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균 4개대대 이끌고 4천7백리 걸어서 해방조국에 돌아오다

글: 박용규(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회 연구교수)

 

김두봉,

국어학자, 대종교인, 공산주의자로 국어독립투쟁,

무장독립전쟁에 뛰어들다

해방 후에는 북조선 건국 중심인물로 떠오르다

김일성 1인 숭배 우상화에 반대하다 숙청되다

 

▲앞줄 왼쪽 첫번째가 김두봉. 사진은 대종교 나철이 수행원들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 단군이 모셔져 있는 삼성사로 가다가 도중에 사진관에 들어 찍은 것이다. 사진에 '아사달산 봉심행'이라고 적혀 있다. 아사달산은 황해도 구월산으로 보인다. 김두봉은 주시경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어독립투쟁에 뛰어 들었다. 대종교는 그의 사상무장에 큰 기여를 했다. 국어독립투쟁도 대종교 영향이 컸다(편집인 말).

김두봉은 우리 말을 어떻게 보았나

주시경의 한글운동에 대한 반제국주의 인식은 김두봉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두봉의 민족운동의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김두봉은 1909년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안희제·남형우·신백우·이경희 등 동지와 함께 조직하였다.

그는 주시경의 수석제자였다. 1911년 주시경이 운영한 조선언문회(국어연구학회의 후신) 산하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중등과를 제2회로 졸업하였다. 1913년 3월 고등과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14년 주시경 사후에 그가 주시경을 대신하여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강사로써 1916년 9월 3일까지 활약하였다.

이후 중동·보성·휘문 등 중등학교에서 조선어문법을 교수하여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중등학교 현장에서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하다가, 주시경의 학설을 계승하고 자신의 주장을 넣어 󰡔조선말본󰡕(1916)을 신문관에서 출간하였다.

한편 1912년 나철, 조완구 등과 함께 대종교에서도 활약하였다. 1916년 9월 대종교 1대 교주인 나철의 구월산 봉심(奉審)에 수석시자(首席侍者)로서 참여하였다. 당시 그의 대종교 교질(敎秩)은 상교(尙敎)에 있었다. 상교란 대종교에 입교한 지 5년 이상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지위에 해당하는 서열이다.

그는 일제의 대종교 탄압에 항의하고자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한 나철의 행동을 알았다. 1916년 이후 보성·휘문·중앙고보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배일(排日)애국사상을 주입하는데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시위에 가담하였고, 일본경찰의 체포를 피해 같은 해 4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으로 해외동포교육과 독립운동에 분투하였고,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의 편집책임을 맡았다.

또  한독당·민족혁명당의 창당에 관여하였으며, 조선의용대 총대장,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서 활동하였다. 해방 뒤 1945년 12월에 귀국한 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는 등 북한 정권의 2인자로 부상하였다.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이 조선인민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왼쪽 태극기 아래 김일성이 보인다. 태항산은 중국에 있는 산이다. 조선의용군의 활약으로 태항산에 고립되어 있던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주역들이 일본군 공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김두봉은 국어학자이면서 조선의용군을 지휘한 무장독립투사다. 그는 일제패망을 예견하고 자신 휘하 조선의용군 4개대대를 이끌고 4천7백리를 걸어 해방조국에 들어왔다. 조선의용군은 광복군과 같은데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서 무장해제를 당했다(편집인 말).

한편 중국시절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도 국내의 한글운동에 관심을 드러내었다. 1930년 1월 하순경 상해에서 김두봉은 다음과 같은 말을 김양수(사전편찬 비밀후원회 회원)에게 하였다. 김두봉의 다음과 같은 의견은 상해에 갔다가 돌아온 김양수를 통하여 이극로에게 전달되었다.

한갓 조선 어문의 연구 또는 사전 편찬은 민족운동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연구의 결과, 정리 통일된 조선 어문을 널리 조선 민중에게 선전 보급함으로써 처음으로 조선 고유 문화의 유지 발전, 민족의식의 배양도 기할 수 있으며, 조선 독립의 실력 양성도 가능한 것이니 다음부터는 이와 같은 방침으로 진행하라.

상해에서 그가 한 이 말은 고국의 동지들에게 한글운동의 입장을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한글운동이 조선어학자들의 조선어와 한글의 연구에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고, 통일된 민족어 규범이 조선민중에게 보급됨으로써 조선의 고유문화를 유지하고 민족의식을 배양하며 조선독립의 실력 양성도 가능한 민족운동으로써 전개되기를 희망하였다.

즉 일제를 비판하는 반제국주의적 의도를 가지고 한글운동을 전개해야 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김두봉의 의견은 국내 한글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한글운동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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