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학살은 점령군 미제와 관군이 벌인 양민 학살극이었다.

기사최종수정 서기2018.04.07. 02:22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 하는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넣어 망각 세월에서 우리를 일깨워 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산하 시인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

(문재인 대통령, 서기2018.04.03. 제주4.3봉기 추모식 중)

'세살 난 아기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대기 쳐 죽였다'

‘피로 물든 근현대사 앞에 우리는 모두 상주喪主다’

 

▲강요백 화백이 그린 '젖먹이'. 이 그림은 제주4.3학살 당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주민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 학살역사현장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서기1998년 제주도 조천읍 북촌리에 사는 김석보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동백꽃지다>학고재 1998.118쪽)"

제주4.3봉기 70주년 추모식이 지난 서기2018.04.03. 제주도 4.3평화공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추념사에서 서기1947.03.01부터 벌어진 ‘4.3비극’을 ‘이념’으로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이념’이라고 표현했지만 국가에 의해서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학살되었다는 말이다. 국가 공권력이 벌인 학살범죄로 규정한 것과 같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 이어 정부를 대신해서 문 대통령이 다시 한번 깊이 사과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추념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회상이 있어 화제다. 불과 20여년전 만 하더라도 제주4.3봉기 자체가 금기였고 불온시 되었다. 문 대통령은 이런 시절에도 이 봉기가 잊혀지지 않게 일깨운 사람들이 있었다며 여러 사례를 일일이 열거했다.

그 중에서 이산하 시인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이 눈길을 끈다. 이 시는 제주4.3봉기를 울분으로 쓴 것인데 한편의 근 현대사라고 할 만큼 울림이 크다. 이 시는 철저히 당시 남한을 점령, 지배한 미국군대 정부와 이승만 그리고 여기에 부역한 친일역도들을 잔악한 살인자로 본다. 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한 특대형 범죄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빨치산은 위대하며 인공기 밑에서 떨쳐 일어난 위대한 민족해방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서슬퍼렇게 지배하는 가운데 해방공간상의 극한 좌우이념대립구도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시각으로 보아도 위험한 시다. 문 대통령이 ‘한라산’이라는 시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고도 이날 추념사에서 언급했는지는 확인이 안된다. 그러나 이 시를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대사건이라는 반응이다.

▲미국군 정부가 주도하는 학살진압이 초토화 작전으로 진행되자, 제주양민들이 온 식구들을 대리고 산으로 대피했다.

그렇다면 제주4.3봉기는 무엇이었나. 당시 미국군 정부와 이승만 정권이 바라보는 대로 단순히 김달삼을 중심으로 하는 남로당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인가. 또 이를 진압하는 가운데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인가.

반대로 진보세력이 말하듯이 점령군 미국군대가 사주한 가운데 이승만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학살한 범죄인가.

이렇게 좌우이념 대립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가.

그러나 이 사건은 이렇게 봐서는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민족사라는 길고 넓은 눈으로 볼 때 실상이 드러난다.

서기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있었다. 이 봉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주4.3봉기 실상을 가늠할 수 있다. 동학농민봉기는 이조선 정권의 모순과 폭정이 원인이다. 제주4.3봉기도 모양만 달랐지 미군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이 원인이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 한부분이었다. 그런데 미군정부가 분리해서 제주도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세금이 늘어나고 기타 다른 부분에서도 제주도에 가해지는 부담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더구나 해방 후 일본 등 해외로 떠났던 제주도민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이렇다 보니 실업까지 겹쳐 경제가 심각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여기에다 전혀 청산되지 않은 친역부역자들이 일제치하에서 하던 그대로 행정과 치안을 장악하고 폭압으로 대했다고 한다. 4.3봉기는 서기1947.03.01. 삼일절 기념식날 도민에게 저지른 경찰 발포가 직접 원인이다. 이 때 6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외치는 군중을 향해 총을 쐈다.

이 사건은 서기1919.03.01. 삼일만세혁명 당시 일제경찰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 때는 일제경찰이 발포했다. 제주도 3.1절 기념행사 당시에는 일제경찰의 개, 돼지 노릇하던 자들이 해방되자 주인 자리를 꿰차고 자국민에게 총을 쏘았다.

해방 된 조국에서 해방을 축하는 만세를 외쳤는데 거기다 대고, 일제경찰을 대신해 총을 쏜 격이다. 지배자가 일본인에서 친일부역, 한국인으로 바뀐 것일뿐 일제치하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또 진압하는 과정도 동학농민봉기 때와 똑 같다. 외국군대와 관군이 합세하여 학살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봉기 때는 일본군과 이조선 관군이 합세하여 자국민을 학살했다. 4.3봉기때도 미국군이 지휘하는 가운데 이승만 정권의 관군이 투입되어 학살극을 벌였다. 동학농민봉기 후 약 50년 뒤에 비극역사가 똑 같이 되풀이 되었다.

