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은 근현대사 영광과 질곡을 전하고 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의암 손병희가 3.1혁명자금으로 세움

수운회관,

독립투사이자 천도교인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과 박정희에 힘입어 세워진 건물

천도교 영광과 질곡 역사를 안은 채

의식있는 시민들의 방문을 말없이

맞이하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삼일대로)에 자리잡고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왼쪽 붉은색 벽돌건물)과 수운회관(오른쪽 회색건물). 전자는 대일항쟁기에 지어진 건물이고 후자는 군사독재시절 지어진 건물로 자체에 역사성을 띠고 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조선개국4352.03.09.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3월 답사 인원들이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의 건축과정은 천도교인들의 일사불란한 총력전이었다. 동학혁명에 접주로 참여하고 동학한축을 담당하고 있던 이용구 등 일진회 세력이 동학을 배반하고 부왜매국집단으로 변절했다.

의암 손병희는 이용구 등 배반자를 축출시키면서 서기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서기1918년부터 건립에 들어갔다.

의암은 이듬해 서기1919년 초인 3월 1일 독립만세혁명을 일으켰다. 직전인 서기1918년에 대교당 건축모금에 들어간 것을 보면 모금의 본질이 혁명자금 확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의암의 건축자금 모금지시가 떨어지자 천도교인 한 가정당 10원 가량을 냈다고 한다. 당시 천도교인이 알려진 것만 하더라도 최소한 3백만명이었다고 한다.

천도교 측에 따르면 약 1백만원이 모아졌다. 당초 4백여평짜리 건물을 짓는 것이었는데 예상 밖의 엄청난 돈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10원은 현재 통화가치로 바꿔보면 약13만원이라고 한다. 총금액을 환산해보면 1천 3백억원이 넘는다.

서기1894년 동학혁명이 전국으로 일사분란하게 번져갔다. 동학, 천도교가 주도한 3.1혁명도 마찬가지다. 대교당 건축 모금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천도교인들의 인내천 세상을 향한 강력한 염원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내천 사상은 동학의 핵심혁명사상이다.

일제는 천도교인들이 건축비용 모금에서 보여준 단결력에 겁을 먹었는지 기부금품모집위반이라는 등 갖은 핑계를 대며 모금을 제한했다. 또 4백여평 규모도 줄이도록 강제했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에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3월 답사에 참여한 회원들이 단체기념촬영을 했다. 대교당 입구 모양을 보면 4겹으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좁아지고 있다. 일본인이 설계한 것인데 일본 신사입구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다.

건축설계자도 일본인이 하도록 했다. 나카무라요시헤이(中村與資平)다. 그는 한국은행 본점 비롯하여 조선상공회의소, 숙명여고, 예산, 군산, 대구 등의 은행지점을 설계했다.

또 후루타니도라이치(古谷虎市)가 감독을 맡았다. 그래서 인지 대교당 입구를 보면 여러겹 둥근선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본 신사 입구를 떠오르게 한다. 일제가 얼마나 천도교를 감시, 탄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교당 창문을 보면 3원을 볼 수 있고 대교당 천정에는 박달나무꽃으로 보이는 문양장식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천정 좌우를 가로지르며 몇줄이 새겨져 있다.

동학, 천도교가 우리 고유문화사상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달나무에서 ‘박달’은 한웅천왕의 신시배달국, 배달나라의 ‘배달’을 뜻하는 것으로 민족사학에서는 풀고 있다.

건축은 일본인이 주도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우리 혼을 심으려는 천도교인들의 보이지 않는 투쟁을 읽을 수 있다.

조선개국4352.03.09.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3월답사가 있었다. 이날 답사는 서울지역이었는데  천도교중앙대교당, 수훈회관에서 시작했다. 답사해설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맡았다.

이 소장은 수운회관 내에 있는 연구소에서 대교당 역사를 풀어냈다. 대교당은 천도교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 다양한 세력들의 활동의 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특히 조선사회주의 투쟁에서 대교당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피력했다. 대일전쟁기 독립투쟁사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한축을 차지한다. 

대교당이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국제공산당에 종속되지 않은 자생적 사회주의 세력 산실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수운회관 내에 있는 연구소에서 답사에 참여한 회원들에게 천도교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에 얽히 역사를 풀어주고 있다.

