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과 사과는커녕 재침략해오는 일본, 일제흔적 관광 상품화는 옳은가.

 

일제식민통치 흔적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

금광동 동국사, 일제침략 선봉대로 포교활동 나서

신흥동 일본인 히로시 일본가옥, 일본지주의 조선인 수탈 상징

 

▲전북 군산시 금광동에 위치한 동국사 정문 기둥에 새겨진 일제침략의 흔적. 왼쪽 기둥에는 이 절을 세우는데 시주를 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왼쪽 기둥, 오른쪽 면에 일본인 이름이 쪼아져 있다. 오른쪽 기둥에도 '소화昭和' 라는 일왕 히로히토 연호가 쪼아져 파괴되어 있다. 식민지 조선민들의 분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펄펄 끓던 여름이 갔다. 세월은 어김없이 입추立秋를 넘어 벌써 완연한 가을을 알리는 백로白露를 지나고 있다. 나이 들면 세월이 더 빨리 간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아마도 삶의 주름이 늘어남에 따라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리라. 그 만큼 있는 그대로 삶은 멀어진다.

올해도 4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인생도 흘러간다. 인간 삶이라는 것이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놓겠다는 것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거의 이 굴레 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 아닐까.

한 낮은 여전히 뜨겁다. 뜨거운 날씨, 지난 토요일(8일) 답답한 서울을 벗어났다.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월례 역사답사단에 동승했다. 전라북도 익산과 군산일대 역사유적 답사였다. 늘 그렇듯이 이 답사는 역사기행이다. 더 나아가 역사‘여행’이기도 하다.

유적 앞에서 당대 살았던 인간 군상들의 삶이 펼쳐진다. 오전 답사를 마치면 현지 토속 음식이 기다린다. 유적 이야기를 안주삼아 마시는 술은 또 왜 이렇게 달콤한지. 어쩌면 이 맛에 답사를 가는 지도 모르겠다. 삶에 찌든 도심을 탈출한 해방감 속에서 삶이 깊어진다.

▲군산시 일대에는 일제침략의 흔적, 일본식 가옥들이 관광상품화 되어 '시간여행' 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서기193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자는 듯이 간판이 걸려 있다. 

답사지 중에 군산은 일제침략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라 일부러 이곳을 답사지 중 하나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군산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라는 곳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눈에 띄는 건축 장식이 즐비했다. 이미 관광 상품으로 자리 매김했는지 길 담벼락과 가게들이 일본풍 나무벽재로 장식되어 있었다. 70년대 어릴적 초등학교 건물 외벽이 시커멓게 방수 처리된 나무판자로 되어 있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판자를 겹쳐서 외벽을 만들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일제침략기 일본식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국사에 들어서니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는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급경사로 된 시컴헌 기와지붕이 유난히 크게 들어왔다. 실제로 지붕이 건물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크게 만들었다. 일반 우리 사찰의 대웅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 절간 대웅전 지붕은 학이 날아갈 듯이 날개 짓하는 모양이라면 이 대웅전은 뭉툭한 바위덩어리가 지붕에 내려앉은 느낌이다.

▲일본인이 서기1909년에 지었다는 동국사 대웅전. 일본식 절의 전형이다. 지붕이 급경사를 띄고 있다. 일본기후에 맞게 만든 것이다. 눈과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서는 지붕에 오래 남지 있지 못하도록 급경사로 만들어 눈과 비가 내리는 데로 곧 바로 쓸려 내려가게 했다. 이 절은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절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멋은 없고 오직 실용성만 보였다. 일본은 기후가 습하고 비와 눈이 많은 나라다. 그러다 보니 비나 눈이 내리면 바로 바로 빠지게 지붕을 급경사로 만들어야 한다. 일본에서나 통하는 건축양식을 이 땅에도 그대로 적용시키려 한 것이다.

오직 실용성에 기초한 건축물이라는 것은 단청 장식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나라 사찰 건물은 오방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 자체가 예술이다. 그러나 이 대웅전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멋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일본인들의 정서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웅전 왼쪽에는 범종이 달려있는 전각이 색 바랜 채 서 있었다. 종을 때리는 타종 기둥 역시 삭아서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가 있었다. 역시 예술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종이 없으면 안 되니 그냥 만들어 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일본식 범종. 크기도 한국의 절간에 있는 범종에 비해서 너무나 작다. 또 화려하게 채색한 우리 범종 전각과는 다르게 단조롭게 꾸며져 있다. 세월의 녹인지 종을 치는 나무대가 삭아 있다.