▲ 일제조선총독부를 대체한 미국군정부와 그 하수인들인 친일경찰과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구성된 군대와 친일부역 서북청년단 학살을 피해 산으로 들어온 제주 양민들, 움막을 짓고 생활했다.

또 민간인 학살 집단으로 동학농민봉기때는 보부상 및 양반지주들이 있었다. 반면에 4.3봉기때는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등 친일부역으로 부와 권력을 축적한 개신교 집단의 이른바 서북청년단(NORTH-WEST YOUTH ASSOCIATION)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 등 아래로 부터의 혁명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토지 등 재산과 기득권을 상실한 친일부역 개신교 세력이 남으로 대거 탈출한다. 한경직 목사로 대표되는 서북한 산 친일부역 세력은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타향에 정착했고 미국군 정부와 이승만 정권에 달라붙어 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북한에서 당한 것을 남한의 ‘좌익세력’을 향해 분풀이를 하기 시작한다. 이 분풀이 대표가 제주4.3양민학살이다.

일제에 빌붙어 수십년 동안 반역죄를 저질러 놓고 회개, 반성하기는 커녕, 범죄로 얻은 기득권을 뺏겼다고 남한에 와서 난동을 부렸다. 도둑이 거꾸로 매를 든 격이다. 서기1811년 홍경래 봉기에서 보듯이 서북한 지역은 이조선 5백년동안 차별과 탄압을 받은 곳이다. 이조선이 망하자 미국 개신교가 이 지역에서 들불처럼 번진 것도 이런 역사 배경이 작용했다. 개신교가 구체제 이조선의 탄압에서 해방 시켜주는 구세주로 다가온 것이다. 억압과 차별,  피해자로서의 서북한 개신교도들의 한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조선 정권의 폭압 피해자로서 동정도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미국산 외세 개신교에 기생하여 저지른 친일부역범죄와 제주4.3학살 범죄를 면할수는 없다. 자기 사욕을 채우고자 외세와 합세하여 미제로 부터 자주독립을 외치는 동족을 학살한 범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이들이 얼마나 잔악무도하게 제주양민을 학살했는지 당시 학살을 목격한 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차라리 꾸며낸 이야기로 믿고 싶다.

외도지서 특공대원 고치돈 증언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김제진 제주경찰학교 10기생 증언

"서북청년회 출신 정 주임(제주 삼양지서 정용철)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다 봤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여자들의 옷을 벗긴 채 망루 위에 오랜 시간 앉혀 놓았습니다. 난 벌벌 떠는 그들이 불쌍해 코트를 벗어 덮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했습니다."

고봉수 대한청년단 분대장 증언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 주임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이상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이들을 한경직 목사 자신이 직접 끌어모아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 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이들은 지금도 잘났다고 지난 이명박근혜 친일종미 정권에서 서북청년단을 재건해 버젓이 난동을 부리고 다니고 있다.

오늘날 미국산 목사교가 한국 교회 절대를 차지하고 미국에 달라 붙어 신성한 3.1절에 성조기,  일장기,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반민족, 반통일, 반국가, 친일부역 기득권 수호에 광분하는 오만함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1984.05.14. 한경직 목사가 청와대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사진:정부기록사진집). 한경직 목사는 자신이 직접 서북청년단을 모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국 개신교 집단은 일제시기에는 친일부역으로, 해방 후에는 미국군 정부와 이승만 정권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하는 가운데 대한민국 최대규모 종교로 교세를 확장해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미사대주의 종속종교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필연으로  반민족 부패종교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4.3봉기 좌절은 민족독립 투쟁사에서 지을 수 없는 아픔이다.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투쟁역사는 동학농민봉기가 가장 크다. 이후 일제치하에서 자주독립투쟁을 수십년동안 줄기차게 벌였다. 중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방법상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파가 갈리며 갈등도 있었지만 조국 광복전쟁이라는 깃발아래 하나가 됐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한 해방공간이 되었다. 무정부 상태에서 무질서와 약탈이 란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즉각 전국에 걸쳐 자발로 생긴 자치조직,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전국 행정과 치안을 확보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착착 진행시켰다. 1894동학농민혁명 당시 인민자치조직, 집강소執綱所 부활과도 같았다.

당시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 받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서기1943.09.05.)라는 미국 학자가 있다. 그는 '한국전쟁 기원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이라는 책 저자로 유명한 역사학자다. 그가 수집한 당시 미국군 정부 정보 보고서는 너무나 평화롭고 안정된 가운데 전국이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통치되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남한에서만 146개 인민위원회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그러나 미국 점령군은 이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점령군, 미국 이익을 채워 줄 이승만 정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에서도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통치되고 있었는데 전국에서 가장 모범으로 꼽힐 정도로 잘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전면 부정했다. 이 때문에 제주도가 가장 격렬하게 저항을 했다고 한다.

