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원 사건'은 식민지문화재 보존 가치 중요성 일깨워 주고 있다.

 

일제가 수탈기지로 강제 개항시킨 목포
할퀴고 간 흔적 곳곳에 남아 참상증언
남아있는 적산가옥, 방공호 등
비극 근대사 교훈으로 삼을 필요성 대두

 

▲ 아이들이 소녀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면서 사진찍고 있다. 전남 목포시 일제침략 흔적이 남아 있는 박물관 건물이 아이들이 모여 있는 소녀상 뒤편으로 보인다.

단군기원 4352년 3월 23일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와 자유여행기술연구소 ‘투리스타’가 함께하는 국내 역사 탐방에 나섰다. 목포와 군산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목포와 군산 두 도시는 왜정치하에서 국내 대표적인 미곡 수탈 기지였다. 강제징용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단 일정은 1박 2일이었는데 첫째 날에는 해남 옥매광산, 목포 근대역사관 및 목포 중앙교회를 둘러봤다. 둘째 날에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신흥동 일본인 가옥, 동국사, 군산 임피역사를 찾았다.

첫 일정인 해남 옥매광산은 개인사정으로 인해 들를 수가 없었다. 이곳을 다녀온 단원에 따르면 아직도 안내문 하나 제대로 된 없이 방치되다시피 했다.

방치된 그 모습이 오히려 잊혀진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아픈 역사를 오히려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방문지로 목포 근대역사관에 갔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1관과 2관으로 나누어져 주제에 맞게 체계적으로 전시가 되어 있었다.

제 1관은 “구 목포 일본 영사관”(사적 289호)이름을 달고 있었다. 광무4년(서기1900년)에 건립되어 1914년부터 목포시청 부청사,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서기1990년~2009년 까지는 목포시립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처럼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된 것은 2014년부터다. 설립 당시 벽난로와 거울, 사용했던 피아노 등이 남아 있어 근대사적 가치가 높다. 건물은 목포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분위기는 왜국이 목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알려준다. 건물 뒤편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방공호도 남아있어 강점기 조선인들의 설움을 알 수 있었다.

건물 앞쪽에는 소녀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소녀상 앞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소녀상 옆에 앉아 사진도 찍었다.  

역사관 안쪽에는 목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을 개설해 놓았다. 목포는 부산과 원산, 인천에 이어 1897년 10월 1일 네 번째로 개항했다.

일제강점이 본격 시작되기 전 서기1897년 10월 26일 왜국 영사관이 들어섰다. 왜인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서기1898년 2월에 목포 부두 노동자들이 대한제국 최초의 파업했는데 항일 투쟁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항일운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뜻 깊은 역사다.

개항초기에 조계지를 지정했는데 이를 중심으로 왜정시대 왜인들의 거주지가 정해졌다. 조선인 거주지는 조계지 위쪽에 있었다. 이를 “북촌”으로 불렀다. 왜인 조계지에는 각종 근대적인 시설들이 들어섰다.

이에 비해 조선인 마을은 도로, 주택, 전기, 상하수도, 의료시설이 낙후되어있었다. 이는 조선인들의 큰 불만이 되었다는 당시의 신문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서기1920~30년대 목포는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지만 일제식민지 수탈 무역기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조선인 거주지 북촌과 왜인이 거주하는 조계지, 남촌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건물 바깥에 보존되어 있는 방공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기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달산 방공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내문은 유달산 방공호가 전쟁 말기에 설치되었는데 길이가 85미터 이르고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150사단 사령부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목포는 왜국의 전시 식민무역 기지여서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군의 주요 폭격 대상이었다.  목포의 방공호 규모를 보면 짐작이 간다. 방공호 규모는 실로 대단하였다.

왜국은 이곳 외에도 어뢰정을 은닉하고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목포항 인근 고하도에 굴 20여개를 팠다.  방공호다.

일제는 목포항 남단, 제주 성산일출봉, 모슬포 송악산, 조천 서우봉, 고산 수월봉, 서귀포 삼매봉 등 다섯 곳에 76개 방공호를 팠다고 한다. 