그 옆에는 검은 돌로 된 널찍한 커다란 비석벽이 서 있었다. 두 개로 붙어 있었다. 원래 이 절을 만든 일본불교 종단에서 일제침략을 반성하고 참회한다면서 새 겨 놓은 비석벽이었다. 서기2012년에 일본승려들이 만들어 세워놨다고 한다.

그 앞에는 일제침략의 가장 뼈아픈 만행의 상징, 소녀상이 서 있었다. 최근에 세워진 듯했다. 역사 교훈을 삼자는 뜻이다. 이 동국사에 사실 참회문 비석 벽과 소녀상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없었다면 일제침략이 진행 중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웅전 뒤쪽은 옹벽으로 둘어쳐져 있었다. 그 옹벽 한 부분에 철문 하나가 굳게 닫혀 있었다. 물어보니 방공호라고 한다. 조선 땅도 일제침략 전쟁터였기 때문에 미국 등으로부터 언제 공습을 받을지 모르니 이렇게 방공호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일본군에 끌려가 성착취를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소녀상이다. 그 뒤로 일본인 승려들이 일제침략을 참회하고 반성한다는 글 귀가 새겨진 검은 비석판이 서 있다. 오른쪽은 일본 범종 전각이다.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답사 해설을 맡은 김병기 박사가 동국사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동국사 입구에는 문 양쪽에 문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나무가 아니라 시멘트 기둥으로 되어 있다. 동국사와 함께 일제침략기에 만든 것이다. 세월의 녹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한쪽 기둥 벽에는 이 절을 지을 때 시주한 사람들 이름과 ‘시주施主’라는 글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 다른 한쪽 기둥에는 ‘소화昭和 구년九年 육월六月 길상일吉祥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소화 9년이면 서기1933년이다. 그런데 시주 자 중에 한 사람 이름은 누군가 파내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파헤쳐진 글자가 네 개다. 일본식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화라는 글자도 파내져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깊게 새겨 놓았는지 ‘소昭’자는 미쳐 다 파괴하지 못하고 깊숙이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를 통해서 파괴된 두 글자가 ‘소화’ 임을 알 수 있었다.

▲ 일본인 히로시가 살았던 일본식 집이다. 방마다 저렇게 나무창살이 마치 감옥과 같이 쳐져 있다.

아마 소화 연호를 썼던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하고 일제가 물러가자마자, 파내버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호남평야 조선인민들이 수탈이 가장 심했다고 하는데, 그 원한을 이렇게 폭발 시켰을 것이다.

일제침략본부, 조선총독부 정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일본불교, 동국사다. 이곳 일본인 승려들은 그래도 일제관리보다는 수탈과 착취가 덜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절간의 일왕연호와 일인 이름을 부숴버렸다. 조선민중의 한 맺힌 원한이 여전히 들리는 듯하다.

동국사는 서기1909년 일본인 승려가 세운 절이다. 일제는 이미 서기1877년 조선과 수교조약을 맺은 직후부터 일본불교 포교에 나섰다. 이러한 가운데 서기1904년에는 군산에도 포교소를 설치했다. 일제의 조선침략 선봉대 역할을 담당했다.

사상전을 통해서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공작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킨 이듬해 서기1911.06.03.자로 전국에 사찰령을 발령하여 본격적으로 왜색 불교화 식민정책을 감행한다.

이 쓰라린 고통을 잘 알기에 일제가 물러가자마자, 동국사 입구 대문기둥에 새겨진 일제침략의 원흉, 일왕의 흔적을 쪼아 없앤 것이 아닐까.

▲ 이 땅에 건너와 농장지주 노릇한 일본인 히로시집 앞 뜰 정원에서 이대구 선생(오른쪽 앞줄 서 3번째)이 일본식 정원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답사일정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장소로 바삐 움직였다. 찾아가 간 곳은 일본인 지주 가옥이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켜 버렸으니 이제 이 땅은 일본제국의 한 지방이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도 그렇게 여겼다.

이에 따라 일본열도에서 일본인들이 대량 이주해 정착했다. 특히 곡창지대, 호남은 품질 좋은 한국 쌀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선호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식 가옥은 군산 신흥동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옥에 들어서는 길목도 아예 일본풍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차집이나 음식점이 판자를 겹쳐서 만든 외벽형태로 꾸며져 있었다. 이미 관광 상품화되어 있었다.

