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우리는 박정희 황국신민으로 의식화되고 사육되었다.
박정희가 5.16군사반란에 성공하자,
일본에 있던 그의 만주 군관학교 시절 선생들이 보인 반응은?
“저게 누군가, 다카끼마사오(박정희) 군 아닌가,
이제 곧 조선에 다시 갈수 있겠군.”
우리 현대사는 통상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말한다. 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버린 인상을 받는다. 이념 감옥 속에 가두어 놓고 사육된 역사임을 지울 수 없다. 미국 욕심에 따라 이 땅은 미국이 바라는 역사로 만들어져 갔다.
미국은 우리 땅을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남쪽 역사는 미국이 만들어 갔다. 공산주의 확산을 차단하는 방패막이로 이 땅을 조작해 나갔다. 여기에 충실하게 말을 잘 듣는 정권을 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승만이 당첨되었고 그의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 워낙 노욕이 많다 보니 백성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나가 버렸다. 그래서 4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4월 혁명은 미국 손아귀에서 벗어나 주권 재민 자주국을 세울 기회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실정에 반발해서 일어난 혁명이라서 사전에 혁명 후 어떤 정권을 세우고 어떤 정책으로 자주 국가를 건설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허정과도내각도 갈팡질팡했다. 또 새로 들어선 장면정부도 혁명정신을 잇지 못한 가운데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이에 군부에서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뒤 엎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군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첩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도 장면정부는 대처하지 않았다. 관련자들을 방첩대에서 소환하여 조사하고도 풀어준다. 당시 상황을 보면 군사반란이 일어나면 반란군에게 정권을 내 줄 것 같은 태도까지 엿보인다.
반란군 수괴 박정희는 서기1961.05.15. 밤 쉽게 성공 가능함에도 만에 하나 실패할 것이 두려워 술을 잔 뜩 마신다. 술마신 상태로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아주 쉽게 장면 정부를 뒤엎고 반란에 성공한다.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 다음으로 군대 최고 통수권자로 국방장관 로재현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야전군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해야 할 권한과 의무를 갖고 있었음에도 반란 소식에 겁을 먹고 목숨 부지하려고 도주하여 숨어 버렸다.
박정희가 5.16군사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같은일이 벌어졌다. 군대 최고 통수권자인 장면총리는 아무런 진압 명령도 내리지 않고 저하고 자기 가족만 살자고 줄행랑을 쳤다. 어디로 도주해서 숨어 버렸는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대사관으로 도주해서 대사관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했는데 대사관에서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종로 혜화동 성당으로 도주했음이 드러났다.
장면총리가 만약 군 통수권자로서 도주하기 전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에게 야전군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하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면 우리 현대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당시 박정희 반란군은 겨우 3천여 명 남짓 병력에 지나지 않았다.
사단 병력도 아니고 일개 연대병력 조금 넘은 숫자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처럼 반란군 주축 부대, 국군보안사령부가 군 통신망을 장악해서 전국 군 병력 이동상황 등을 손바닥처럼 훤히 꿰뚫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5.16군사반란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성공했다며 아직도 수수께끼라고 관련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역사의 장난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반란을 미국이 승인했다.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도 마찬가지다.
우리 현대사는 이렇게 본궤도에 오른다. 이 때부터 우리 현대사는 반공과 박정희 우상화로 집약된다. 이런 시각에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반공과 박정희 우상화 시대 속에서 나고 자란 세대는 자신이 어떻게 조작되고 사육되었는지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고 투쟁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어떻게 길들여 졌는지 실체를 각성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틀 속에서 길들여져 여기까지 왔는지 냉철하게 실상을 고발한 글이 있어 화제다.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제연구소 전우용 교수이다. 최근 한 일간지에 연재 글을 올리고 있다. 또한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리한 역사학자 눈으로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다.
독특한 풀이를 내놔 누리꾼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가 우리 현대사를 요약하여 내놓은 글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제까지 어느 학자보다도 핵심을 잘 짚고 있다는 평가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 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육되었는지 예리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일본 통제를 지금까지 받아왔다. 일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실상 제2기 식민통치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박정희 지배를 받았지만 박정희는 일본이 배후 조종했고 자발로 일본제국주의 통치 질서를 다시 이땅에 강고하게 심어 놨다.
