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노예시각으로 역사를 써왔다.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시절,
각 나라는 자기 민족주의를 살려 독립과 국체를 지키려 했다
일본은 '신도神道'와 ‘천황’ 중심으로 단결하여 일본민족주의로 나갔고,
중국은 사마천 <사기>의 황제를 중심으로 중화민족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권력자와 지배층이 외세와 결탁하여 매국노가 되어
백성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사회는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진보냐, 보수(수구)냐로 싸웠다. 또 좌익(좌파)냐 우익(우파)이냐로 소모전을 벌여 왔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동란을 기점으로 보수우익의 반공이 창궐했고 반공이 절대지배이념으로 군림해 왔다. 반공세력 반대편에 있는 진보, 좌익은 빨갱이, 종북세력, 용공세력으로 낙인찍혀 타도대상이 되었다.
반공은 성역이 되었고 전지전능한 권력이 되어 반대편을 짓눌렀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반공이라고 하면 면죄부가 내려지고 정당화 되었다. 반공 때문이었다고 하면 불법, 비리, 부패도 용서되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지난 서기2016.10.말부터 타오른 촛불봉기를 계기로 이 강고한 틀이 깨지기 시작했다. 반공가면을 쓰고 온갖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던 세력들 실체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정의냐 불의냐로 재편성되었다. 좌파 우파가 아니라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기에 결정 역할을 한 인물이 당시 성남시장, 이재명이었다.
그는 촛불봉기 시작부터 봉기를 주도해나갔다. 적폐청산을 외치며 반공이념구도를 깨나갔다. 진보보수 진영논리로 왜곡된 이 사회 실상을 벗겨 나갔다. 이런 구도는 친일부역 매국역도들이 기득권 수호를 위해 쳐놓은 위장막이었다.
촛불봉기 이후 적폐청산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면서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이 기조를 꾸준히 유지해 오고 있다. 적폐청산에 얼마나 더 가까이 가느냐 못 가느냐가 국민의 선택받을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가늠자가 되고 있다.
지금 야당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정부 개혁과제를 저지하고 방해하려고 해도 먹히지 않고 있다. 소위 ‘드루킹’ 사건 특별검사채택은 충분한 명분이 있다. 이 명분을 보면 야권 투쟁은 국민동의를 얻을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여론 조사 결과 여당이 더 올라가고 야당 지지율이 더 떨어지고 이다.
북한적화통일 야욕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도 마찬가지다. 야권, 특히 자유한국당과 박근혜세력은 이 명분을 가지고 남북화해와 민족번영을 담은 남북정상의 <판문점선언>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그런데 지방선거 지지율은 여권이 압도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야권은 경북지사와 대구시장 정도 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모두 시대정신인 적폐청산을 등지고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 민심이 적폐청산을 바라는데 이 민심을 거부한 결과다.
그런데 학계에도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 강단 주류 역사학계다.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이 우리 역사학을 지배하고 있다. 일제식민지 잔재, 적폐중에 전혀 청산이 안되고 있는 것이 역사학이다. 올해로 73년이다. 전국 국공립 및 사립대학교, 국공립 및 사립 중고등학교, 국공립, 사립박물관, 역사문화관련 각종 연구소 등 모든 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더구나 여기에 제국식민고고학이라고 비판 받은 고고학이 가세하고 있다. 민족사학, 주인사학 입장에서 보면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있는 형국이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이들 식민사학 기득권이 얼마나 강고한지 임명 전에는 식민사학 청산할 것처럼 하던 사람도 장관에 임명되고 나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그는 식민사학의 상징, ‘임나일본부설’에서 얘기하는 임나 위치까지 꿰뚫고 있다.