결국 4.3봉기로 이어졌다. 주도세력이 외피는 남로당 소속 유격대였지만 실상은 일제치하의 독립투쟁, 광복군 연장이었다. 다만 사회주의 옷을 입고 있었을 뿐이다. 이 시각으로 보아야 제주4.3사건을 비롯한 근현대사의 실상이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는 단절해서 사고한다. 70년이상 친일부역세력이 살포하고 세뇌시킨 반공교육 때문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가 직접 개입해서 양민을 학살한 사례는 제주4.3학살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승만과 미군사고문단은 소요찬 당시 학살진압군 사령관에게 초토화 작전 명령을 내린다.이에 따라 제주도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밖에 산간에 있는 제주도민에 소개령을 내린다. 이 소개령에 따라 제주 양민들이 산간마을에서 내려오고 있다. 소개령을 듣지 못했거나 수확기 때문에 못 내려온 약민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사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미국 만큼 철천지 원수도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기1905년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넘겨 주었다. 식민통치 비극역사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뜻이다. 당시 일본이 아무리 강했다고 하더라도 주변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없이는 점령할 수 없었다.

일본은 서기1894년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로부터 승전 전리품으로 요동반도 일대를 차지했다.그러나 이른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도로 토해내야 했다. 삼국을 압도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러일전쟁 이후에도 전쟁에 승리해서 우리나라를 집어 먹을 수는 있었지만 주변 열강이 반대하면 불가능했다.

결국 서기1905년 제2차 영일동맹과 카스라-테프트 밀약을 잇달아 성사시킨 후 삼킬 수 있었다. 이 때 결정 역할을 한 것이 미국이었다. 미국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나라를 삼킬 수 없었다.

미국은 대일항쟁기에도 우리 임시정부를 탄압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끊임없이 당시 2차 세계대전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는 미국에게 임시정부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끝내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제2차세계대전 이른바 주축국들에게 점령된 나라들은 해외로 나가 망명정부를 세운다. 임시정부였다.

그런데 미국은 프랑스 임시정부는 정부로 인정했다. 심지어 몽골도 임시정부로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인정여부는 2차대전이 끝난 뒤에 효과를 발휘한다. 2차대전이 끝나고 피점령국들에 대한 즉각 독립여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로 인정받았다면 그 나라는 승전국이 되어 바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로 인정 받지 못했다면 승전국의 관할하에 들어가 곧 바로 독립국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서기1945.08.15. 일제가 패망 했음에도 바로 독립국이 되지 못했다. 분단된 채 미국과 소련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20년이 넘게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였기에 해방 공간에서 승전국이 되었지만 미제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승전국인 중국 장개석 정권과 함께 싸웠다. 심지어 연합군 일원으로 미제 정보기관(OSS)과도 합동하여 일제와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 미국군정부 지휘하에 학살된 시신 앞에서 절규하는 양민. 그 뒤에 미제점령군 한 군인이 싸늘하게 내려다 보고 있다. 이러한 학살은 원래 일본 본토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나라 국민을 학살한 범죄 댓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피해 당사국이 우리나라에서 거꾸로 벌어졌다. 1894동학농민봉기 이후 계속되는 외세에 의한 민족사 비극을 웅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이 미국이 우리에게 임시정부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 분야 전문학자가 자세히 밝혔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의 이시종 박사다. 그는 서기2018.04.03.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문화공간 온’에서 미사협(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상임대표, 허성관 전 행자부장관)이 개최한 정기역사강연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이날 강연회는 미사협 공동대표 손윤 의암손병희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열였다.

이시종 박사는 이날 ‘해방정국과 한국독립당’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분단이 된 근본원인을 미국이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데서 찾았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꾸준히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때마다 거절했다고 분노했다. 이유는 정부로 인정해주면 해방 후 우리는 전승국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올 수 없다. 프랑스처럼 말이다. 프랑스는 미국이 망명정부를 정부로 인정해서 전쟁이 끝나자 전승국이 되어 독립할 수 있었다.

해방 후 김구로 대표되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왜 개인 신분으로 입국해야만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시정부의 어떤 직책도 불허되었다. 그래서 광복직전까지 광복군이 대일 전쟁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등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해방과 동시에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미국은 해방 후에도 이 땅에 식민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맥아더 포고령에서 자기들이 점령군이라고 직접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에 미국군 정부를 설치하여 지배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서기1948년까지 벌어진 상황을 보면,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부로 바뀐 것 만 빼놓고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친일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제식민지체제 어느 것도 청산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주체만 바뀐 채 미국식민지 시대를 열고 있었다.

오히려 인명살상 측면에서 보면 일제 조선총독부 체제가 더 좋았을 정도다. 조선총독부 치하에서는 이미 사회가 안정되어 인명살상이 많지 않았다. 일본제국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해방 된 공간에서 잔악한 인명살상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제주4.3양민학살과 같은 대규모 인명학살은 친미정권을 세워 미제식민지체제를 구축하려는 목적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이다. 백범 김구가 미군정이 주도하는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결사반대한 것도 이런 상황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38선으로 우리 강토를 두 동강 낸 것도 미국이다. 이시종 박사에 의하면 이 땅 분단을 통한 미제 통치는 이미 서기1945.02. 얄타회담에서 기획되었다고 한다. 신탁통치안로 불리지만 사실상 분할 점령계획이었다.