일본식 가옥 입구에 들어서니 집 내력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농장을 경영하던 히로시라는 일본인 지주 집이라는 내용이다. 국가에서 아예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있었다. 일본식 건축물이 그렇듯이 이 집도 그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들어가는 대문도 좁았다. 집 창문에는 나무 창살이 쳐져 있었다.

밑 부분은 받침돌에 나무기둥을 세워서 땅에서 떨어드려 놓았다. 이렇게 거실 밑 부분을 땅바닥에서 이격시켜 놓은 것 역시 일본기후환경의 산물이다. 일본은 습기가 많은 땅이라 집과 땅바닥을 띄어 놓아야 습기가 덜 찬다. 다다미라는 돗자리가 일본 집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과 같다. 습기를 차단하려는 생활문화의 산물이다.

▲ 히로시 집 뜰에 방문객들이 쌓아높은 조약돌 탑이 큰 돌위에 올려져 있다. 우리 나라 어디에 가도 명승지나 유적지, 사찰에 가보면 어김없이 이런 조약돌 탑이 앙증맞게 서 있다. 우리 민족의 신앙심과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 땅에 와서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 일본집이 목재가 많이 사용된 것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습기를 먹기 때문에 습기로 인한 끈적거림을 줄이고자 하는 고육지책이다.

그리고 일본 건물을 가만히 살펴보면 창문에 반드시 나무 살을 세로로 여러 개 쳐놓고 있다. 마치 방범창살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런 풍으로 된 가게가 이제는 일본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일식 음식점이나 술집이 이렇게 꾸며져 있다. 이 히로시 일인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정원에는 담벼락을 따라 무성한 나무들이 심겨 있다.

그런데도 방 창문에는 이 나무 창살이 빼곡하게 쳐져 있다. 왜 이렇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린 것은 작년 일본에 갔을 때였다. 풍물굿패 민간교류 차원에서 일본에 갔다.

▲ 토요일 오후 나들이 나온 아버지와 아들이 일본인 히로시가 살았던 일본식 가옥 앞 뜰에서 탑을 같이 쌓고 있다. 무엇을 빌고 있을까.

현지 일본인들의 안내로 일본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지역을 다녔다. 한번은 일본성에 올라갔다. 꼭대기에 망루까지 올라갔다. 임진왜란 당시 이 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고 한다.

나고야 성으로 기억난다. 망루 안은 꽤 넓었다. 그런데 밖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창문마다 두꺼운 나무창살이 쳐져 있었다. 창살 틈으로 밖이 시원하게 내다 보였다. 그러나 밖에서는 망루 안을 볼수 없었다. 나무창살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무사시대가 무려 8백년가량 지속된 나라다. 일본인들이 대부분 우리 땅에서 간 개척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문화와 일본문화가 고대로 올라가면 갈수록 같아진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부분에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다르다. 일본식 건축물이 한 사례다. 이 히로시 일본인 지주 가옥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나무 창살로 어김없이 채워져 있는 집 구조다.

▲군산시 월명거리에 있는 천주교 한 성당. 관광지에 있어서 인지 성당도 일본풍을 유지하고 있다. 입구 양쪽에 목재로 되어 있는 일본식 구조물이 어색하다. 현재 청와대 대문 양쪽에도 이와 똑 같은 개념의 대문 기둥이 있다. 청와대를 설계한 기업체의 의지가 새겨진 것일 것이다. 왜색 풍이라고 이미 수없이 지적 되었지만 고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것은 무사시대 때문이다. 수많은 섬으로 된 일본열도다. 그 만큼 지역별로 독립된 정치세력의 할거가 많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때문에 정치체 별로 서로 머리가 되고자 싸우는 일도 많았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막부시대라고 부른다. 싸움은 전쟁으로 이어지고 전국시대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칼이고 무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 공격받아 죽을지 모른다.

여기서 상호불신과 경계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손자병법 문화가 일본인 정서 밑바닥에 깔리기 시작했다. 무사들이 지배하는 막부시대가 도쿠카와 막부에서 모양만 바꾼 ‘천황제’가 사실상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 일본 극우세력의 소굴, 자민당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이 무사들 후예다. 일제침략세력이 이들의 조상이다.