식민사학의 소굴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고대사학회(회장,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주동하여 동북아역사지도집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는 이 지도집이 매국역사지도라는 것을 밝혀내는데 결정역할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도종환 장관이 그 만큼 식민사관의 실체를 잘 알고 있으며 청산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장관이 되더니 꿀 먹은 벙어리다. 식민사학 기득권 벽이 얼마나 강고하고 거대한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히 철옹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식민사학계를 반드시 청산하겠다고 나선 단체가 있어 화제다. 이미 잘 알려진 미사협(사단법인,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상임대표,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장관)이다. 그리고 ‘(사)한배달’, ‘한뿌리사랑세계모임’, ‘(사)국학연구소’, ‘(사)대한사랑’, ‘삼태극’ 등 여타 역사단체들이 있다.
미사협은 서기2017년 4월 미사협 산하에 ‘바른역사 학술원(원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개설한 바 있다. 이 학술원을 중심으로 식민사관 해체 투쟁을 벌여오고 있다. 역사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술원은 서기2018.05.04. 봄 학술대회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개회했다. 이날 행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연구원)에서 발주한 과제를 소개하고 과제에 퇴자를 놓은 연구원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세 번째 발표자로 국학연구소 임찬경 박사가 나섰다. 그는 주어진 과제에 맞게 연구성과를 내놓았는데 연구원이 출판 불가 판정을 내렸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연구과제가 일제시기 ‘독립운동가 고대사 인식’이었다. 독립운동가(이하 독립투사)에는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성재 이시영, 무원 김교원 등이 있다.
고대사 핵심쟁점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위치다. 이들은 낙랑군을 요동이나 그 서쪽으로 보고 있다. 이런 결과는 독립투사들이 중화사대주의 사관이나 일제식민사관이 아니라 주체사관에 따라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제에 이것을 넣지 않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고대사에는 통설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있어 그의 과제가 결국 통설에 맞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연구 성과물을 심사한 연구원 사람들이 통설, 곧 일제식민사관을 따르는 인사들이었다는 것이다. 자기들 사관과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출판 불가라는 낙제점을 주었다고 보았다.
그는 또 이런 판정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민족주의와 단군이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주의나 단군을 강조하면 반드시 일본민족주의에서 나온 총독부 식민사관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기 독립투사인 민족사학자들은 모두 민족과 단군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찾았기 때문에 이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독립투사들이 민족과 단군을 내세우게 되었는지 내막을 벗겨 나갔다. 당시는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연히 피지배 식민지 민족이 압제 하에 있었다. 또 식민지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피지배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화두였다. 독립을 위해 가장 호소력 있는 것이 정체성 회복투쟁이었다. 여기에는 역사가 필수다. 역사는 곧 민족사다.
그래서 당시 세계 피압박 민족과 나라에서는 민족사와 뿌리 찾기 투쟁바람이 일었다. 중국의 경우 양계초는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 중국 최초 조상으로 나오는 ‘황제’를 구심점으로 하여 중화민족주의로 단결과 투쟁에 나섰다.
일본도 미국에게 강제 불평등 개항을 당하고 난 후, 신도와 천왕을 중심으로 민족을 단결시켜 일본민족주의를 확립해 나갔다. 인디아 등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팔아먹고 민중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하는 길로 나갔다고 했다. 당시 권력자와 지배계층이 앞장서서 매국세력이 되어 이 같은 일을 벌였다고 한탄했다.
그런데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면서 각성된 독립투사들이 무력투쟁에 이어 역사광복투쟁도 함께 벌였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 근거를 역사에서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기존의 중화사대주의 역사관으로 역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것 때문에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역사를 세워야 했다. 중화사관이나 식민사관으로 우리역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눈으로 찾는 것이다. 기준은 민족과 단군이었다. 대일항쟁기 독립투사들은 독립이 지상 과제였다. 그래서 민족주의와 단군을 내세웠다. 임찬경 박사는 이것이 독립을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다고 풀이했다.