식민 지배 역사를 알리는 제 1관을 나오니 출입구 옆 언덕길에 소녀상이 다시 나타났다. 전시관을 방문하는 다른 학생들이 소녀상에 인사하고 있었다.

왜정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국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이들은 바로 알고 있을까. 바른 역사교육은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방문한 제 2관은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서기1920년 6월에 건립되어 서기1921년 11월 7일에 신축되었다.

해방 후 서기1946~1974년까지 해군 목포경비부 주둔지가 되었다. 서기1974~1989년까는 목포해역사령부 헌병대로 사용되었다. 이후 서기1999년까지 빈 건물로 방치되다가 일부 철거 및 개보수되었다.

서기1999년에 부속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서기2006년에  건물 내외부를 개보수하여 현재까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 2관에는 위안부, 731부대 등 잔인한 내용이 많이 있어 사진 촬영을 제한하고 있었다. 전시 자료 풍부했으나 주제가 뚜렷하지 않아 박물관으로써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2관 건물 앞에는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 나무 팻말이었다. 팻말에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 안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내구성이 결여되어 있어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함께 간 서경덕 교수가 지적했다.

▲ 북촌(조선인 거주지)과 남촌(왜인 거주지)의 배치. 두 동네는 의료시설이나 상하수도 시설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제2관을 둘러본 뒤 동본원사로 향했다. 왜국식 사찰인데 다른 곳에 있다가 서기190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해방 후 정광사가 이곳을 관리하다가 서기1957년부터는 목포중앙교회가 사용하였다.

서기2007년에 등록문화재 340호로 등록되어 현재는 목포 오거리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방문 당시에는 내부 공사 중이라 건물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동본원사 바로 앞에 있는 “목포 근대역사의 거리” 안내판 역시 외국어 설명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어 등록문화재 제 718-1호로 지정되어 있는 왜국식 상가주택(적산가옥)들을 둘러보았다. 목포에는 아직도 왜정시대 동양척식주식회사 주변 시가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적산가옥이 늘어서 있었다. 근대 목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왜국식 적산가옥은 최근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이를 알게 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손혜원 의원의 창성장 사건이다.

손혜원 의원의 조카 등 3명이 창성장이라는 적산가옥을 매입하여 개보수하여 여행객집으로 영업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여행객집을 여는 날, 나흘전인 서기2018.08.06.문화재로 지정, 고시되었다. 

이에 대해 보수 언론들 “이익충돌”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며 손 의원이 조카 등 3명의 명의를 빌려 차명으로 부당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사해 본 결과 언론 보도와는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형적인 왜곡보도라는 것이다. 창성장을 비롯한 근대 문화유산 지구는 근대와 현대가 문화로 만나는 공간이었다. 적산가옥을 꽤 오랜 시간 둘러본 수확이었다.

첫 날 여정을 이렇게 마쳤다. 근대 문화재 탐방이 첫날 일정의 핵심이었다. 이때까지 근대문화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없다시피 했다. 우리는 서기1910년 이후 역사를 갖고 있을까. 조선시대 문화재만 문화재이고 왜정치하 건물은 왜국의 잔재이므로 없애버려야 하는가.

프랑스는 나치지배를 단순히 형식상 단절을 통해 극복하지 않았다. 전방위로 청산했다. 식민 지배의 진정한 극복은 외형과 단절이 아닌 제대로 된 평가와 해석을 하는데 있다.

이렇게 말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평가와 해석은 냉정하고도 엄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창성장 사건을 계기로 적산가옥 등 근대 문화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관심이 많다는 얘기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재평가하기 위해 애쓴 이들의 노력 때문일 것이다. 보수언론들은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정쟁으로 이용하기 위해 목포로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였다.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목포를 잿빛 시멘트로 덧칠하던 왜국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식민지 잔재인 근대 문화재가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 근대의 어두운 역사로 기억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곳이 서기2019년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 되기를 희망한다(제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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