대교당 옆에 자리잡고 있는 수운회관이 생겨나게 된 역사도 무시할 수 없다. 수운회관은 서기1971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절정일 때 지어졌다.

최덕신의 역할이 컸다. 최덕신은 만주에서 독립군단, 정의부를 이끌고 군사학교, 화성의숙을 지어 이끌었던 천도교인 최동오의 아들이다.

그는 6.25전쟁기인 서기1951년 3사단장으로 있으면서 경남 함양, 산청, 거창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과 더불어 학살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적을 막기 위해 벽을 치고 들판에 불을 지펴 모조리 태워 버린다’는 이른바 “격벽청야” 작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1920년 일제가 만주 간도 독립군 기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고 학살한 ‘경신참변’을 연상케한다.

최덕신은 서기1948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박정희를 알게된다. 이 둘은 박정희가 최덕신을 선배님이라 부르고 최덕신은 박정희를 제자로 보는 관계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이었는지 박정희가 5.16군사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을 지지하여 주도세력으로 참여했다.

이후 외무부장관을 역임하는 등 박정희정권에서 승승장구한다. 아버지 최동오를 따라 천도교인이었던 최덕신은 서기1967년부터 교령을 맡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김대중과 대통령선거에서 경쟁하면서 천도교의 표를 얻고자 수운회관을 지어준 것으로 풀기도 한다.

‘수운회관’ 글자가 새겨진 판석이 수운회관 건물에 박혀있는데 이 글씨체가 박정희 것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충남 공주 우금치 계곡에 동학혁명기념탑이 있다. 뒤에 기념탑을 세우게 된 글이 새겨져 있다. 박정희의 도움으로 새워진 것으로 나온다. 또 동학혁명을 국가차원에서 기념하는 사업을 벌이는데 박정희가 직접 돕고 있다.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최덕신(좌)과 박정희(우)의 모습. 최덕신이 서기1977년 미국으로 도피할 때 까지 이 둘은 '혁명'동지였다. 최덕신은 반란 직후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사진은 서기1961.10.17. 모습이다.

모두 천도교인 최덕신과의 인연 때문으로 보인다. 최덕신은 서기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정희를 파쇼정권이라며 반 박정희 투쟁을 벌인다.

그러다가 부인 류미영과 함께 서기1986년 북조선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최동오도 6.25전쟁 때 북으로 올라갔다.

아버지 최동오의 월북이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지금은 모두 애국열사릉에 묻혀 북조선 인민들에게 숭배를 받고 있다.

최동오는 화성의숙 시절 북조선 김일성 주석을 학생으로 맞아 독립투쟁교육을 시켰다. 이 때 김일성 주석이 천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최덕신 부인, 류미영도 독립군 집안 딸이다. 그의 아버지 류동렬은 대한제국 무관이었는데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나라가 망하자 독립투쟁에 뛰어든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광복군 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최덕신은 아버지 못지 않은 독립군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한 것이다. 정통 독립군 집안인 셈이다. 이런 인물이 독립투쟁과는 거리가 먼 리승만, 박정희 정권과 함께 했다.  

최덕신 만큼 민족, 반민족, 좌우, 독재, 반독재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다. 수운회관이 이런 인물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교령을 할 당시 그의 전횡이 심하여 천도교인들의 숱한 비난을 받았는데, 수운회관이 그의 영향력으로 지어져 오늘날 천도교 존립 중요 자산역할을 하고 있다.

광복 74년이 되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좌우 어느 한쪽에 서라고 강요하는 대한민국 현실이다. 최덕신 일생은 이 같은 현실에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최덕신 부부가 월북한 뒤에 북조선 김일성 주석(중앙)과 함께 찍은 사진. 최덕신 부인, 류미영은 서기2016.11.23. 타계했다. 향년 95세였다. 지난 서기2017.11.20. 문재인 정부는 류미영 사망 1주기를 맞아, 북조선이 초청한 그의 아들 조문 방북을 허가했다. 류미영은 북조선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직을 맡고 있었다. 매년 류미영의 생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선물을 보냈다. 김영철 비서가 대신 선물 목록을 전했다. 북조선에서의 천도교 위상과 '애국열사'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사진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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