이 땅은 가히 일본 ‘천황주의’ 국가 ‘작은 집’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일본화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철저한 황국신민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말은 한국말하고 있었을지 모르나, 정신은 이미 일본제국주의 일본인이었다.
전우용 교수 주장을 직접 들어본다. 아래는 그가 자신의 얼굴책(facebook)에 올린 글 전문이다.
「1961년 5.16이 나자 일본 신문 방송에 박정희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그걸 본 일본군 시절 박정희의 동료들은 “저게 누군가, 다카기 마사오군 아닌가? 이제 곧 조선에 다시 갈 수 있겠군”이라며 기뻐했습니다.
그해 11월,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수상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을 만났습니다. 박정희는 만찬석상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스승이던 나구모 신이치로를 초청해 큰절을 올린 뒤 술을 따르며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케다와 일본 정부 요인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치며 “동양의 예절을 아는 사람”이라고 박정희를 칭찬했습니다. 이 장면은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방송됐습니다. 박정희는 또 “나는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정신으로 일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의 대표적 지사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그는 후일 이 말을 실천하여 ‘10월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어용 정치조직 ‘유신정우회’의 이름도, 이토 히로부미가 만들었던 어용 정당 ‘정우회’와 공교로울 정도로 똑같습니다.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 둘 다 10월 26일에 총 맞아 죽은 것만 '공교로운' 일이 아닙니다.
1962년 말,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특사로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가 방한했습니다. 그는 도쿄에서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나와 박정희는 부자 같은 사이다. 아들의 경사에 가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보수'는 박정희와 그 친구들을 '아들' 같이 생각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에 만주군관학교를 다니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습니다. 그는 천황제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흠뻑 젖어들었고, 천황제 군국주의 일본이 시행한 정책들을 자기 ‘정책은행’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동료들, 그의 심부름을 맡은 테크노크라트들 역시 천황제 군국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940년대는 ‘박정희 시대’로부터 20-30년밖에 안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과거’였습니다. 교육칙어는 국민교육헌장으로 부활했고, ‘조선 공업화’는 경제개발계획으로, 농촌진흥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됐고, 애국반상회, 국민체조, 가정의례준칙 등은 이름 그대로 부활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30-40대에게 이런 정책과 의례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의 한국 사회 분위기는 1940년대의 일본 사회 분위기와 아주 흡사했습니다.
유신체제 하에서 ‘유신의 이데올로기’를 흠뻑 받아들인 자들이, 지금 ‘자칭 한국 보수’의 중핵입니다.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이 박정희를 우상화하고 박정희 시대를 ‘황금시대’로 묘사하는 것은, 박정희가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하고 일본 천황제 군국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강한 향수를 가졌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일차적으로 박정희를 향하고, 박정희를 매개로 천황제 군국주의에 이릅니다. 앞서 올린 글에 한국 보수의 뿌리가 ‘일본 천황제 군국주의’에 닿아 있다고 한 건 이 때문입니다.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의 주장이 일본 자민당의 주장과 똑같은 경우가 많은 것도, 이들이 천황제 군국주의의 '식민지 서자'가 낳은 '손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천황제 군국주의의 패륜 만행에 적극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은 거의 다 죽었지만, 그들의 패륜성은 한국의 '자칭 보수'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됐습니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지금도 종종 “우리가(너희가) 누구 덕에 이만큼 사는 줄 아느냐.”라고 말합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선조들도 늘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지체 없이 “모두 천황폐하 덕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에게 이런 질문 던지면 ‘미친놈’ 보듯 할 겁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모욕입니다. 천황제 군국주의 아래에서 “모두 천황폐하 덕입니다.”라고 외쳤던 쓸개 빠진 노예들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박정희 덕에 이만큼 사는 거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그대로 승계됐습니다. 이런 자들이 지금 '자칭 보수'의 중핵입니다. 저들이 '황국신민'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노예'라는 사실을 알아야, 비로소 '식민잔재'를 청산할 수 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 - E.H.Car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