그는 이어 현재 강고한 식민사학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민족주의 사학과 물과 기름관계임으로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민족주의 사학이 들어설 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식민사학이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학문토대와 근거는 이미 확보되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이런 이론이나 논리 그리고 증거가 없어서 식민사학을 해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미 차고 넘치게 해왔고 준비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과 제도 구축이다. 이외 지금가지 해온 학술토론회 등으로는 저들은 절대 꿈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과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이를 위해서 여론을 형성하고 국민들에게 알려 법과 제도 구축 환경을 만들어가자고 역설했다.
아울러 인물 청산안도 제시했다. 또한 민족사학을 위한 대학원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역사관련기관은 모두 조선총독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표사례로 현재 국사편찬위원회를 들었다. 조선총독부가 우리역사를 파괴할 목적으로 만든 조선사편수회에서 나왔다고 해서 방청객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사편수회가 국사관으로 바뀌고 이것이 국사편찬위원회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 대회는 발표자가 주제를 발표하고 나면 바로 토론자자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취했다. 임찬경 박사 토론자로 국학연구소 김동환 박사가 나섰다. 그는 의문제기에 앞서 우리나라 역사학 환경을 개탄했다. 혁명적 변화가 없이는 바뀌지 않는다고 비관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사학문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환기시켰다. 역사서술 권력싸움이라고 규정했다. 기득권 식민사학계와 역사서술을 어떤 관점으로 쓸 것이냐를 가지고 다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개념을 몇가지 측면에서 그렸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나를 위한 변명이다.
또 역사는 내가 누구냐를 알려준다. 또 역사는 내가 주인입장에서 보느냐, 노예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진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역사는 관념과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통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람 자체가 생각을 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점이나 인식이라는 말 자체가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보는 눈은 주인이냐 노예냐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천년 이상 노예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해 왔다. 우리는 역사를 노예입장에선 보는 세력에게 빼앗겨 왔다. 중국, 일본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일제와 중화의 앞잡이들이 빼앗다. 그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대일항쟁기 독립투사들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이병도로 대표되는 식민사학을 비판했다. 현재 강단주류사학계는 실증주의 사학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자신들을 실증사학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뿌리, 이병도를 보면 ‘계시’사학이라는 것이다.
이병도가 꿈에서 본 것, 또는 화장실에서 생각난 것을 역사학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게 ‘계시’사학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실증사학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오히려 민족사학이 진짜 식민사학이라고 잘라 말했다.
마지막 발제자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인 김병기 박사가 나섰다. 김 박사는 일제시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부역자들과 해방 후 이들이 어떻게 우리 국사학을 점령해 나갔는지 그 과정을 폭로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역사를 왜곡, 파괴해서 일본사로 만들었다.
이유는 역사를 통해서 민족동화를 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편찬한 것이 <조선반도사>, <조선사>다. 이 기관에 부역한 인물 중에 이병도와 신석호가 있다. 이병도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해 식민사학을 이 땅에 뿌리내린 주인공이다. 그는 일제 멸망 직전까지 조선사편수회에 복무했다고 한다.
또 일제강점기 진단학회에서 활동했는데 해방 이후에도 다시 세워진 진단학회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그는 다시 ‘조선사연구회’를 만든다. 그의 학문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간사로 활동한 일제식민사학자, 이나바이와키치 것을 복사한 수준이라고 김 박사는 강조했다. 그는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또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 국사학과를 장악하고 후진을 양성해 오늘날과 같은 철옹성 식민사학체제를 만들었다.
신석호라는 인물도 있다. 역시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신석호는 고려대학교에 뿌리를 두고 식민사학 후계자를 양성해 전국 대학 등 기관을 채운다. 이날 김 박사 발표에서는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어떻게 식민사학으로 구축되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사실도 드러났다.
신석호는 해방 후 ‘역사학회’를 만들었다. 해방 되자 대학들이 생겨나고 또 하위 학교들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학교 교육을 담당할 임시중등교원양성소가 발족했다. 여기에는 역사교사도 필요했다. 이 역사교사들을 신석호가 주도해서 양성했다고 한다. 당연히 식민사학이 주입되었다.