지금 수상인 아베와 지난 수상인 고이즈미가 모두 명치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 야마카타 아리토모,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후예다.

▲김병기 박사가 동국사 범종 전각 옆에서 동국사 유래와 일제침략을 답사자 일행에게 설명하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병기 박사.

한편 히로시 집은 일본식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석물과 향나무 등으로 조경되어 있다. 이날 답사에는 이대구 선생이 함께 했다. 그가 일본 조경에 조예가 깊어 히로시 집에서는 이대구 선생이 자세하게 설명 해주었다. 일본인들은 자연을 집 밖에 나가서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집안에 자연을 끌어다가 즐긴다고 한다. 소위 분재가 대표사례다.

그래서 정원에 밖의 산천을 축소해 만들어 놓고 본다. 실제 히로시 집 정원이 그렇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넓은 마당이 없다. 넓은 뜰이 온통 인공 구조물로 꾸며져 있다. 한국인은 그것을 보면 갑갑하고 답답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을 것이다. 히로시의 집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일제침략의 흔적을 보여주는 일본식 고급 유흥시설이 있었던 곳. 가운데는 커다 연못이 있고 둘레에는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일본식 고급 집들이 감싸고 있다.

그러면 왜 일본인들은 자연을 밖에 나가서 즐기지 못하는 것일까. 밖에 나가면 온통 적이고 언제 칼 맞을지 모른다. 그래서 집에다 꾸며 놓고 대신 즐긴다. 이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모두 무사, 막무시대가 만들어 낸 비극의 산물이다. 무사시대가 낳은 불신과 경계심 문화 때문이다. 일본인은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자기 본심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도 여기에 있다.

약육강식, 강자존의 칼잡이 문화, 무사들의 시대, 막부시대가 만들어낸 일본 특유의 문화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달리 홍익인간 문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실용에 기초한 무한경쟁, 상호불신, 승자문화가 주류다.

8백년의 무사, 막부시대, 이것이 우리와 일본이 근본에서 다른 이유고 천 수백 년동안 이 땅과 열도를 숙적으로 갈라놓은 이유다.

▲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건물. 일제는 은행업을 통해서 금융을 장악하여 조선경제를 일본화 시켰다.

정원에는 관광객들이 만들어 놓은 돌멩이 탑들이 아기자기 하게 올려져 있었다. 우리 민족의 특유한 신앙심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산이나, 유적 등 전국 어디를 가도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 놓은 조약돌 탑이 있다. 시민들은 일본인 가옥에 와서도 우리 정신 원형으로 꾸며 놓아 신앙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작은 돌을 하나하나 쌓으면서 무슨 소원과 복을 빌었을까.

히로시 집을 둘러 보는 내내 유명 관광공간이 되었는지 끊임없이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연인 손잡고, 아이들 손잡고 그렇게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인 집을 둘러보았다. 그들에게는 이 집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일본인 집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군산시는 일제침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국사에서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해양로, 장미동 일대를 시간여행 관광지로 만들어 놓았다. 일제침략기로 돌아가서 치험해 보자는 것이다. 시간여행 관광지 큰 길 양 옆에는 일본인들이 식민통치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고풍스런 집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넓은 연못을 가운데 두고 일본인 지배자들이 먹고 마시고 놀던 유흥 요정들이 이 땅의 주인을 위압했다. 소외감과 외소 함에 위축되어 곧 바로 나왔다.

▲일제는 철길을 이용해 이 땅의 물자를 일본으로 수탈해 갔다. 참혹한 일제침략의 흔적, 철길을 일부 남겨놓고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체험 시키고 있다. 시민들이 '시간여행 꼬마열차'를 타려고 줄 서있다.

항구에 가까운 거리에는 일제침략의 상징, 구 일본18은행 군사지점 건물이 도도하게 버티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서울로 올라오는 답사버스가 정차해 있는 주차장으로 서둘러 갔다. 주차장 옆에 시간여행 철길 남아 있었다. ‘시간여행 꼬마열차’ 타기 체험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젊은 부부와 연인들이 꼬마열차를 타려고 줄서 있었다.

남아 있는 저 철길이 호남평야 기름진 우리 쌀을, 조선인을 노예로 부려 일본으로 실어간 피눈물의 길인지 알고 있을까. 짓누르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서울로 돌아가는 답사버스에 올랐다(익산미륵사지 일대 답사기는 2부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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