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학살은 처음부터 준비된 전두환일당의 천인공로할 만행이었다.

글: Edward Lee(자유기고가, 미국거주)

 

그 때 잡혀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심한 구타와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청력을 많이 손상해 잘 듣지 못하고

가슴이 결려 팔굽혀펴기를 못해

당시 광주 인구 60만 중 1/4을 죽여도 좋다는 명령이

전두환으로부터 떨어졌다는 사실 소문 흉흉

산업시설 전무한 광주,  눈에 가시 김대중이 전라도

5.18광주학살에 잘 들어 맞아 처음부터 기획돼

 

▲ 서기1980.5. 남한에서는 또 다시 외세와 합세한 불의한 세력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학살했다. 동학농민군 학살, 제주43민중항쟁 학살, 여순봉기시민 학살, 419봉기 시민학생 학살에 이은 것이다. 5.18 당시 시민들은 정국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전두환 반란군이 정국을 장악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화 요구를 폭압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두환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두환을 찢어 죽여라', '살인마 전두환' 이 라는 구호가 이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편집자 주

또다시 그 날이다. 며칠 전부터 몸이 먼저 반응함을 애써 외면해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물음 앞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렀음에도 여전히 눈물은 뜨겁고 가슴은 아프게 비명을 지른다. 어둠 속에서 차마 절규도 하지 못한 억눌린 신음소리다.

어떻게든 나는 이 고개를 또 넘어가겠지. 울든 구르든, 토해내든. 혹은 빈 하늘을 보며 눈물을 삼키고 외면하든. 그저 미안하다.

살아있다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던 그 시절,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반갑기보다는 부끄러워 죽고 싶었던 때였다. 아니 볼 수 없어 서로 피하던 회색빛 시절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살아있어야 할 친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죽어야 할 우리들만이 살아서 좀비처럼 배회하던 시절, 삶은 곧 긴~긴 형벌이었다.

그 시간이 또 오고 있어서 아프다. 여전히 실체적 진실은 숨어있고, 무서운 학살자들이 거리를 휩쓸며 역사를 목 졸라 죽이는 이 비열한 거리에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아는 5월, 그것은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역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역사라는 것 또한 기술자의 편에서, 혹은 그것이 살아남은 자나, 승리한 자의 입장에서의 기록물이라면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래서 역사학자들마저도 기실은 역사를 죄다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내가 아는 5월은 청년들이 붉은 꽃잎으로 산화한 시간이다. 그 꽃이 해마다 피어 오늘에 이른 민주사회가 있고 우리 모두는 채무자이다.

그 날, 그러니까 5월 18일을 하루 앞둔 17일. 어느 누가 5.18을 상상이나 했을까 마는 장기판 위에선 피의 지도가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어깨동무를 함께하고 현장에 있었던 한 청년으로서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당시에 수 만 명의 가두 행진이 있었고, 길거리 포장마차의 아주머니들께서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음식을 제공해 주며 학생들을 독려하던 ‘평화적’ 시위였다.

5.17일 폭풍전야. 이 날은 서울의 총학생회가 모두 참여해 서울의 신문방송사를 장악하기로 결의한 날이다. 당시는 언론 미디어 매체를 신군부가 장악, 모든 기사를 검열하던 시기다.

그래서 학생들은 밤새도록 등사기를 밀어 대자보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주로 했다. 그래서 여론을 왜곡하는 나팔수 언론 미디어를 장악하는 일은 실로 주요한 임무였다.

그런데 결전의 날 새벽, 무자비한 진압군이 들이닥쳐 총학생회 간부들 모두가 연행되었고 이후 소식이 없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에 우리가 접한 소식은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컨테이너에 실려가 묻혀버렸다는 것 까지다. 이 엄청난 사태엔 학생회에 심어놓은 간자들이 있다.

정국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1979년 10월 박정희 유신 체제에 대항해 촉발된 부마항쟁으로 시위가 대학가마다 들불처럼 번지던 때라 신 군부 측에선 어떤 명분이 필요했다.

그것이 철저하게 기획된 5.18이다. 산업시설이 즐비한 영남지방이나 수도 서울을 타깃으로 한다면 한마디로 우리 경제가 ‘올 스톱’하게 되는 일이라 광주는 여러 이유로 너무나 적절한 곳이었다.

산업시설이 전무한 데다 김대중이라는 정치적 제거 대상의 본류로 이만한 곳이 없던 터였다. 광주 인구 60만, 1/4을 죽여도 좋다는 명령이 전두환으로부터 떨어졌다는 게 당시의 흉흉한 소문이었다.

그 때 잡혀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심한 구타와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청력을 많이 손상해 잘 듣지 못하고 가슴이 결려 팔굽혀펴기를 못한다.

평생의 정신내상으로 작용해 나는 여전히 박정희, 전두환 사진을 보면 몸이 경련을 일으켜 무의식적으로 피한다.

아직도 실체적 진실이 규명되지 않고 학살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 정의란 빈 구호일 뿐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세울 수 없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회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늘 반복하지만 민주주의란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협치나 국민통합은 잘잘못을 판단한 후에 그 기반(정의) 위에 세워야 옳다. 국민적 합의인 원칙(법질서)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훼손하는 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총칼 앞에서도 분연히 일어난 시민들, 그런 5.18의 정신이 무엇인지, 수많은 ‘바른’ 청년들이 처절하게 산화해 가며 지키고 꿈꾸었던 민주주의를 더 이상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우리가 진정한 ‘사람’으로 5.18을 추모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80년 5.17일 이후 알 수 없는 곳에 갇혀있다 군대에 끌려가 짐승의 시간을 보내며 저항하는 의미로 술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하지 않는다. 죽어간 친구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다. 그렇지만 나는 솔직하게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들, 내 목숨 같았던 ‘친구’들 앞에 설 자신이.

아직도 그렇다. 그저 비겁하게 이런 글을 쓰며 회한의 눈물을 뿌릴 뿐이다. 그래서 미안하고 살아있다는 게 여전히 부끄럽다. 산 자의 도리를 못한 까닭이다..

** 5.18 민주영령들과 미치도록 순수하고 푸르렀던 친구들의 평안한 안식을 빕니다.

▲ 전두환의 광주시민학살로 가족을 읽은 시민들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규 속에 통곡하고 있다. 시신을 찾아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한 가족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요 며칠전 당시 보안사 특명부장 허장환씨 증언 따르면 전두환의 군보안사의 지휘하에 시신을 태워 없애고,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시신마져 찾지 못한 희생자 가족들은 시신 없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것이다.  5.18광주학살을 바로 밝히겠다고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집권한지 2년이 넘어가고 있으나 말만 앞세우고 실천은 없다.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이라는 자는 갖은 이유를 들어 광주학살 관련 사자명예훼손죄를 저지른 전두환을 기소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일까지 벌였다. 2년이 지나면서 가해자 측 인사들의 양심선언으로 광주학살의 잔악한 실상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가해자와 이들과 부화뇌동하는 세력은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북한군 침투설 등 갖은 왜곡을 해대며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심지어 가해자들이 5.18.광주에 와서 집회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철저한 응징과 처벌없이 국민화합, 통합, 포용을 말하는 것은 가해자들과 같은 편임을 말해줄 뿐이다. 문재인 정권은 끊임없이 포용정책을 말하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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