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먼저다' 외치는 문정부는 속절없이 죽어가는 민생 앞에 각성해야 한다.

글: Edwad Lee(자유기고가)

 

 

설조스님 단식, 쌍용차는 사회 문제로 대통령 관심 가져야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는 사회적 범죄집단과 다르지 않아

문대통령, 정치인 아닌 이상 구현해 내는 ‘정치가’ 돼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분양소가 서울 덕수궁 담장길에 차려져 있다. 벌써 30명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명박 정권 당시 해고노동자들이 저항하자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편집자 말).

작금의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가 사회 범죄 양상을 띠고 있다. 설조 스님이 조계종 적폐청산을 요구하며 벌써 30일째 단식투쟁 중이다. 88세의 고령인 그가 목숨을 담보하고 벌이는 불교계 개혁은 이제 특정 종교를 넘어 우리사회 문제로 봐야 옳다. “종교문제는 종교 안에서 해결하라”는 정부의 방침은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종교인도 결국은 실정법을 피할 수 없는 국민으로서 마땅히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정부가 사회 범법을 저지른 종교지도자들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이는 형평성의 문제로 차후에 종교를 치외법권으로 악용할 틈을 주게 된다. 사실 종교는 인류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민화를 가장 심하게 획책하는 곳이기도 하다. 종교의 신성함과 순수성이 배제되고 물러간 자리에 권력과 자본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드러난 기현상이다.

종교계 타락상은 이미 오래 된 일로 사실 특별한 문제도 아니다. 특히 일부 종교지도자라는 분들의 획일적 사고와 편협성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인간 영혼을 구제한다는 분들이 종교의 정신인 약자의 편에 서지 않고 권력의 편에서 사회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종교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위엄’을 위해서 아주 쉽게 신을 판다. 이럴 때 종교인들은 이미 신앙인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꼭 흉기를 들고 사람을 위협해야만 흉악범은 아니다. 이해타산을 위해 신을 빙자하는 태도는 이미 폭력의 나락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게 ‘종교적 폭력’을 행사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잘못된 신앙관을 가르치고 정당화 해 왔다. 이는 오랫동안 일반화되어 온 현상으로 상당한 불협화음이 상존한다. 급기야 ‘종교개혁’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매체를 타기에 이른 것이다.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 지도자들은 확고한 신앙과 철학이 있어야 하고 시류에 쉽게 편승해서는 안된다.

인간 영혼을 다루는 사람들로서 좀더 진중하고 긴 안목이 필요하다. 종교계가 불미스런 일로 보도를 타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게 지도자의 덕목이다. 모두 자신의 문제임을 통감하는 종교인다운 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한다. 허나 우리사회는 더욱 황폐하고 이기적이며 공격적이서 어디에서도 종교인다운 모습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겸손과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행함이 없는 우리사회의 종교 현실이다. 참다운 지도자라면 개탄하고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야 옳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소양과 현 시국에서의 종교인들의 역할을 묻는 것마저 두려운 현실이다.

▲설조스님이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단식중에 있다. 서기2018.07.19. 현재 단식 30일째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조계종 적폐를 청산촉구하고 있다. 범계를 하고 범법을 저지른 인물들이 조계종을 이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것을 제1의 청산 과제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가루를 내서 조계사에 묻으라고 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에 해결촉구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편집자 말).

과학의 궁극적인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일 것이다. 인류에게 이익을 주는 산업상의 추구, 인간을 기쁘게 하고 순화시켜주는 예술, 인간의 지성을 넓히고 높이는 학문, 이러한 것들은 영원하고 무한한 근원에서 이 지상으로 나온 방대한 진리의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신학은 관찰하여 밝혀진 진리를 질서 정연하게 제시하고, 그것이 인생사에 적용되는 방법을 말해 준다.

허나 신학적인 지식에 정통한 사람도 종교적인 면에서나 심지어는 도덕적인 품성에서조차 크게 결여될 수도 있다. 신학이 이론이라면 종교는 실천이다. 신학이 교훈이라면 종교는 모범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보완하여 완전해 질 수 있다.

신학적인 지식은 종교적인 신앙과 실천을 강하게 해 준다. 학문으로써의 신학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지식을 주로 지성으로 룬다. 종교는 그러한 지식 또는 참된 믿음을 개인의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종교의 정신은 ‘사랑’이고 이는 인간존중과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우리사회의 큰 문제들, 국민 대다수가 가슴으로 염려하는 일에 마땅히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해결의지를 보여주시도록 간곡히 청한다. 고령의 설조 스님이 불교계 개혁을 위해 인신공양을 마다하지 않고 폭염에 30일째 투쟁하는 단식은 불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 문제다. 얼마 전에는 쌍용차 해고자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30번째다.

왜 항상 우리사회는 목숨을 담보해야만 하는 지, 이런 극단의 방법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만 하는 지, 무엇보다 인권을 중시하는 대통령께 묻고 싶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을 비롯해 쌍차, 통진당 해산, 세월호, 천안함 등 국민의 상식선에서 도무지 이해가 어려운 사건들에 대통령의 관심과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한다. 더 이상의 인명을 잃는다면 '사람이 먼저'라는 문정부의 지침은 의미 없다. 우리사회의 이런 암적인 적폐청산 없이 무엇을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완전한 해법이란 영원히 없다. 다만 가장 근사치로, 최선이라고 하는 방법에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것이 정부여당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자 정권을 쥐어준 국민에 대한 약속이 아닌가. 우리는 완전을 향해가는 그런 과정을 사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완전은 이룰수 없음을 알고 지나친 좌고우면을 경계해야 한다.

즉 무엇이든 약속은 실행해야 한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이 마저도 진보하는 과정이지 않은가. 정치가는 이상을 말하는 자가 아니고 시민들과 더불어 개혁하고 구현해 내는 사람이다. 우리사회는 ‘정치가’가 없다. 이상을 부르짖고 투쟁한 정치인들은 있었지만 실현한 정치가는 한 두 명에 불과하고 그마저 미완이었다. 문대통령께 ‘정치가’를 주문한다면 너무 가혹한가?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