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우파는 한국 사학계를 손아귀에 쥐고 우리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한겨레 신문 노형석 기자,

강단식민사학계 주장과 하나되어 식민사관 기사 쏟아내

중국 동진시대 것이라고 하는 것 모두 대륙백제가 만든 것

 

 

▲한겨레 신문 노형석 기자가 경기 하남 일대에서 발굴된 묘제를 중국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물건, 특히 금제품을 보면 경주 신라지역에서 나온 누금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누금기법을 찾아보기 힘들다. 묘제 또한 우리 고유기법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진 맨 오른쪽 상단은 경기 하남 일대 무덤에서 나온 금제품이다. 왼쪽 하단은 신라 경주일대에서 나온 금제품이다. 모두 누금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위는 전북 남원일대서 나온 것이다. 노형석 논리대로라면 중국풍이기 때문에 이것도 중국인들이 와서 만든 것이다.

 

“한반도 서북 지역의 낙랑계 무덤에서 보이는 전축분”

“낙랑군 멸망 등을 계기로 백제에 들어온 중국계 이주민의 생활 문화”

위 글은 누가 말한 것일까. 지난 서시2018.08.19. 한겨레신문에 노형석이 기사로 올리면서 한 말이다. 물론 제도권 강단사학, 고고학자들 말을 전하는 형식도 취하고 있다.

노형석은 경기 하남시 감일동에서 발굴된 무덤양식과 거기서 출토된 물건들을 해석하면서 저렇게 보도했다. 강단사학자들의 견해를 전하면서 자신도 그들과 한 몸임을 과시하며 모두 중국산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위 발언에 별다른 문제점을 못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바르게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하남 감일동에서 발굴된 대규모 무덤 떼가 백제산이 아니라 중국산이라고 한다. 또 그 무덤을 만든 사람들이 중국 본토는 물론 우리 땅 서북지역에서 내려온 낙랑군 중국계 이주민이라고 하고 있다.

낙랑군이라는 것이 있다. 노형석이 말하는 이 낙랑군은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나라 식민기관을 뜻한다. 이 낙랑군이 노형석과 저 무덤발굴에 참여한 학자들은 서북한 지역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를 전제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한반도 서북지역, 정확히 말해 평양에 있었다는 사료는 단 한 개도 없다. 모두 중국 하북성 일대로 나온다. 특히 <사기> <한서 지리지> <태강지리지> <진서지리지> 등 중국 원사료들은 모두 현재 중국 북경 난하 동남쪽 갈석산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제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낸 정치공작인 식민사관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뇌까리고 있다. 해방 된 지 73년이 지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렇다.

노형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말없는 물건 위에 조선총독부 식민지 역사관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 서기2018.08.19. 한겨레 신문 노형석 기자가 보도한 하남 감일동 일대서 나온 무덤군 기사다. 서울대 권오영 교수 전문가 귄위를 빌어 백제인들의 무덤을 중국인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백제에서 이들(중국인)은 외교, 역법, 교육 등의 전문 직종에 종사...”

“백제가 국가사업으로 외국 고급 두뇌유치에 나서...”

“중국의 전문인 집단을 데려와 ‘테크노크라트’ 계층으로 육성...”

노형석은 발굴된 무덤 군과 물건들에 위와 같이 해석을 덧씌우고 있다. 소설을 쓰고 있다. 유물을 통한 역사 실체 진실을 밝혀야 함에도 발굴에 참여한 권오영 서울대 교수와 박순발 지방대 교수와 함께 충실하게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풀어놓고 있다.

위 발언 밑바탕에는 조선총독부가 설파한 식민사관의 중핵, 타율성론, 정체성론이 깔려 있다. 중국 선진문물과 고급인력들이 백제에 들어와 활약함으로써 비로소 백제가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저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이번에 발굴된 무덤축조 연대를 동진시기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서기로 따지면 서기317년 이후다. 이 시기는 서기 4세기경으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내놓은 ‘<삼국사기> 초기불신론‘ 연대와 맞아 떨어지는 때다.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로 대변되는 조선총독부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 시기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의 역사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엄연히 삼국 모두 서기전에 개국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가짜라고 한다.

그래서 고대왕국으로써의 백제와 신라 건국시기를 서기 4세기 이후로 잡고 있다. 그 전에는 백제, 신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위 기사 밑바탕에도 이런 총독부 사관이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저들이 지난 서기2016~2017년에 걸쳐 개최한 고대사시민강좌를 취재하면서 일관되게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천편일률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저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물론 노형석 기사에 나오는 권오영도 시민강좌 강사로 나왔다. 박순발은 한성백제박물관이 공간을 빌려주고 후원하는 각종 학술대회에 나와서 같은 사관을 보여주었다.

국사시간 뿐 아니라 우리는 노형석의 한겨레 신문기사 같은 것으로 알게 모르게 조선총독부 지배를 받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러한 표시나지 않는 식민사관의 공격으로 우리 정신은 끊임없이 일본제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다.

그렇다면 노형석이 중국제라고 하면서 동진과 남조시기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동진東晉시기는 서기317년에서 서기420년까지를 말한다. 이 동진이 망하고 송, 제, 양, 진나라로 난립한다. 이 시기는 서기420년에서 서기589년으로 알려져 있다. 동진과 이후 들어선 나라들은 대륙 남부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남조南朝라고 한다.

