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를 맞이하여 남북한 역사 간극을 좁히는 것이 숙제다.

 

고대한일관계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열도는 우리 땅에서 이주해간 사람들 역사라고 한다
미국인 코벨, 북한학자 김석형, 한국 최재석 등이 대표학자다
북한은 이미 50년전에 임나일본부설 극복하다
반면에 국내 강단식민사학계는 여전히 일제치하에서 살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은 미국인으로서 일본 미술사를 전공했다. 처음에는 일본에 심취하여 일본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다. 그러다가 원류가 한국임을 깨닫고 한국역사문화 연구로 여생을 마친다. 그녀는 '한국은 일본의 부모이고 일본은 부모를 버린 불효자'라고 일갈했다. 대표저서로는 <기마민족과 왜>가 있다(편집자 말).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1970-80 년대에 한국과 일본 상고사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학자의 한명임에는 틀림없다. 서양인 최초로 일본 고대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학자는 일본을 연구하는 푸른 눈의 학자로서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애정을 받았던 학자이다. 그녀가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그 시원인 한국에 이끌리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미국에서 정년 퇴임하자마자 본격적으로 한국을 연구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 학자는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다. 학문적 업적으로보나 객관적인 경력으로보나 한국 강단이 떠받들어주어도 시원찮을 이 대학자를 학자로서 인정하는 한국 학자는 단 2명 뿐이었다.

그 2명의 학자 중 한명이 코벨에게 김석형이 연구한 자료를 소개해 주었다. 당시 코벨은 고대 기마민족이었던 가야인들이 고대 열도로 건너가 일본 천황가를 수립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석형은 1960년대에 한국인들이 열도로 건너가 열도의 왕조를 세웠다는 “일본 열도내 한반도 분국설” 을 주장하여 당시 일본을 긴장시켰던 북한 학자였다. 자신과 같은 주장을 하는 김석형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코벨은 신문에 김석형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는다.

그런데 엉뚱하게 칼럼 시작을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코벨은 자신이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강변하는 장문의 글을 실은 후에야 김석형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윤내현 교수가 북한의 이지린과 동일한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강단으로부터 색깔 논쟁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고대 일본을 건국한 주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은 김석형 뿐만 아니라 일본인 에가미, 서양인 코벨 등 양심있는 학자들이라면 다들 인지하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북한 김석형도 그런 학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 학자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는 주장이라고 해도 같은 주장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당시 시대상황이었다. 그리고 미국인이었던 코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냉전 시대 이념 대립과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강단이 빚어낸 진풍경이었던 것이다. 북한 학자와 동일한 주장을 싣는다는 것은 이런 학문외적인 정치적 부담감을 가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코벨이 연구했던 내용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박창암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박창암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한 보수 계열 군인이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는지 1963년 당시 박정희에게 국민에게 약속한 혁명공약대로 군은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다시 군으로 복귀하라고 주장하였다가 구금되기도 한 인물이다.

이후 반공 이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으로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코벨이 쓴 글 들은 이 ‘자유’지에 실리게 된다. 짝퉁 보수가 아닌 진짜 보수가 코벨이 한 연구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 학자와 동일한 코벨의 주장을 반공 잡지인 ‘자유’지에 실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코벨이 한 연구가 당시 제도권 학계에 반영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한국 제도권 학계는 냉전 이념 대립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이후 한일 고대사 부분에 있어서 한국 제도권 학계는 학문적인 기능이 마비가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날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남한과 북한 정상은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을 했다. 이 선언에는 남북한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내용도 포함이 됐다. 반세기 넘게 두 개로 나뉘어진 민족이 하나로 합치기 위한 노력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민족은 사전적 의미로 공동의 언어 풍습 문화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민족이라는 단어의 개념에 충실해서 통일을 생각해보면 그 출발점은 공통된 역사 인식을 가지는 것도 포함이 될 것이다.

▲고 최재석 전 고려대 교수. 그는 서기1980년대 부터 식민주의 사관을 연구하여 비판한 대표학자 중 하나다. 그러나 그는 강단식민사학계의 철저한 외면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일본와세다 대학 유학파, 전 고려대 교수 김현구씨가 최 교수를 외면한 일화는 유명하다. 최 전교수는 지금도 펄펄 살아서 우리 고대역사 숨통을 조이고 있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의 정체를 이 땅에 처음 고발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편집인 말).

그러나 한일 고대사 관련해서 냉전 시대에 한국의 특정 집단들이 벌려 놓은 남북한 상고사 인식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북한에서는 김석형 연구가 조희승 등 여러 학자에게 이어져 이론적으로 더 정교해지고 체계화 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여전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코벨 이후에도 문정창, 고려대 최재석 교수 등이 한 민족의 시각으로 일본 고대사를 바라보려는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제도권이 쌓아둔 벽을 넘지 못하였다.

이런 구조하에서 반세기가 흘렀다. 결과는 참담하다. 2016년 한일 고대사 관련해서 대한민국 학계 최고 권위자라고 알려졌던 김현구 교수는 이덕일 소장과의 재판과정에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기록이 다른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이덕일 소장의 질문에 “나는 (일본서기만 연구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잘 모른다” 라는 대답을 하여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언론에 의해서 김가야라고 치켜세워지는 김태식 교수는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에서 학문적 근거없이 김석형과 코벨 이외에 여러 학자들이 제기하였던 일본 열도 안의 한민족 개척사를 부정하면서 일본 학자들의 편을 들었다. 한국의 강단 사학계가 빠른 속도로 달려온 결과이다. 북한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말이다.

북한은 무려 50년 전에 임나 일본부설을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시각으로 열도의 고대사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현재 남한과 북한의 한일 고대사 인식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남북 관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강단 식민사학의 철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도 매우 시급한 문제이다. 남북한 통일에 있어서 매우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부끄럽지 않은가? 북한 사람들이 이들 일부 제도권 학자들을 보고 남한은 아직도 일제 시대를 살고 있느냐? 라고 물었을 때에 우리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