▲독립군과 양민들 학살진압 격려차 제주도에 내려온 이승만이 학살진압군 앞에서 연설을 벌이고 있다.

이후 미국은 친미정권 유지를 위하여 이 땅을 계속 유린한다. 미국은 스스로 영국이라는 압제정권을 몰아내고 탄생했다고 자랑한다. 그래서 이 나라는 정의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국시로 건국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기치로 탄생한 4.19민주혁명정부를 부정했다. 박정희가 반란으로 민주정부를 뒤엎자 방치했고 독재자 박정희를 키웠다. 최근 드러나는 전직 미국중앙정보부(CIA) 고위 관리의 회고에 의하면 4.19민주혁명정부 붕괴를 기획한 것이 미국이었음이 밝혀졌다.

저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정의, 자유는 국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백인들만을 위한 것이다. 유색인종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옹호 지지함으로써 18년동안 대한민국은 심각한 정신퇴행으로 치닫는다. 반공을 핑계삼아 이 땅을 사상, 정신의 동토왕국으로 만들어 놨다. 그래서 지금도 박정희 반공사상으로 병들어 있는 뇌들이 폭도로 변하여 성조기 들고 광장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

또 미국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를 내세움으로써 이 땅을 일제 식민지 병영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놨다. 툭하면 터져 나오는 선후배 사이의 군기잡기, 서열문화, 따돌림 폐습, 갑을관계 등이 대표사례다. 의과대학이나 체육계열 학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다. 먼저 아이들에게 천편일률 교복을 입히고 있다. 모두 일제 식민지 병영체제에서 나온 변형된 군복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 건물도 마찬가지다. 병동감옥을 본 뜬 것이다. 범죄자들을 감시하기 좋게 만든 감옥구조를 그대로 학교 건물에 갖다 놓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더 병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일제병영문화 잔재 후유증이 너무나 심대하고 크다.

▲'미국의 미소'. 아름답게 포장된 저 미국의 미소 뒤에는 우리 배달 겨레 근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야만과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저들은 오직 자국 이익을 위해서 이 땅에 머물고 있으며, 한반도 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현 남북분단체제가 미국 이익에 맞기 때문이다. 왼쪽이 골드만삭스 회장 로이드 블랑페인, 오른 쪽이 힐러리 클린턴. 사진: AFP통신

또 5.18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미국은 잔인함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미국이 자랑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전두환을 진압했어야 했다. 그러나 거꾸로 동조했다. 결국 5.18광주항쟁은 미국이라는 외세와 전두환이라는 관군이 합세하여 잔인하게 피로 진압된 셈이다. 1894동학농민봉기 비극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다. 그 때는 외세로 일본군이, 관군으로 이조선 군이 농민군 학살에 참여했다. 외세와 관군에 의한 학살이 제주4.3봉기에 이어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의 對한국 착취는 변한 것이 없다. 미군 주둔 비용을 명목으로 우리 세금을 년간 수십조원씩 가져가고 있다. 또 미국산 무기 강매로 국방예산을 미국에 쏟아 붓고 있다.

또 미국은 마음대로 미국군 시설을 우리나라 전국 어디에서나 설치할 수 있다. 對美불평등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이러한 식민지지배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독극물 등으로 인한 토지 오염은 심각하다. 대표사례로 미군이 ‘황제주둔’ 평택 새 미군기지으로 옮겨간 뒤 남겨진 구 미군용산기지 일대 오염이다.

▲ 제주4.3봉기 학살진압을 지시 하고자 제주 비행장에 내린 미군정부 수뇌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미군정부 장관 딘 소장, 세번째 부터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제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 감찰청장. 양민 학살 주요 인사들이다. 물론 저 둘 중에는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 민정장관 안재홍과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도 있다. 김익렬 연대장은  학살명령에 불복해 봉기 유격대장 김달삼과 평화방법으로 해결하는 협정을 이끌어낸다. 민간학살 방지대책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학살에 나선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을 기용했다. 또 제주도민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학살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기를 든 김익렬 연대장을 좌익빨갱이라고 하여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주4.3학살 역사에는 친미정권수립을 통한 미국 식민지 체제를 거부한 양심있는 인물도 있었다. 당시 친일관료, 경찰, 전직 일본군들 천지하에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제주4.3학살 당시 진압군 사령관으로 나간 김익렬 중령이 봉기군 대장, 김달삼과 협상을 해서 인명살상을 막을 길을 열어놓았다. 그는 미군정부와 이승만의 진압방법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적어도 제주도민이 똑 같은 선량한 국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협상을 잔인하게 찢어 버리고 서북청년단과 같이 양민학살에 앞장 선 대동청년단을 사주하여 ‘오라리 사건’을 일으켜 학살에 나선다. 미국 백인 경찰이 범죄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흑인을 현장 사살하듯이, 그 때도 우리 국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듯 하다. 제주4.3봉기 실패로 미국 식민지 체제는 70년이상 지속되고 있다.

