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년 이어오는 민중항쟁 여전히 민생들은 고달프다.

부패왕조, 서양세력과 합세 민중봉기 제압

동학혁명, 의병전쟁, 3.1혁명, 광복전쟁

모두 민중해방투쟁 홍익인간세상 염원담아

▲ 서기2018.11.24. 서울 종로 재동에 위치한 의백학교에서 전 서울교육대 김호성 총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 14일에 문을 연 의백학교 수업이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의백학교(학교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는 의암 손병희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의 호 앞자를 따서 만들었다. 의암은 동학 천도교 3대교주다.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의 도통을 이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동학 중심인물이라는 얘기다.

백범은 동학이나 천도교와 크게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알려져 있다. 백범일지를 보면 그렇지 만도 않다. 황해도 해주에서 동학 접주로 활약했음이 드러난다. 이 두 인물은 구한말 동학과 일제치하 독립투쟁을 이끈 상징성을 갖고 있다.

동학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인내천, 사인여천 등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고 홍익인간 대동세상을 추구한다. 백범도 성숙한 문화국가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동학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두 인물의 정신과 사상을 학교 시책으로 삼고 지난 10월에 출범하여 수업을 해 오고 있다. 매주 토요일 서울 종로 재동 헌법재판소 근처에 위치한 의백학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서기2018.11.24. 토요일에는 여섯 번째 강의가 있었다. 이날 강의는 전 서울교육대학교 총장, 김호성 박사가 맡았다. 그는 ‘동학혁명의 전승과 발전적 과제’로 수업에 들어갔다.

김 전 총장은 민중항쟁, 봉기 본격 시점을 서기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발발한 홍경래 봉기에서 찾았다. 이어 서기1860년대 타오르는 민란을 들었다. 이 민중항쟁이 쌓여 동학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원인을 민족주의 운동에서 찾았다. 서양제국주의 침략과 지배세력의 탐학으로 민중이 살수 없게 되었다. 그는 서기19세기 외세침략과 부패한 봉건왕조세력 패악이 쌓여 대한강토를 파괴시켜 나갔다고 분석했다. 이는 민족보전 신념체계인 홍익인간세상과 이를 구체화 시킨 동학을 파괴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 이런 민족 가치를 당시 지배세력이 외세와 결탁하여 파괴하려 한 것으로 진단했다. 이어 동학의 본질을 소개하며 구한말과 일제침략기 투쟁사 바탕에는 동학혁명 정신이 흐르고 있다고 보았다. 동학혁명사상이 민족사 시작부터 나온 국시로써 홍익인간, 재세이화 사상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삼일신고>라는 민족경전이 추구하는 ‘성통공완性通功完’사상이 동학속에 녹아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본성을 통하면 공력이 완성된다는 말로 풀이된다. 여기서 본성은 하느님의 속성을 말한다. 이 속성과 통한다는 것이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다르지 않다. <삼일신고>는 여러 문헌에서 전하는 우리 고유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미 단군의 조선 이전부터 있었다.

생활현장에서는 인본주의, 인간중심주의로 나타난다. 지배자나 특정 세력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다. 또 신의 권위를 빌어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또 백성을 지배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종이나 하인 노비관념으로 대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책임지고 스스로 행하는 주체적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이런 인간이기에 지배세력이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바르게 정치하라고 봉기한 것이 동학혁명이다. 그 결과로 집강소와 같은 자주적 자치 기구가 등장했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으나 민이 주인이되어 평등에 기초한 민주 정치 세상을 열었다.  이러한 사상은 전라북도 일대에서 봉기한 김개남 동학농민군 장군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김 전 총장은 김개남 장군이 봉기하면서 “백성에 추호도 해를 입히지 말라” 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탐학 관청을 습격하여 관곡을 탈취하고 별감, 서리 등 관청의 탐관오리를 때리고 처단하면서도 민생은 건드리지 말 것을 외쳤다고 한다.

