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학은 일본극우파 황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단식민사학계,

백제, 신라, 가야 관련 유물은

서기5세기전으로 끌어올리지 않아

목간년대도 일본학자 추종경향 보여

 

▲서기2017.11.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경북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하는 시민강좌가 있었다. 이날 강사로 윤선태 동국대학교 교수가 나왔다.

지난 조선개국4352.01.19. <한겨레신문> 노형석 기자가 목간관련 소식을 보도했다. 지난 달 19일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 한일목간학회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그는 목간이 이 땅에서 건너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반도 문자문화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하고, 이런 역사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내용들이었다.” 라고 하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 각지에서 연구자들이 몰려와 200여명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채 진행된 이날 워크숍에서는 현지 학자들의 파격적인 발표가 잇따랐다.” 라며 ‘파격’이었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뽑은 기사 제목을 보아도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기사 제목은 이렇다. <“7세기 일본은 백제·신라 본떠”…‘목간 연구’ 일본 학자들 인정했다>. 그는 이것이 무슨 대사건을 발견한 것인양 상기되어 보도했다.

이전에는 일본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소개했다. 중국에서 직접 수입하거나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고 하더라도 중국 것이 우리 땅을 거쳐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았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노형석 기자에게는 이날 일본학자들이 '목간 한반도 영향설'을 주장한 것이 파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여전히 일본극우파 황국사관,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목간 상한년대를 서기6~8세기라고 그어놓고 보도를 한다. 그에 따르면 이날 일본학자는 우리나라 목간년대를 서기6~7세기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 신라 목간문화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중국문화를 수용해서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독자적으로 수용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중국에서 건너온 문화라는 점을 짚었다.

이어 이날 모임에 참석한 한국 측 학자들을 소개하며 윤선태 동국대 교수 말도 전했다. 윤 교수가 “레이더 조준갈등으로 한일 정부사이에 갈등이 첨예화되는 시점에서 한일 고대사 연구자들이 목간을 화두로 상호이해와 소통 물꼬를 텄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고 했다고 한다.

목간은 당대 행정을 기록한 일종의 행정문서에 해당한다. 종이가 귀한 시기에 나무를 얇게 깍아 종이대신 그 위에 먹으로 글을 써서 행정행위를 했다.

▲충청, 전라, 경상도 일대에서 발굴되는 목간이다. 목간은 나무를 얇게 깍아 붓에 먹물뭍혀 글씨를 써 행정을 하는 나무문서다.

문제는 목간 년대다. 이날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이제까지 발굴된 목간은 4백여점에 이른다. 백제, 신라 것이라고 했으니 분포지역도 경상, 전라, 충정도에 이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당히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년대가 서기6세기를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천편일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서기 2017.11.07.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경북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하는 ‘신라 천년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시민강좌가 있었다. 이해 9월부터 11월 말까지 20회가 넘는 강좌 중 하나였다.

이날 윤 교수는 신라역사가 중국 선진문물을 받아 발전했다는 논리를 펼친 바 있다. 이날 목간 얘기도 나왔다. 목간문화도 중국서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도 목간 년대를 서기 6세기 이전으로 보지 않았다. 이후 것이라고 주장했다. 4백개가 남한 하삼도 전역에서 발굴되고 있는데 서기6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이 한 개도 없다는 얘기다.

그는 목간 년대 측정을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간지년干支年’이 새겨져 있으면 서력으로 환산이 가능하여 년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없는 경우에는 목간 상호간에 비교하거나 다른 유물이나 문헌사료를 종합해서 추정한다고 했다.

흔히 적용하는 방사선 탄소연대측정 같은 방법은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확답을 피했다. 그는 이 방법으로 목간에서 시료를 채취하려면 글씨가 훼손되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윤 교수는 이날 목간을 보존하려고 ‘가스렌지’에 목간을 넣어다가 태워먹은 적도 있다고 여담처럼 말했다.

시료채취하려면 목간 글씨가 훼손된다고 했는데 이는 궁색한 변명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다른 고고유물 같은 경우도 시료를 채취해서 한다. 일부 훼손을 감수한다.

목간은 4백여개나 나와 있는 상태다. 한 군데서 여러개가 나온 경우도 허다하다. 의지만 있다면 과학적 방법으로 년대 측정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 목간년대를 파악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바 없다. 왜 그럴까. 혹시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년대가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이라는 식민사관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윤선태 교수가 소속된 한국고대사학회라는 단체가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을 좌주우지하는 핵심 세력이다.

이 단체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초기역사는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나중에 꾸며낸 것으로 본다.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라는 일제 황국사관 학자가 하는 소리다. 물론 여타 다른 일제식민사학자들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삼국 초기 역사기록을 꾸며낸 이야기로 보는 것일까. ‘임나일본부설’ 때문이다. 서기4세기에서 6세기 언저리까지 당시 일본야마토 왜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식민지배했다는 식민사관이다. 고대판 조선총독부다.

이 시기까지 가야, 백제, 신라가 강력한 고대왕국이고 고도로 발달된 문화강국이었다고 하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식민지배를 할 수 없다.

약체국가로 만들어놔야 정복해서 보호목적으로 식민통치가 가능하다. 이것을 뒤 받침하고자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식민사관을 만들어 퍼뜨린 것이다.

초기기록에는 삼국이 고도로 진화한 강력한 고대국가라고 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목간도 서기6세기 이전에는 만들지 못한 것으로 못 박은 것으로 보인다. 목간상한년대를 일정한 시기 이후로 한정시키고 있다는 혐의를 면키 어렵다.

이날 노형석 기자가 보도한 것을 보면 일본학자도 분명히 서기6세기 이전으로 보지 않고 있다. 노 기자가 일본이 우리나라 영향을 받았다고 일본학자가 말했다고 보도했으나, 밑 바탕에는 여전히 식민사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노기자가 전한 윤선태 교수의 말도 도마위에 오른다. 최근에 일본 자위대 항공기가 우리 군함에 근접하는 도발을 수차례나 감행했다.

한번이라면 실수라고 볼 수 있으나 이제까지 파악된 것만 해도 4번이다. 동해는 물론 우리 강토 최 남단 이어도 상공에서도 도발했다.

윤선태교수는 이를 ‘레이더 조준갈등으로 한일 정부사이에 갈등이 첨예화되는 시점’ 이라고 말했다. ‘레이더조준 갈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완전히 일본측 시각을 대변한 것이다.

일본이 우리가 일본 항공기를 향해 레이더를 조준했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우리에게 책임론을 제기했다. 나중에 일본의 명백한 고의 도발임이 당시 상황을 담은 동영상 증거로 밝혀졌다.

러시아나 북조선이라면 이 경우 격추시켰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주권 국가로서 주권 침해를 받았으니 응전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윤 교수의 발언은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문제삼아 ‘일본을 자극해서 보복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고 일본측 대변인 노릇을 한 것과 다르지 않다.

109년전 이완용도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다르지 않은 논리를 펼치며 나라를 일제에에 팔아먹었다.

<한겨레>신문의 조선총독부 역사관 기사,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역사학을 장악한 강단식민사학, 자유한국당과 같은 막강한 세력의 행태를 보면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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