트럼프 정권들어서 미국의 한국 수탈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양상이다.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우리나라 대통령은  뽑히기는 대한민국 국민한테 뽑혔지만 대미관계에서는 친미종속에 갖혀 마치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미국 관리같은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노예근성의 자발 작동인가.

미국은 일제 식민 통치 체제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다만 직접 통치냐 간접통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직접지배했다면, 지금 미국은 친미정권을 거듭 만들어 내면서 간접지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오마바 정권 당시 미국무장관, 클린턴 힐러리가 공언했듯이 저들은 우리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서기2013년 미국 금융재벌, 골드만삭스 방문연설에서, "우리는 한국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 이익을 위해 북한과 긴장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한다.“ 고 발언한 바 있다(서기2017년 위키리크스 폭로).

▲서기2013년 미국대선후보 경선 중,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은 미금유재벌 골드만삭스를 방문해서 "우리는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이 분단상태를 완전히 깨뜨릴 정도의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된다." 라고 분명히 했다.

오늘날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2차대전 이전에는 직접지배했고 지금은 우회지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미제독주체제에서 미제가 이런 수법을 써 먹고있다. 미제는 우리나라에 이 수법을 최초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미정권을 통한 지배다.

미국은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정보기관 공작을 통해서 세계 여러나라에 친미정권을 세워 우회 식민통치하고 있다. 대량학살무기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이라크를 침략해서 친미정권을 세웠다. 아프카니스탄도 오사마빈 라덴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침략하여 친미정권을 세웠다.

이집트나 리비아에서는 권력욕에 눈이 먼 당사국 민중을 선동해서 친미정권을 세웠다. 시리아에서도 이슬람 폭도들(IS)를 배후지원해 친미정권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개입으로 여의치가 않다. 현재 시리아를 보면 해방공간의 우리와 닮아 있다. 반군과 정부군과의 내전 상황이다. 그 배후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있다. 해방공간에서도 그랬다. 미제국주의가 식민지배하는 방식이다.

▲제주도에 도착한 미국 고문관 러쉬 대위가 한국 한 경비대 장교와 함께 자주독립을 외치는 독립군 학살진압작전을 모의하고 있다(서기1948.05.15. 미국립문서관리기록청 소장). 이 때는 이미 남한에 총선거가 끝난뒤였고, 독립군 초토화 학살 작전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미국은 일제식민통치체제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그 중에 가장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가 하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 체제를 정당화, 합리화시키는 강고한 이론이기도 하다.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준 식민주의 역사관이다.

이 식민사관은 말 그대로 식민주의 체제를 옹호하면서 피지배 식민지인들은 순응하고 저항하지 말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이병도, 신석호 등이 구축한 식민주의 역사학 체제가 우리나라 국사학을 장악하고 있다. 전국 대학교와 박물관, 연구소 등 역사관련 모든 기관을 장악한 채 매년 정부로부터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아 어떤 외부의 견제도 받지 않은 채 70년 이상 독점해 오고 있다.

현재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국사책이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국가가 국민들을 국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사분란하게 식민지 노예근성을 주입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인성과 세계관이 형성된다. 우리 정신이 누구에 의해서 농락당하고 어떻게 조작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또 이들 식민사학은 70년 이상 강고한 기득권으로 견제 받지 않고 있으니 독재다.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대한민국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역사 민주화’는 꿈 같은 얘기다. 오직 식민사관만이 절대 불변의 역사로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서기2018.04.03. 경남 창원에 차려진 제주4.3희생자 추모시민 분양소가 파괴되었다. 이는 서기21세기 지금도 서기1947.04.03. 당시 제주양민을 참혹하게 학살한 망령이 엄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지금 해방공간에서 한치도 역사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시민분향소를 파괴한 사람이 검거되었는데 49세 조 모씨로 밝혀졌다. 그는 이날 새벽 4시에 범행했다. 나이가 49세에 불과하다. 젊다. 제주4.3양민학살 미군정부의 망령이 젊은 세대를 이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본다(사진: 박영운facebook 원본 수정).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몇날 며칠을 가슴을 쥐어짜며 울부짖어도 잊혀지지 않는 이 통한의 역사앞에서 가정은 저절로 나온다. 너무나 아쉽고 원통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미국이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했더라면 우리는 전승국으로 자연스럽게 통일자주독립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을 지라도 제주도민 10분의 1, 3만 명 이상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제주4.3학살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최소한 20만 명 보도연맹원을 빨갱이로 몰아 자국민을 학살하는 이승만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미국의 탐욕과 이승만의 권력욕 그리고 친일부역자들의 노예근성이 합쳐서 일어난 비극의 역사다.