나라를 반석위에 세우고 침략한 외세를 퇴치하는 동학혁명 정신은 이후 의병전쟁으로 이어진다. 평민, 양반 할 것 없이 외세침략에 의병으로 항쟁을 이어갔다. 일제가 외교권을 탈취했을 때 양반 의병장, 면암 최익현은 의병전쟁을 일으키면서 나라가 이미 망해 버린 것을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아! 저 일본놈들은 진실로 배대의 원수다, 하룻밤 사이에 5백년 종묘사직이 없어졌다. 천지신명도 크게 노하시고 조종의 영혼도 통곡한다. 제 나라를 원수에 바친 이지용 역적은 당연히 먼저 죽여야 한다.”

이 의병투쟁은 나중에 독립투쟁으로 이어진다. 또 이 역량이 쌓여 3.1혁명으로 진화한다고 김 전 총장은 분석했다. 특히 3.1혁명은 국내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후 이 혁명정신이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간디와 네루가 주도하는 인도 독립운동을 촉발시켰다고 밝혔다.더 나아가 지구촌 반제국주의 투쟁의 촉매제가 되었음을 상기시켰다.

더구나 3.1혁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다. 대일항쟁기 독립투쟁 중심에 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3.1혁명으로 탄생했다고 명확하게 알고 있는 국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임시정부에서 일제말기인 1941년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 전쟁에 돌입한다.

김 전 총장은 당시 임시정부에서 일본에 선전포고한 포고문을 소개하기도 했다. 포고문은 임시정부, 대한민국으로 엄연히 미국 등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또 포고문 3항을 보면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부터 왜구를 완전히 쫓아 내기 위하여 마지막 승리를 얻을 때 까지 혈전한다고 외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서기1945.8.15. 일제가 패망하였지만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연합군으로 인정하지 않았는 점이다. 일제의 식민지로 보았다. 해방이 되었지만 이 땅은 식민지로 여전히 남아 미군이 점령군으로 와서 차지한다.

미국군 정부는 친미정권을 세우면서 일제부역자들을 살려 주었다. 이들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장악했다. 법원은 일제치하 판사들이 그대로 접수했다. 행정부 각부서 및 경찰도 마찬가지다. 군대도 전직 일본군들이 장악했다. 의회도 한민당에서 볼 수 있듯이 친일지주들이 장악했다. 김구는 한독당을 창설했으나 이승만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고 암살되는 바람에 한독당은 사라진다.

그러니 동학혁명에서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세력은 설자리가 없었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제거되었다. 홍익인간, 인내천, 대동세상을 꿈군 세력이 모두 제거되면서 이런 사상과 철학에 기초한 새 국가 건설도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11월 22일자 아시아경제지는 이런 소식을 전했다.

“독립유공자 생계비 지원기금 국회서 막혔다. 자유한국당이 제동을 걸었다.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에서 거부되었다.” 그런데 이 예결위 위원장이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이다.

지난 하반기 국회 구성 때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총무가 주도했다. 그는 자유한국당에게 '예결위원장'과 '법제사법위원장'을 넘겼다.

이 두 위원회는 민생과 직결되는 입법을 관장하는 핵심 기관이다. 당시 여론은 홍 원내총무가 국회를 자유한국당에 갖다 바쳤다고 들끓었다. 홍 원내총무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그의 조부로 알려져 있다. 특급 친일부역자 집안이다.

또 11월 24일 영남일보는 이런 소식을 전했다.

“대구시의회, 위안부 피해자 지원 및 기념사업 조례안 제동걸다.  자유한국당 의원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 ‘민중의 소리’는 11월 22일 이런 소식을 전했다.

“충남 대전시의회 반민족 반헌법 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 촉수하는 결의안 채택했다. 이 현충원서 친일파 이장하라는 결의안에 뿔난 김진태, ‘이게 나라냐 싸우자!’ ”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싸우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태는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다.

동학혁명, 의병전쟁, 광복투쟁의 민족주의 세력이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제거된 결과다. 73년 전에 물러간 줄 알았던 일제 식민통치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다.

이날 김 전 총장은 '이 강연은 사회학이기도 한데 사회학은 활동범위가 다양하다'면서 의백학교 학생들은 생활현장에 나가 여기서 배운 것을 알려 시대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여담으로 의백학교에서 인재를 양성 할 줄 알았다면 총장으로 퇴직할 때 가지고 있던 책 2만여권을 다른 곳에 기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이날 수업은 분반별로 옹기종기 모여 토론이 가능한 구조로 진행되었다.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 등 주요 인사들도 참석하여 수업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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