이 시기 대륙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대규묘로 발굴한 묘에서 나온 유물들이 같거나 비슷하다며 중국풍이라고 한다. 무덤 양식도 양자가 같다며 중국사람들이 하남일대로 이주해와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대륙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을 보면 발굴지역이 대부분 중국 대륙 연안에 가깝다. 중국 깊이 내륙지방에서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

▲ 노형석 기자가 보도한 위 내용를 보면 식민사관의 전형이다. 중국 선진기술자, 우수한 중국문물이 들어왔다는 것이 골자다. 이후 백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그 전에는 고여있었다는 정체성론이 읽혀진다. 식민사관이다. 외국 선진문물이 들어와야 우리 나라 역사가 발전할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 시각이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 박순발 충남대 교수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국민은 이들이 말하니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식민사관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런데 이 시기 백제 강역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모두 중국 1차사료다.  <북사> 백제전과 <주서> 백제전은 백제가 동진 때부터 송, 제, 양나라 때까지 강좌를 점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강은 양자강을 말한다. 오늘날 양자강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중국 연안지역이 백제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百濟, 自晉、宋、齊、梁據江左(북사 백제전)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 自晉(동진)、宋、齊、梁據江左(주서 백제전) 

이 뿐만이 아니다. <구당서> 백제국 편에는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까지 이르렀다고 나온다(<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구당서 백제국)

대륙백제 기록은 더 있다. 진나라시기에는 요서와 진평을 장악하고 군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요서는 오늘날 아무리 좁게 잡아도 하북성일대다. 역시 진나라 이후 모든 나라를 삼겨 병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自晉以後,呑幷諸國,據有馬韓故地/통전 백제전).

여기서 晉진나라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 늦게 잡아서 동진이다. <양서> 백제전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양서 백제전).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는 소위 <양직공도>다. 이는 그림으로 전해오는 물건인데 거기에 서기 526년에서 536년에 양나라(梁, 서기502년-557년)에 여러 나라에서 조공하러 온 사신들을 그려놓고 내력을 적고 있다. 이것은 왜곡하기 쉬운 관찬사서가 아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기록한 고고유물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도 백제는 요서와 진평 현縣을 설치했다고 나온다.

▲ <양직공도>. 중국 양나라시기인 서기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고 있는 것은 서기1077년에 제작된 것이다. 위 <양직공도>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에 현縣을 설치했다고 한다. 문헌사료에서는 군郡을 설치했다고 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위 사료를 종합해 보면 백제는 동진시기(서기317년 건국) 부터 송, 제, 양나라 시기(서기557년 멸망)까지 약 2백30년간 대륙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단순 진출이나 점령이 아니라 백제 땅이었다.

아무리 깎아도 2백년 이상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백제 식민지라기 보다 백제 강역 자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중국 1차사료, <양서> 백제전에 22담로 기록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簷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簷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중국의 군현과 같은 행정기구를 설치하여 운영했다는 기록이다. 그것도 담로 우두머리가 백제 왕의 자제였다고 한다. 백제 땅 이었다는 말이다.

대륙백제 윤곽이 드러난다. 강토는 현재 하북성일대부터 연안을 중심으로 양자강을 아래 절강성 일대까지다. 최소한 중국 1차사료 기록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시기 대륙 이 지역에서 나온 유물과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일대에서 나온 유물이 같거나 비슷하다. 한겨레 신문 노형석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하남시 감일동 무덤과 유물이 중국인이 만든 것인가. 

식민사학은 우리 역사가 대한강토(소위 한반도)에서만 전개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대륙백제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떠 오르지 않는다. 노형석 논리대로라면 전북 남원지방에서 나온 것도 중국인이 와서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또 천안에서 나온 것도 중국인이 와서 만든 것이라고 해야 한다. 모두 무덤에서 나왔고 노형석 말대로라면 중국풍 무덤양식이다. 온통 중국인 천지가 된다.

그러나 중국 1차사료는 대륙백제를 말하고 있고 논리 필연으로 모두 백제인 무덤이고 백제인이 만든 유물들로 귀결된다. 더구나 하남시 감일동 일대 무덤떼에서 거의 공통으로 나오는 계수호라는 주전자형 도기가 눈길을 끈다.

▲ 충남 천안일대에서 나온 계수호와 중국 대륙에서 나온 계수호 주전자다. 중국 대륙에 나온 것과 비교해 보아도 정교함과 섬세함 면에서 거의 같거나 우수하다. 사진 중앙 아래는 호수호 주전자형 도자기다. 호랑이 머리를 한 주전자 꼭지형 도자기라는 소리다.

계수호鷄首壺라는 말은 닭머리 병 도자기라는 뜻이다. 닭이 나온다. 닭은 소위 '백제금동대향로'에서 확인되듯이 백제 상징이다. 봉황 곧 새다. 고구려, 신라와 마찬가지로 신시 배달국 한웅천왕을 나타내는 새족, 곧 조이족임을 나타낸다. 중화족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통해서도 동진시기 대륙에 나오는 계수호와 하남 감일동에서 나오는 계수호가 백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역으로 동진시기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나라는 여전히 식민사학이 기득권으로 강고하게 장악하고 있어, 그들의 말이 더 잘 먹혀들어간다. 그들의 논리는 불행하게도 오늘날 일본 극우파 학자들과 닮아 있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은 이렇게 일제에 풀려난지 73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신문기사 등을 통하여 우리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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