그렇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의 잔인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모두 일제 밑에서 개, 돼지 노릇하던 부역자들이 일제로 부터 배운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일본은 서기1907년 '도쿄권업박람회'에 조선인들을 전시해놨다. 인간동물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인을 마치 동물안 원숭이 처럼 전시해 놓고 그 종에서 대해서 분석, 설명해 놓고 히히덕 거렸다.

당시 '엽전은 패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횡행했듯이 이 말속에 일제가 조선인을 대하는 모든 시각이 들어있다. 이런 폐습이 그대로 온 몸에 녹아 있는 친일경찰, 친일관료, 일본군 부역자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정부 근간을 꿰찾다. 그러니 제주4.3학살에서 보인 이들의 잔인성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야만은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다. 5.18광주학살에서 보인 잔인성은 말할 것도 없다. 전두환은 민주항쟁 시민을 전쟁의 적으로 보고 대응했다고 한다. 이 자들에게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군사작전 대상인 적일뿐이다.

▲사진 맨 오른쪽이 박진경 중령. 그는 제주양민학살진압을 반대했다가 해임된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왔다. 무자비한 학살진압을 펼친 공로로 대령으로 특별진급한다. 지금 그는 학살 현장 제주도와 그의 고향 경남 남해군에서 '공비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충혼 비석과 동상으로 모셔진 채 현충일에 추모를 받고있다. 박진경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복무한 일제'황군'출신 친일부역자였다.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록에 의하면  '박진경  연대장은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했다고 한다.

제주4.3학살에서는 그래도 최소한 인간 양심이 살아 있었다. 김익렬 중령이 양민학살 반대하다가 미군정부로부터 해임 당했다. 박진경 중령이 후임으로 왔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포악성을 드러내며 제주 양민 학살 명령을 내렸다. 자국민 학살에 참다못한 부하들이 학살 ‘공로’로 대령으로 특진한 박진경을 진급 축하 잔치가 끝난 뒤 사살해 버렸다. 또 자국민 학살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여수순천 지역 제14연대 장병들도 있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5.18광주학살에서 보듯이 불의한 자국민 학살 명령에 항거한 군인은 보이지 않는다. 더 악화 되었다는 것이다.

친일부역세력은 해외 나가서도 잔인성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베트남 전쟁 참여다. 전투와 크게 상관없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서 보여준 잔인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그로 인한 상처는 피해자들의 가슴 속에 어제 일 처럼 박혀있다. 이들은 지난 촛불혁명 때 평화시민에게 발포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식민지 폭력과 야만근성이 사라지지 않고 서기21세기에도 이어 지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이 땅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불의와 부패 고리, 기회주의로 대한민국 경쟁력을 갉아먹는 가운데 그들만의 왕국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짜 놓은 부패고리에 진입하느냐 마느냐가 성공과 출세를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다. 출세, 성공하려면 불법과 비리, 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결국 피로 물든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은 미국이 저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우리를 구원해 준 은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해방 이후 친일부역 역도들이 우리나라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국민을 세뇌시켜 왔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중앙, 동아일보로 상징되는 친일부역, 기회주의 언론에 의한 세뇌가 지대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주적을 다시 설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학살진압군에게 체포된 제주독립군 전사들이 처형을 앞두고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학살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여 전사들도 보인다.

이날 제주4.3봉기 70주년 추념행사에서 문 대통령이 이산하 시인의 시, ‘한라산’을 언급했다. 이 시는 미국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저지른 잔악한 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미제의 각을 떠야 한다’고 외친다. 또 미국을 청산하는 길만이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피를 토한다.

그러면서 생각하기 싫고 그래서 몸서리쳐지는 학살 현장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의 시는 서사시다. 그래서 아주 길다. 그러나 반공세뇌교육으로 정신이 절름발이가 된 배달겨레라면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들어야 할 피로 물든 근현대사라는 평이다. 이 서사시는 제주4.3양민학살이 어떻했는지 실상을 정확하게 역사관점으로 토해내고 있다. 기자가 제주4.3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소음이 될 정도다. 아래에 ‘한라산’ 서사시 전문을 싣는다.

 

<한라산>

서시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무등산에서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

 

