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수 많은 집현전 학자들의 각고의 노고와 투쟁 속에서 나왔다.

 

집현전 학자 정인지,

"아아, 정음正音을 만들어 천지만물 이치를 모두 갖추었으니,

아, 신묘하구나, 이는 하늘이 성인의 마음을 열어, 솜씨를 빌린 것이로구나"

 

▲서기2018.10.11. 서울 고궁박물관 별관 대강당에서 제10회 집현전 학술대회가 열렸다. 훈민정음 창제 572돌을 맞아 열린 행사였다. '한글의 탄생과 우리 겨레의 삶'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발표자들이 학술발표회를 마치고 종합토론시간에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재단법인 외솔회에서 주관한 집현전 학술대회가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 서기2018.10.11.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 별관 대강당에서 재단법인 외솔회 주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글재단이 후원하는 집현전 학술대회가 있었다.

이날 훈민정음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상세하게 밝혀졌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당시 사람들이 글말 생활이 얼마나 불편했고 답답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도 나왔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글이다. 제사지낼 때 한문으로 된 축문을 읽으면 선왕의 영혼이 아마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만큼 한자로 된 제사 축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축문을 쓴 사람 자신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옆에서 그것을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선왕인 조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쓴 자만 알 수 있으니 조상이 제사상에 내려서 자손이 축문을 올려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귀신도 못알아먹는 한자 축문을 뭐하러 올리냐는 비판이 들어있다. 귀신도 못 알아 먹는 것을 산 사람에게 말해 본들 알아 먹을 수 있겠냐는 한탄이 녹아있다.

그러나 알아먹을 수 있는 우리말로 축문을 써야 겠는데, 우리말을 담을 글자가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우리 글자가 없으니 모두 한자로 써야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훈민정음 창제 주목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지금으로 보자면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에서 피해자나 죄인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해야 하는데 한문으로 썼다. 이러다 보니 당사자의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억울하게 당하거나 부당한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이날 오후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성낙수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이런 사례를 세종실록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임금이 안승선에게 이르기를, ‘중외 관리들이 옥사를 판결할 때 명백하게 밝히고 조심하지 아니하여 살려야 할 것을 죽이고 죽여야 할 것을 살린 것이 간혹 있으니, 막상과 상이의 일이 이것이다. 말하면 아프다. 역대 옥사 판결에 실수한 것을 집현전에 초하게 하여 경도<강호기문>안에 있는 형옥을 그릇 판결한 것을 초하여 아뢰라. 내가 하교하여 효유하겠다.’ 하였다.”

성낙수 교수는 이것을 백성들이 한자나 이두를 알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창제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이런 사정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다. 훈민정음으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쓰면 한자보다 훨씬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세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을 이끌어 갈 인재들이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문동석 서울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같이 말했다. 세종의 아버지, 이방원이 왕권강화와 안정을 위해서 공신세력 등 무수한 인물을 숙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부왕인 태종은 집권 이후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과 인재들을 무참히 숙청했다. 그 결과 세종이 집권했을 때는 인재 곳간이 고갈된 상태였다.”라고 분석했다. 세종 때에 경연이 한해에 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경연에 참여한 인물들이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는 이방원에게 다 숙청되어 경연에 참여할 인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이와 같은 사정이 훈민정음창제의 산실, 집현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라고 풀었다.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를 새로 모집했다는 것이다.

이날 학술대회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말 파괴현상을 문제 삼는 주제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이를 도운 주변인물들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것이다.

학술발표가 끝나고 종합토론 시간에 우리말 파괴현상의 심각성에 문제제기를 하는 질문이 방청석에서 있었다. 특히 영어가 우리말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이 있는지 물었다.

또 국립국어원은 무엇하는 기관인지 비판도 이어졌다. 또 지금은 쓰지 않는 비읍순경음, 반치음 등을 부활시켜 쓸 수는 없는 것인지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어 현재 한국어 맞춤법과 관련해서 혹시 일제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예리한 질문도 제기되었다.

이에 김슬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이 답변했다. 그는 현재 국어기본법이 존재한다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어파괴행위는 모두 국어기본법 위반이라고 잘라 말했다. 거리간판이 온통 영어단어로 써져 있는 것도 이 법위반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법이 강제규정이나 처벌 조항이 없어서 강제를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또 이제는 안 쓰고 있는 훈민정음을 복원해서 다시 쓸 수는 없다고 했다. 현재 한국어 맞춤법 체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내놨다.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일제가 물론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후 얼마 안되어 조선어 맞춤법을 자기들 멋대로 정하는 안을 내왔지만 이후에 우리 조선어 학자들이 우리만의 국어정책을 내놨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쓰는 국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 후원단체로 명단에 올린 한글학회를 겨냥한 쓴 소리도 나왔다. 한글학회 개혁위원회 운영위원장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회 연구교수다. 그는 보통 학술발표회를 하면 이 발표회처럼 종합토론도 하고 방청객에게 질문을 받고 한다고 운을 뗐다.

이어 ‘내일 열리는 국제한글학술발표회는 토론도 안하고 질문도 받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국제학술대회에서 이럴 수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학술대회는 아침 10시에 시작하여 저녁 5시 반까지 진행되었다. 하루 종일 학술발표회를 한 셈이다. 그런 만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오전에는 먼저 최기호 전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이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집현전의 기능’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이어 김홍범 한남대학교 교수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부가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한글창제와 우리겨레의 삶’을 제1주제로 삼았다. 연세대학교 설성경 명예교수가 ‘한국지성사로 본 문자와 문학의 정체성’을 주제로 첫 번째 발표에 나섰다. 이어 고운기 한양대학교 교수가 ‘고려가요와 한글’ 주제로, 세 번째로 박병천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가 ‘훈민정음의 한글문자 생성 구조와 서체적 응용’으로 발표했다.

오후 제2부에서는 ‘한글 창제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모저모’를 2주제로 발표가 이어졌다. 이정택 서울여자대학교 교수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김슬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이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섰다. ‘성삼문의 <훈민정음>해례본 저술과 보급 공로’를 발표했다.

이어 문동석 서울여자대학교 교수가 ‘집현전 학자 최항의 활동과 업적’을 소개했다. 이어 장윤희 인하대학교 교수가 발표자로 나섰다. ‘정인지의 생애와 훈민정음’을 심도 있게 밝혔다. 마지막으로 성낙수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준 왕실의 인물들’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는지 상세하게 소개했다.

집현전 학술대회는 이번이 10회째다. 지난 10년 동안 열린 학술발표회 내용을 이날 나누어 준 발표지 마지막에 소개했다. 훈민정음 관련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음이 확인된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