도의 남·북한과 북몽골이 독립국가 형태로 살아남아 있다.

현재 우리 겨레의 지리/공간 인식 수준은 한반도만으로 한정지우면서 남북의 문제만 해도 벅차해 한다. 그래서 부여 고토 송눈(松嫩)평원은 꿈도 꿀 수 없다. 하지만 고도의 전략적 포석으로 동몽골과 연계되었을 때 그 파급은 크다.

재진적(災盡的) 남북 관계를 넘어 압록·두만강 서쪽과 북쪽의 우리 고토는 시간과 함께 저절로 고리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만리 갈녘의 광역과도 연계된다.

이것이 간접우회, 성동격서, 전략으로 속화된 간화선의 화두전략이다. 동몽골은 지금도 지정학적으로 역동적인 대지다. 다시 우리에게 다가 와 있다.

▲동몽골 초원에서 유목하는 현지 주민과 필자(오른쪽)

 

참고

(*1:피터 터친 『제국의 탄생』 윤길순 옮김, 서울. 웅진지식하우스,2011. 17쪽,

14세기 아라비아 사상가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 걸작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에서 ‘아사비야Asabiyyah'라는 언설을 사용. “아사비야는 사회집단이 (연대와 결속을 통해)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아사비야는 역동적인 양이다.”

(*2:『유목민이 본 세계사』 杉山正明 스기야마 마사아키, 이경덕 역, 가디언, 2013. 125쪽)

(*3):『개정판 단재 신채호 전집 上』 「朝鮮上古文化史」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95. 400~405쪽 참조.)

(*4:『고려사 高麗史 金謂磾傳』 卷一百二十二 > 列傳 卷第三十五 > 方技

(*5:『漢書』 卷七十三 <韋賢傳> 第四十三: 東伐朝鮮,起玄菟、樂浪,以斷匈奴之左臂」)

(*『世界の 歷史 6 隋唐帝國と古代朝鮮』1997. 東京. 中央公論社, 265쪽)

(*6: 王充, 『論衡』 吉驗:北夷橐離國)

*范恩實 『夫余興亡史』,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3. 4,7쪽)

(*7: 呼倫貝爾·松嫩平原, 공관; 지나가 강점하고 있는 달라이호(그들은 훌룬호(呼倫湖)호 부른다)와 북몽골의 부이르 호수 주변의 초원+대소싱안령 사이에서 흘러 백두산에서 발원해 아무르강에 합하는 눈강과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

(*8:李在成 『古代 東蒙古史硏究』 법인문화사, 1996. 서론, 10~14쪽)

(*9:고마츠 히사오 외 『중앙아시아의 역사』이평래 역, 서울. 소나무, 2005, 285쪽)

(*10:상동, 285쪽, 역주:4 )

(*11:『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저, 정영목 역, 사계절, 2005. 113쪽)

 

2019. 현충일, 서울 인릉산 아래. 빈집에서 공관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