1.
지금으로부터 어언 120여 년 전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가 세계의 약소국들을 침략해
식민지쟁탈전을 벌이던 약육강식의 19세기 후반
프랑스 해적선이 대동강을 붉은 피로 물들이고
미국 해적선이 먼 훗날 한국현대사의 무덤을 파듯
평양의 왕릉을 도굴해 조선국왕의 수염을 뽑고
일본이 다시 강화도까지 침략해 쇄국의 빗장을 부수자
이제 조선반도는 영국, 독일, 러시아까지 몰려와
마지막 동북아의 교두보로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
서양제국주의 맹수들에게 온몸을 물어뜯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에 이빨이 박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아플 권리도 약탈당하고 죽을 권리도 약탈당하고
슬플 권리마저 약탈당한 긴 긴 세월 동안
무당에게 홀린 ‘붉은 여우’의 국정농단으로
나라살림은 거덜 나고 민초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앉으나 서나 고통밖에 잃을 게 없는 민초들은
이왕이면 벌떡 일어나 서서 죽기로 결심했으니
황토현에서 치솟아 우금치 고개에서 장렬하게 꺼져버린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그것이요,
멀리 바다 건너 제주도 산방산의 들녘을 삽시간에 불태운
‘이재수 난’의 들불이 그것이다.
그러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장수들이 참수되고
민초들이 총탄에 겹겹이 쓰러져 겹겹이 포개지자마자
한일합방으로 나라 잃고 하염없이 피눈물만 삼키다가
어느 날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1945년 불볕 여름
일제식민지 36년의 치욕과 악몽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손엔 빵과 또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이 땅을 점령한 미제국주의자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 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일본총독부가 미국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미제의 창살 없는 감옥
이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사 120여 년
다시 써야 할 피어린 민족해방투쟁의 한국현대사
압제의 사슬을 이빨로 뚝, 뚝 끊으며
붉은 피로 얼룩진 그 장엄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 어찌 잊을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잎이 아니라면
결코 그들의 노예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2.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었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
1948년 4월 3일 ‘제2의 모스크바’
밤마다 먼저 간 동지들의 피를 묻고
살을 묻고 뼈를 묻는 혹한의 한라산
그 눈 덮인 산하
붉은 피를 흘리며 끝내 숨져간
이름 없는 혁명전사들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끝내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을 누가 잊는가.
누가 잊을 것을 강요하는가.

동상으로 썩어문드러진 발가락을 자르고
뼈를 깎는 모진 고문과 추위에
여성전사들의 생리마저 얼어붙는 밤
그들은 기어이 갔다.
총알 박힌 다리를 절룩거리며
동지들의 어깨에 매달려
진지로 돌아가다
진지로 돌아가다
끝내 쓰러져버린 그들은 갔다.
아-
기어이 갈 곳으로 가고야 마는가.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의 혁명전사들은 그렇게 갔다.
미제의 각을 뜨다가
적들의 심장에 불을 지르다가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갔다.

적과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人共)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
….

3.
검은 상복을 입고 40년만에 처음 찾은 한라산
내가 나를 운구하듯 걷는 이 학살의 숲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마다 뼛가루처럼 쌓여있는 흰 눈이며
나뭇가지마다 암호를 주고받는 새들의 울음소리며
삐라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도
깜짝 놀라 피했던 새가슴이며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오름과 무덤마다
자지러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며
청보리 일렁이는 생가슴마다 차곡차곡 돌 쌓아
멀리 수장하러 배 떠났던 바다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땅을 파헤쳐
씹고 또 씹었던 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며
마지막 남은 낙엽마저 가솔린 냄새를 풍기며 불탔던
이 학살의 숲은
그러나 아직도 총소리로 가득하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미군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뿌리고
바다에서는 미군 함대들이 경적을 울리고
지상에서는 미군 장교들과 토벌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던 그날
한국판 ‘KKK단’인 서북청년단이 아편에 취한 채
한림의 금악리를 빨갱이 마을로 지목해
80여 명의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을 하고 바다에 수장한 다음
서귀포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로 몰려가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발가벗겨
나무와 바위에 묶어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모두 대검으로 젖가슴을 하나씩 천천히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석양에 물든 사라봉 봉수대 동백숲에서는
서청에 뒤질세라 더 포악해진 반공청년들이
하나님을 외치며 열아홉 살 처녀들을 윤간해 생매장하고
서귀포 임시감옥에서는 친일경찰이
빨치산과 그 가족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일제 뺀찌로 혓바닥 뿌리까지 뽑아버린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에서는
온몸이 총탄에 맞아 벌집으로 변한 사람
머리가 돌과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함몰된 사람
복부가 대검에 찔려 창자가 삐져나온 사람
음부에 긴 쇠꼬챙이가 꽂혀 있는 사람
손톱과 발톱과 이빨과 혓바닥이 모두 뽑힌 사람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이 박혀 있는 사람
두 젖가슴이 모두 잘려나간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한때는 사람이기도 했던 그런 빨치산들이
십자가 나무기둥에 묶여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이 간나새끼들과 에미나이들이 바로 빨갱이들이다!”
“폭도 빨갱이들의 종말은 이렇다!”
강제로 끌려나와 광장에 운집한 도민들을 향해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같은 미친(美親)놈들이
팔짱 낀 미군 장교들에게 서로 충성이라도 하듯
니뽄도로 시체들을 쿡쿡 쑤시며 소리쳤다.

처참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도민들이 말을 잃고 실신했다.
부모들은 손바닥으로 아이들의 두 눈을 가리기 바빴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속으로만 어림잡았다.
저건 김운민
저건 박남해
저건 김병남
저건 양미선
저건 남 진
저건 현애란
저건 이덕구….
통곡도 오열도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어야 통곡이라도 하지,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결코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낱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한 개의 총알이 가슴에 박힌 것은
차라리 행복한 죽음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라산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미군은 즉각 철수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제주 빨치산 만세!”