이날 김 박사는 이병도 얘기를 담은 <역사가의 유향>이라는 책에 얽힌 얘기도 들려주었다. 이 책은 이병도 후학들이 이병도를 기리고 칭송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이병도가 죽은 후 그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이 가관이라고 김 박사는 소개했다. “한 세대의 석학이요, 만인의 사장이며, 현대 사학의 개척자...” 등 찬사로 가득하다고 한다.
김 박사는 이외에 이병도는 학술원을 만들어 원장을 장기 역임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 학술원이 주는 상을 자랑스럽고 명예롭게 여긴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상을 받은 인물중에는 진보학자를 표방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김 박사는 이어 이병도가 죽은 지 30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금기시 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무서운 식민사학이라며 마무리 지었다.
이어 학술대회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발표자와 각개 토론했던 모든 토론자가 참여했다. 임찬경박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많아 대부분 그가 답했다. 방청객에게도 질문을 받았다. 토론 중에 김동환 박사가 역사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밝혔다. 이와 관련해서 주관, 생각이 개입되지 않는 귀납적 접근은 없다고 단정했다. 이에 대한 이의제기였다.
이에 허성관 상임대표가 보충 설명을 해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는 학문에는 규범적 학문과 실증적 학문이 있다면서 전자를 연역법으로, 후자를 귀납법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학문을 하다보면 궁극적으로 가치판단이 완전히 배제된 학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따라서 실증적 학문, 곧 귀납적 학문이라고 해도 생각, 관점,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역사를 왜 배우는가를 언급하면서 스스로 실증주의 역사학이라고 하는 식민사학계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을 직접 들어본다.
“그런데 우리역사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식민사학자들은 자기들은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한다. 그들이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규범적인 것, 역사와 관련 없는 것 이야기하지 마라. 사료만 이야기 해라 이런다. 그러나 관점을 빼버리면 우리역사는 무슨 역사가 되는가. 할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라는 것은 왜 배우냐, 한마디로 정리하면 빛나는 역사에서 우리가 희망을 보고, 고난역사에서 교훈 얻자고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가치판단이 배제되면 그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하는 방법은 그것이 통계가 되었던 문헌이 되었던 관계없이 객관적인 증거위주로 한다.
그러나 어느 민족에게서나 약간의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독일 랑케가 구축한 실증주의 역사학 방법도 자기민족적 특성을 구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여기에 구체적 증거를 대는 방법을 썼다. 그래서 학문을 하는데 완벽한 가치판단이 배제된 경우는 없다. 이것이 역사를 볼 때 학문이 걸어온 과정이다.”
이날 종합토론에서는 주제발표자 외에 임기상 기자, 조병현 박사, 김동환 박사, 이시종 박사가 참여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는 김명옥 건국대 교수가 이끌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발표와 토론이 뜨거웠다. 준비한 학술대회 책자가 모두 나갈 만큼 시민참여가 많았다. 주최 측에서는 받지 못한 시민들에게 연락을 받아 전산문헌으로 책자를 보내주기로 했다.
이날 방청객 중에는 현재 서울 소재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도 참석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날 학술대회에서 준열하게 비판하는 강단사학에 몸 담은 학생이다. 준비해 온 노트북을 꺼내 꼼꼼하게 기록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쓰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인상을 받았다. 장차 역사학문으로 직업을 삼겠다고 했다.
강단에서 배우고 있는 관점과 정반대 학술대회인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 많이하고 있겠다'는 말로 민족사학에 뜻을 두고 있음을 내비쳤다. 또 앞으로 학술대회 등 민족사학계 역사모임이 있으면 종종 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위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그가 배우고 있는 학계 환경과 장차 무엇을 학교에서 요구할 것인 지 등 전반 상황을 알려주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