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잇는 우리 역사 체계 다시써야 한다.

 

김수지 역사저술가,

우리민족은 서양민족주의와 근본에서 다르다.

그들은 역사가 일천하거나 없다, 반면 우리는 역사가 최소한 5천년이다

우리역사에서 '고조선'은 '단군'이 개국한 '조선'만이다

기자조선, 위만조선은 우리역사 아니다

기자조선은 서기12세기경 중국 상나라 쇠퇴 이후 난민들이

조선 서쪽 변방으로 몰려들자 단군이 살 곳으로 마련해 준 나라다

위만조선은 이 기자조선을 중국인 위만 망명자들이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다

 

▲서기2018.06.12. 서울 종로3가 태화빌딩에서 미사협(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주최 시민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김수지 역사저술가는 윤내현 전 단국대 교수 저술속에 나타나는 고조선 역사관을 전했다. 

서기2018.06.11. 미사협(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상임대표 허성관) 6월 시민강좌가 지난 달에 이어 서울 종로구 종로3가에 위치한 태화빌딩에서 열렸다. 이 날 강좌는 좀 색다른 주제였다. ‘윤내현의 고조선연구’ 해설이었다. 한 역사학자가 평생을 연구해 온 주요 저서를 정리해서 전달하는 시간이었다.

윤내현은 전 단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부총장을 맡은 바 있다. 이날 강연은 김수지 역사저술가가 맡았다. 그는 윤내현 역사학을 깊이 들여다 본 인물이다. 수년전부터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를 중심으로 그의 역사관을 연구한 역사저술가다.

이날 그는 본 강의에 앞서 민족주의를 얘기했다. 현재 이 나라 주류사학계는 민족주의를 원수보듯 한다. 민족이나 단군과 같은 우리 정체성을 나타내는 주제나 용어를 이들의 역사학에서는 찾아 보기 힘들다.

설사 보인다 하더라도 모두 역사학에서 금지어, 불온한 것으로 낙인찍고자 언급하는 정도다. 이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민족사학을 증오, 저주하는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사정을 이날 강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에서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개념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양에서 말하는 민족주의 개념과 우리의 민족개념은 근본에서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서양은 역사가 짧다 보니 새롭게 민족을 개념지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반면에 우리에게 민족은 살과 뼈와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깊이와 폭이 서양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최소한 단군이 조선을 개국한 서기전 2333년부터 생겨난 개념이라고 잘라 말했다. 민족공동체가 오래된 만큼 민족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그런데 어떻게 서기 이후 한참 뒤에 이합 집산하면서 만들어지는 서양 민족과 비교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우리 민족 의식은 이처럼 오래되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가지는 민족의식과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자 만주신흥무관학교에 조선에서 수 많은 청년들이 나라를 되 찾겠다고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또 러시아 이르크추크에서도 사회주의 계열 항일 무장독립투쟁 때에도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젊은 고려인들이 일제와 싸우겠다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는 민족의식이 시공을 초월해서 그들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항일무장투쟁사를 공부했는데 조선총독부가 일제강점기 어떻게 우리민족을 제거하려고 했는지 사례를 들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훈시를 보면 ‘고루한 민족주의를 탈피하자’고 했다고 한다. 이어 조선총독부 후예들이 오늘날 민족, 민족주의를 비방하고 금기시한다고 비판했다.

▲ 위 지도에서 붉은 화살표 표시 지역이 이날 강연에서 발표한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위치했던 곳이다. 현재 중국 하북성 노룡현일대로 나타난다. 화살표 왼쪽 물줄기는 란하다. 고대 요수로 밝혀지고 있다.

이날 본 강연은 고조선=조선(단군)의 실체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윤내현 전 교수가 어떻게 조선의 실체를 발굴 정리했는지 조명하는 시간이었다. 김수지 강사는 이날 강연을 위해서 68쪽에 달하는 강연 자료를 준비해왔다. 주최 측에서는 이를 참석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김수지 강사가 이날 한 강연과 강연 자료에 따르면 윤내현 전 교수의 조선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실체를 가장 이른 시기에 알려주는 중국 자료에는 기자조선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은)나라와 관련이 있다.

기자조선은 기자가 세운 조선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기자는 상나라 말기 서기전12세기 사람이다. 기자가 실존한 인물인가 말이 많다. 그러나 실제 중국 하남성 상구현에 그의 묘가 있다. 또 상나라가 실존했고 이 상나라 사람이라고 했으니 실존인물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가 조선으로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이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이 조선은 기자가 오기 전에 존재한 조선이니 단군이 세운 조선일 수밖에 없다. 기자는 서기전 12세기 사람이다. 이 때 이미 조선이 있었다.

기자는 중국 문헌에서는 주나라 무왕이 봉지를 주어서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도 주나라 무왕이 기묘년에 즉위한 때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진서> 지리지 등 중국 문헌은 기자가 온 곳이 고죽국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오늘날 하북성 난하 인근 노룡현을 가리킨다.