붉은 저녁노을이 꽃상여 따라 관덕정 위로 지고
붉은 파도가 바람 따라 만장기처럼 출렁이며
사라봉 지나 성산 일출봉을 돌다가 피를 토하고
산방산 지나 송악산을 돌다가 다시 피를 토하고
그렇게 제주바다를 한 바퀴 돌면서 피를 토한다.
40년 전의 산은 다시 한 번 빈산이 되고
그 빈산에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도 흘러가고
죽어도 흘러가고
마침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흘러갔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더 말이 없는
이 참혹한 한라산
마지막 몇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
이젠 상주가 되어 걷는 이 학살의 숲
옆에서 동지들이 쓰러져 시체가 쌓이고 쌓여도
오래 슬퍼할 시간이 없었던 이 겨울 숲
이제 이 숲은 누가 지키며
지키는 자는 또한 누가 지킬 것인가.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던 세월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듯
운구 된 자가 마지막 생의 수순을 밟듯
걷고 또 걷지만 여전히 맴도는 한라산
동지들이 토벌대의 삽자루에 생매장 당한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작두에 목이 잘린 이 숲속
동지들이 토벌대의 총칼에 쫓겨 몸을 던진 이 절벽
이 아득한 숲을 내 어찌 벗어나리.
이 지극한 절벽을 내 어찌 벗어나리.
생의 절벽은 곧 나의 궁극이요
나의 궁극은 곧 생의 절벽일지니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그 백척간두에서 내가 나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한 발짝 진일보할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진일보한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나의 존재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핏자국이란 말인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올해도 물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숲을 지나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스스로 부서져 길을 만들 것이니.
그렇게 낮은 방향으로만 흘러 길을 만들 것이니.
능히 그러할 것이니.
해마다 꽃 필수록 아픈 4월은 어김없이 다시 오는데
누가 그날의 제주바다를 기억하지 않는가.
누가 그날의 한라산을 추억으로만 기억하는가.

4.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친일매국노의 대를 이은 친미매국노들을 죽창에 꽂아
친일자본가의 대를 이은 친미자본가들을 횃불에 태워
그들에게 돌려주자.
그리고 꽃 피는 광주코뮌의 수천 명을 학살한
저 피 묻은 5월의 원수들을 찢어서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그리하여 역사가 고발하듯
태생부터 수천만의 인디언들을 학살하더니
태생부터 수백만의 흑인노예들을 학살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태평양 건너 한반도까지 서부개척을 하더니
멀쩡한 땅을 남북으로 갈라 늙은 허수아비를 조종하더니
수백만의 양민들을 빨갱이로 만들어 무차별 살상하더니
평양 상공을 날며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총질을 해대더니
대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버리더니
나치 같은 홀로코스트로 북녘을 병영국가로 만들더니
마침내 성조기의 51번째 별을 그리듯 휴전선을 그어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반공인질로 잡아
우리가 간신히 다시 일어나 간절히 다시 꽃 피울 때마다
가차 없이 민주주의의 동맥을 끊어온 너희 양키들은 들어라.

우리 한반도 인민들의 피가 더욱 붉은 것은
우리의 사상이 빨갱이에 물든 탓이 아니라
바로 너희 학살의 원흉들 때문임을
바로 너희 학살의 부역자들 때문임을
그리고 침묵하라.
어둠과 야만의 20세기, ‘자비로운 학살’을 주장하며
세계 곳곳의 전쟁터와 대량학살의 현장을 지휘하고도
국제법상 단 한 번도 전범으로 재판 받지 않은
세계 악의 축이자 근원인 우리의 가증스런 ‘혈맹우방’이여.
당신들이 발톱을 감춘 채 인간의 정의를 외치는 한
당신들이 총구를 감춘 채 인류의 평화를 외치는 한
우리는 잠들 수가 없다.
당신들의 춤추는 칼날 위에서
우리는 결코 잠들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잠들 수 없는 이 해방의 산하에
아직도 펄펄 끓는 노동자 농민들의 붉은 피가 있어
아직도 미제와 맞짱 뜨는 세계 유일의 동지가 있어
민족해방의 이름으로
조국통일의 이름으로
저 간악한 미제의 각을 뜨고
저 미친(美親) 매판자본의 심장에 불벼락을 안겨주자.
가슴에 폭탄 한 다발씩 품고 적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직도 눈 감지 못한 동지들의 원한을 갚아주자.
그리하여 노동자 농민들의 여윈 손들이
마침내 혁명의 숲을 이룰 때까지
결코 용서하지도 말고 결코 잊지도 말자.

5.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가수 이효리가 제70주년 제주4.3봉기 추념식에서 추념시를 낭독하고 있다.

이날 추모식은 어느 때 보다도 크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가수 이효리가 시를 낭독하고, 김은미 가수가 노래를 하고 대규모 합창단이 꾸려진 가운데 4.3비극을 상징하는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장엄하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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