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자들도 단군에 뿌리 내리고 조선어독립투쟁에 나섰다.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제 어버이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다른 아들을 사랑한다 함은 합리한 일이 아니다.

진실로 우리가 한배님을 버리고 누구를 높이며 믿으랴

한껏 한배님의 가르치심이

이 누리에 가득하여 나아가기를 빌고 비노라.”

 

▲ 국어학자, 이병기. 대일전쟁기 일제에 대항하여 조선어독립투쟁에 몸을 던졌다. 주시경의 제자로 대종교으로서 단군과 우리 민족사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사진: 한민족문화대백화사전

이병기의 확고한 민족의식의 형성은 주시경의 영향으로 구체화되었다. 한성사범학교 재학 시절에, 그는 1911년 주시경이 개설한 조선어강습원에 일요일에 나가 조선어 강습을 받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어 강습 때문에 사범학교의 일본인 주임과 사감에게 시말서를 몇 번 작성하고, 조선어 강습원을 졸업하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는 점이다. 이시기부터 그에게 반일의식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조선어강습원의 중등과에 이어 고등과를 1913년 3월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고등과 제1회 졸업생으로 그를 포함하여 최현배, 신명균, 김두봉, 권덕규 등이 있었다.

이처럼 그도 주시경의 직계제자이다. 같은 달에 한성사범학교도 졸업하였다. 이후 국어학 연구의 길로 들어갔다.

이병기는 주시경의 국권 회복 운동의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주시경 선생 인상기」(신생(2-9), 29, 9)와 「한힌샘 스승님」(한글3, 1932, 7)과 「주시경선생의 묻엄」(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와 「말과 글」(한글15, 1934, 8)과 「나의 한 돌이켜 생각나는 옛날」(한글120호, 1957, 2)이라는 글에서 밝혔다. 이처럼 그에게 주시경은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그의 민족의식의 형성에는 대종교의 영향도 작용하였다. 1920년 이병기는 권덕규와 교유하며 11월 13일(음력 10월 3일) 대종교가 주최하는 강연을 들었다.

11월 21일 대종교가 주최한 강연을 들은 뒤, 일기에 그는 우리 민족이 단군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다른 때 보다 더욱 얼을 차리고 힘을 다하여 한배님의 가르치심을 널리 펴 널리 알아, 위로는 우리 등걸의 큰 뜻을 받아 잇고 아래로는 우리 자손에게 이 뜻을 전하여, 우리는 우리대로 문명을 짓고 문명을 자랑하며 살아야 함이다. 제 어버이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다른 아들을 사랑한다 함은 합리한 일이 아니다. 진실로 우리가 한배님을 버리고 누구를 높이며 믿으랴. 한껏 한배님의 가르치심이 이 누리에 가득하여 나아가기를 빌고 비노라.”

라고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인식하였다. 이후 대종교를 수용하였다.

1921년 11월 그는 낙원동 소재의 대종교당을 다니며, 단군과 관련된 역사를 기술한 <신단실기>의 교열을 맡겠다고 대종교 교단에 밝혔다.

1923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 어천절 날에 대종교 중앙교당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같은 해 11월 11일(음력 10월 3일) 대종교 중앙교당에서 열린 개천절 행사에 참여하여, 신도들에게 ‘절제생활’에 대해 말하였다.

1924년 2월 24일 대종교 중앙교당에서 열린 중광절 경하식에서 ‘내 생각으로 살라’라는 내용으로 설교하였다. 1925년 대종교 1대 교주 홍암 나철의 추도회에 참석하였다.

1926년 2월 27일 중광절 경하식에 참여하였다. 1927년 9월 10일 대종교 대종사 나철의 봉도식에 참석하였다.

요컨대 이병기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자 주시경과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가르침을 수용하면서,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그의 우리 말글 인식을 살펴보겠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우리말의 소중함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말을 그렇게 천대하거나 쉽사리 여길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몇만년전-유사 이전부터 우리민족에게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장구한 동안, 무수한 파란을 겪어오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있고 또는 이 뒤에라도 무궁무궁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것으로서 좌우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생명입니다. 조선의 마음과 정조가 이것에 뭉치어 있습니다. 조선의 마음과 정조가 결정된 훌륭한 사상이나 문학도 이것에서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우리말이 곧 우리의 생명’이라는 민족주의적 언어관을 확립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여전히 우리말을 국어로 인식하고 있음을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람의 말인들 서로 다 같은 건 아니다. 그 나라나 그 민족을 따라 대개 다르다. 그리하여 제마다 제 나라 제 민족의 말을 가지고 국어라 하여 퍽 끔찍이 여기고 숭상하지를 않은가.

어떤 학자는 국어를 국성(國性)이라고까지 하여 그 국가의 생명이 그 국어에 달렸다고 하였다. 무론 나라나 민족의 특성(特性)을 말하자면 먼점 그 국어가 다름을 이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런이만큼 그 국어는 그 나라마다의 가장 중대한 보배요 자랑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병기는 국어가 국성이고 국가의 생명이 국어에 달렸다라고 주장한 주시경의 언어관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조선어를 국어로 인식하고 있는 그의 의중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민족문자인 한글에 대해 그는 “우리 조선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적는 한글로 쓰는 것이 가장 당연한 일이다.”라고 한글로 문자생활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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