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남북한 국어생활은 주시경 선생 국어독립투쟁 덕이다.

글: 박용규(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일제는 일본어를 국어, 조선어를 지방어로 만들었고,

조선어를 줄이면서 동시에 일본어로 채워나갔다

말기에 가서는 조선어 과목을 폐지시켰다

이에 맞서 주시경은 조선어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이를 위해 대종교로 종교를 바꾼다

‘국가흥망성쇠는 국어흥망성쇠와 직결된다,

국어 잃어버리는 것 민족 멸망을 뜻한다’

 

▲ 주시경(周時經, 서기1876.12.22.~서기1914.07.27.)은 39세라는 짧은 삶을 일제에 대항하여 국어독립투쟁으로 불꽃같이 살다갔다. 그러나 그 밑에서 김두봉 등 이후 우리 현대사를 이끈 걸출한 언어학자이자 정치가들이 나와 선생의 정신을 잇는다(편집자 주).

왜정치하는 우리의 말과 글인 조선어와 한글이 침략자에게 국어와 국문의 지위를 빼앗긴 시기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기의 국어였던 조선어는 이 시기에 방언 또는 지방어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며 일본어를 국어로 위치 지워 보급하였다. 그들은 일본어 보급을 통해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언어인 조선어를 공교육에서 단계적으로 축소해 궁극적으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자 했다. 식민지배 초기에 일제는 조선인의 반발 때문에 학교 현장에서 조선어과목을 존치시켰다.

하지만 이 과목은 일본어 보급을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였고, 전시파쇼기인 1938년부터는 조선어과목까지 폐지하였다. 전체 일제시기 동안 조선의 민간인에게도 일본어를 보급하고자 일어강습소를 증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학교·회사·공장·각종 단체에서의 일어 상용을 장려하고 강요하였다.

일제의 조선어와 한글 말살 정책에 맞서 조선어연구회를 이은 조선어학회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합법적 공간을 이용하여 간접적 소극적인 방법으로 언어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시기 국어의 확립에 기여한 주시경의 노선을 이어받은 한글운동가측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민중에게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의 민족어인 조선어라고 하는 모국어 규범을 수립하여 장차 도래할 민족국가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먼저 반제국주의 인식의 기본 틀을 제시한 주시경의 우리 말글 인식을 살펴보자.

애국계몽기 한글운동을 전개한 주시경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어와 국문을 연구하고 보급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의 회복을 갈망한 주시경은 활발히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시경은 1907년 7월 학부 내에 설치한 국문연구소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같은 달 그는 하기국어강습소를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하여 한글을 가르치면서 자국사상을 장려하였다.

한편 주시경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상동 청년학원에 국어 야학과(夜學科)를 개설하여 교수하였는데, 이때 애국심 때문에 기독교에서 종래의 국교인 단군교(곧 대종교)로 개종하여 동지를 모으려고 운동을 일으켰다. 190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월 5일) 나철은 단군교(대종교)를 중광하였다. 필자는 주시경이 1909년경에 대종교에 입교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주시경은 1908년 1월부터 저작하기 시작한 <국문초학>을 1909년 2월 15일에 박문서관에서 발행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대종교 역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 우리나라 역사가 단군조선·여러 부여나라·고구려·발해로 이어졌다고 기술하였다. 단군조선의 강역을 김교헌이 간행한<신단실기>(1914)에 나오는 내용과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단군 때 우리 땅은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조령을 넘었고, 서는 료하를 건너고, 북은 흑룡강을 지나니..檀君時 疆域 東至大海 南踰鳥嶺 西渡遼河 北跨黑水..."

이로써 보면, 1909년 <국문초학>간행 이전에 주시경이 대종교 관련 책을 읽었음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주시경은 국어의 연구를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에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였다. 그 산하에 국어강습소를 개설하여 한글을 보급하였다. 동시에 독립국가에서 사용되는 국어의 문법과 음운을 다룬 책을 저술하였다. 즉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초학>(1909), <국어문법>(1910)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국문법 책을 바탕으로 국어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국가의 흥망성쇠도 언어의 흥망성쇠에 달려있다고 판단하였다. 민족국가의 징표로써 그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의 유무로 보았다. 그는 민족의 구성요소로 역(域), 종(種), 언(言)을 들면서 역은 독립의 기(基)요, 종은 독립의 체(體)요, 언은 독립의 성(性)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주시경은 독립국의 본질로 언어를 강조하였다.

그는 “국가의 성쇠盛衰도 언어의 성쇠盛衰에 在하고 국가의 존부存否도 언어의 존부存否에 在한지라”라고 언어의 중요성을 내세웠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처럼 주시경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침략자들이 국권을 강탈하고 일본어를 보급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언어주권으로 민족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어라는 국어를 상실하게 되면 국권회복과 독립의 쟁취가 곤란하게 되리라고 보았다. 국어 상실은 독립의 성(性)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주권 상실은 국어라는 용어의 상실을 가져왔다. 단적인 예가 주시경의 <국어문법>(1910)이 <조선어문법>(1911)으로 재발간된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정치하에는 일본어가 국어로 자리를 잡았다.

이에 한글운동가인 주시경은 국어 대신에 조선어로, 국문 대신에 배달말글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1911년 9월 17일 국어연구학회를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이 학술단체를 통해 조선의 말글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마찬가지로 조선언문회 산하에 조선어강습원을 개설하였다. 즉 식민지 전에 설치한 국어강습소를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하여 한글 보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조선어강습원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인 국어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면서,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이 유산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시 1913년 3월 23일에 조선언문회를 ‘한글모’로,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을 ‘한글배곧’으로 각각 개칭하여 조선어와 한글 연구와 보급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과로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이후 1915년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한글모’는 해산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민족어인 조선어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의 한글 운동에는 반제국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일제시기 주시경은 조선언문회라는 학술단체와 조선어강습원이라는 한글강습소를 조직하고 설치하여 조선어와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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