나중에 위만조선이 들어서고 다시 망한 뒤에 세워진 한사군 하나인 낙랑군 조선현도 이곳이라고 한다. 또 <사기> 몽염열전, <태강지리지>, <수경주> 등 중국 문헌사료를 종합해 보아도 조선현이 기자가 온 곳임을 직, 간접으로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기자가 와서 세운 조선이나, 위만이 와서 세운 조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날 김수지 강사는 이들 나라를 난민이 만든 나라로 보았다. 현재도 아프리카 난민들이나, 중동 난민들이 유럽으로 대량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리스에도 이 난민들에게 일정 지역을 떼어 주어 거기에 살게 하고 있다. 독일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가 독일은 이들에게 정착지를 주고 관리를 한다.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도 이와 같은 성격이라는 것이다. 기자가 올 때는 5천명을 이끌고 왔다고 한다. 위만이 올 때는 사람 수는 안나왔지만 당시 전국시대 난을 피해서 난립하던 군소국가의 난민들이 조선 서쪽 국경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조선은 서쪽 변방에 이들에게 정착지를 주고 살게 했다. 그 지역이 오늘날 하북성 난하 인근으로 나타난다.

이렇기 때문에 이들 역사를 우리역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민족 난민들이 모여서 만든 역사가 어떻게 우리 역사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역사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날 강좌에 참석한 시민들은 강사의 강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강연 중간에 질문 공세를 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역사를 당연히 우리 것으로 여기고 우리 역사 시작 부분에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후 한나라 식민통치를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이 식민통치 기관 중에 낙랑군이 북한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중국 선진문물이 들어와 우리 역사가 빛나게 되었다는 식으로 국사책으로 교육받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식민기관이 4백년이 넘게 존속했으며, 망했어도 그 영향력이 여전히 강해서 이후 남부 삼한시대 역사를 선진문물로 이끌었다는 식으로 주입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가 왔을 당시 조선은 나라였는가. 강단주류사학에서는 국가 성립 기준을 청동기로 잡고 있다. 이들은 우리 청동기시대를 서기전10세기경으로 잡는다. 최근에는 올려잡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주류는 서기전 10세기 이전으로 더 올리는데 아주 인색하다.

그러나 내몽골지역이나 하북성 지역 소위 홍산 문화 지역의 하가점에서 출토되는 비파형 청동 검은 서기전 15세기를 넘어간다. 더구나 국내 경기 양평 양수리 고인돌 유적과 전남 영암 고인돌 유적을 측정해 본 결과 서기전 24세기경으로 나온다.

또 청동기와 고인돌 분포도를 보면 우리 땅과 만주는 물론 요서지역을 아우른다. 충분히 나라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중국 서시기로 알려진 서기전828년경 이야기로 알려진 <시경>을 통해서도 조선의 실체를 알 수 있다. ‘한역’편에는 한韓이라는 존재가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이 한은 조선의 단군을 중국에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한韓은 ‘한汗‘으로서 몽골, 여진 등 북방민족 임금을 나타내는 ‘칸Khan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어떤 형태였을까. 중앙의 왕이 지방을 직접 통치하는 소위 중앙집권국가였을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 때는 제사장 중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지방분권형 국가라고 보아야 한다. 이 조선은 확인되는 것만 해도 70여개의 거수국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는지 나라 이름까지 나와 있다.

▲손윤 미사협 공동대표가 6월 미사협 정기 시민강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그는 강단식민사학계의 음해성 감사원 감사청구에 맞서 동북아역사지도집 부실제작에 따른 47억원 국고탕진에 대한 동북아역사재단에 책임을 물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고 밝혔다.

결국 조선은 거수국들로 이루어진 연합체 국가였다. 만약에 이 조선을 인정하지 않으면 만주지역의 독립국들인 부여, 고구려가 우리 역사에 들어 올 수 없게 된다. 이들이 모두 조선에서 나왔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기자조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우리역사가 아니니 중국사다. 우리역사에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역사 체계는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조선(단군=고조선)->열국시대->5국 또는 4국시대->삼국시대->2국시대->일국시대(고려,조선)->대일항쟁기(임시정부시대)->2국시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한편 이날 강연에 앞서 강연을 주최한 미사협을 대표해서 손윤 미사협 공동대표가 인사말을 전했다. 그는 강단식민사학계에 대항해서 최근에 감사원에 감사청구를 한 사실을 알렸다. 강단식민사학계가 지난 2월에 동북아역사재단 등 을 상대로 과거 또는 현재 바른 역사 단체와 인물이 국가연구과제에 참여한 것을 문제삼아 감사청구를 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맞불작전성격을 띤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새 감사원에서 필요한 사항을 문의해 와서 답변을 해주었다고 했다. 이에 바른역사단체에서도 대응하지 않으면 저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피해를 볼 수 있어 적극 대응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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